Belorado - Ages
벨로라도 - 아헤스
위기는 출발하고 한 시간쯤 지나고 나서 시작되었다.
약이 효과가 없는지 때를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아침에도 화장실은 실패했다. 잠은 잘 잤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몸이 무거워짐이 느껴져서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나의 표정을 살피는 메그의 얼굴에 걱정과 안쓰러움이 얼핏 스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 시간을 걸으니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 첫 마을은 한 시간은 더 걸어야 나온다. 그렇게 생지옥의 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일단 배낭 허리끈을 느슨하게 푸니 배낭의 무게가 고스란히 어깨로 전해졌다. 무거움 따위 무릎의 고통 따위 느낄 겨를은 없다. 배앓이가 밀려오는 파도처럼 거침없이 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진땀이 나고 고통스러웠다.
품위고 염치고 뭐고 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포기하려는 순간, 신기하게도 마을이 보였다. 진짜 다행스럽게 곧이어 바가 나왔다. 그리고 더 다행히도 화장실에 줄 선 사람이 없었다.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메그 옆에 배낭만 던지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아.. 정말 아찔한 추억 하나 만들 뻔했구나.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괜히 실실 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이 기분! 그제야 메그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메그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틈을 보다가 메그에게만 작게 속삭였다.
"I did it!"
잘 안 들렸나 보다. 평범하게 웃는다.
사람들이 떠나고 그제야 다시 말했다.
"나 화장실 다녀왔다고! 아까 그 말이었어."
"아 정말? 그 말이었구나! 정말 잘 됐다!!"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중세 시대 악명 높은 오까산의 기운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걷다가 오까(Oca) 산을 만나 한 시간쯤 오른다. 산꼭대기에 있는 쉼터에서 쉬려는데 막 일어서는 포를 만났다. 5일 전 또레스 델 리오 마을에서 처음 만난 홍콩 친구 포와는 왓츠앱으로 가끔 안부를 주고받고 있었다. 혼자 걷는 그녀가 늘 신경이 쓰였지만 일정이 맞질 않아 함께 걸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녀를 3일 전 알베르게 앞에서 우연히 만나고, 오늘은 길에서 이렇게 마주치니 반가울 수밖에! 지친 모습이 역력한 우리는 길게 회포를 풀진 못했지만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찍었다.
돌산보다 흙산에 가까운 오까산에는 키가 아주 큰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넓게 난 길을 걷는다. 나무들이 거칠고 압도적이라서 그런지 포근함 보다 조금 삭막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저기 나무숲 사이에 숨은 뭔가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아 혼자일 때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 건지 누군가 길 위에 돌멩이로 화살표와 하트를 그려놓았다. 조금 더 가니 어느 예술가가 통나무 의자에 그림을 그려놓고 쉼터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쉬어가진 않았지만 익살스러운 그림과 다채로운 색감을 보니 긴장했던 마음이 놓였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오까산은 중세 시대 순례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구간이었다고 한다. 산적과 늑대들이 숨어있다가 순례자들을 덮치기도 하고, 한번 길을 잃으면 빠져나오기 힘든 숲이었다고. 그러고 보니 거칠고 삭막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물론 지금은 잘 닦인 길이라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말이다.
산을 내려오면 드디어 쉴 수 있는 마을이 나온다. 산 후안 데 오르떼가 (San Juan de Ortega) 마을이다. 시원하게 콜라를 마시는데 일본 친구 Y가 혼자 쓸쓸히 들어온다. 매우 지쳐 보이는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는 어제까지 함께 걸었던 이탈리아 친구 E가 오늘 무릎 때문에 결국 걷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밤새 무릎이 붓고 열이 났다고 한다. 순례길을 멈추어야 할 정도의 부상인 것 같다고. 아픈 그녀를 두고 혼자 출발해야만 했던 그의 심경이 매우 어렵고 복잡해 보였다.
어느 곳, 어느 순간에도 낭만은 피고
멀리서 한눈에도 보일 만큼 작고 소박한 마을 아헤스. 해는 여전히 청명하고 뜨거웠지만 조금 강하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바람막이 재킷을 걸치고 마을 한 바퀴 둘러본다. 마켓이 따로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라서 알베르게에서 숙소와 식당,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도 겸하고 있었다.
마을의 작은 교회를 찾아가 쎄요를 찍고 산책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기념품 가게에도 들렀다. 공예 작업을 하는 목수의 작은 작업실이기도 했는데 뭐 하나 똑같은 것 없이 특별한 소품들로 가득했고 목수의 주름진 손의 나이테만큼 정성과 세월이 깃든 곳이었다. 나는 전시해 놓은 작업의 결과물 보다 어떻게 작업하는지 엿볼 수 있는 작업 공간이 항상 더 궁금하고 관심이 간다. 볕이 좋은 날 바깥 의자에 앉아 나무를 손질하며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남몰래 피식 웃기도 하는 목수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숙소로 돌아와 쉬는데 Y와 메그가 한참 일본어로 대화를 한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나 했는데 Y가 그동안 유럽 친구들과 걸으면서 벌어졌던 까미노 위의 '그린라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누가 누굴 좋아하는 거 같고 누구는 또 누굴 좋아하게 되었고, 본인도 어느 여자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는 까미노 위 청춘들의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 무릎이 아픈 그녀를 두고 떠나온 Y의 안타까운 표정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사실 조금 짐작은 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피고 지는 사람들의 감정들이란 참 야속하기도 하지. 큐피드 화살은 어쩜 그리도 하나같이 엇갈리고 꼬이고 마는지. 청춘들의 엇갈리는 마음에 덩달아 마음이 아리다가도 어느새 흥미진진하게 듣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어느 곳에서나 어느 순간에도 낭만은 피고 있었다.
간식으로 먹다 남은 감자칩 봉지를 접으려고 하는데 메그와 나 둘 다 어디서 본 것이 있어서 서로 도전해 보았다. 하지만 둘 다 몇 번을 해보아도 실패. 그게 뭐가 그리 웃기는지 둘이 한바탕 웃고 난리가 났다. 이렇게 웃고 나면 정말 개운하다. 언제부턴가 둘이 갑자기 빵 하고 터지는 포인트가 하루에 한 번은 꼭 있다. 우리의 힐링 포인트이다.
저녁을 먹기 위해 하나 둘 식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며칠 전 길에서 만난 그렉과도 반가운 조우를 하고 나란히 앉아 저녁을 기다린다. 따듯한 음식과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아이스크림케이크로 마무리하니 몸도 마음도 나른해진다. 나른함은 행복의 또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부는 곳, 아헤스의 알베르게 침대에 누워 침대의 낙서도 보고 창밖 하늘도 바라본다. 바깥에서는 아직 도란도란 대화중인 순례자들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해가 지자 모두들 안으로 들어오고 더욱 조용해진 마을의 저녁. 건물 밖에는 Y만 홀로 남아 사랑에 빠진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밖에 있는데도 마을은 조용하고 그의 목소리도 작지 않아 대화 내용이 또렷이 들려왔다. 알베르게의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의 개인적인 사연을 듣는 중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웃기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닫아 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어디 보자.. 까미노를 시작한 지 며칠이 되었지? 누워서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 열한 번째의 날. 자 이제 내일은 부르고스에 도착한다.
.. 벌써 이만큼 왔나.
.. 어떡하지..?
Bonus!
아헤스 알베르게 : Taberna - Albergue Agé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