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es - Burgos
아헤스 - 부르고스
오늘은 초반에 만나는 마따그란데 언덕(Alto de Matagrande)만 넘으면 대부분 평탄한 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조금 큰 돌들이 제멋대로 길에 박혀 있어서 자칫하면 발목을 다칠 수 있다. 풍경을 볼 겨를도 없다. 돌들을 피하느라 시선이 계속 아래로 향한다. 몇 번 발목이 휘청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미드컷 등산화가 아직까지 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
무릎이 안 좋았을 때 잠시 함께 걷던 스페인 친구를 오르막길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그 친구의 사소한 응원이 정말 큰 위로가 되었었다. 정말 너의 말처럼 내 무릎이 호전되었다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고마웠다고.
첫날부터 말썽이던 무릎은 다행히 일주일이 지나면서 나아지고 있었다. 피부염 때문에 착용하지 못했던 무릎 보호대도 이제 저기 배낭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늘 시큰거림은 느껴졌지만 더 이상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계속되는 험한 언덕을 발목과 무릎이 다치지 않도록 집중하며 올라간다. 그러다 보면 늘 그렇듯이 그 끝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소박한 나무 십자가가 서있었다. 때마침 붉은 해가 떠오르고 십자가 사이로 흐르는 빛과 풍경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손이 모아지고 마음이 경건해진다. 걷는 것은 정말 기도와 같다.
애비로드를 걷는 비틀즈처럼
오늘따라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아무래도 오늘 부르고스에 도착하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처음 하루를 더 쉬기로 했으니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이 난 게 사실이다. 부르고스면 프랑스 길의 1/3 정도 온 것이다. 그동안 정신없던 까미노 적응기를 보내고 나는 정말 얼마큼 왔을까?
바람이 불고 무척 쌀쌀해서 처음으로 재킷을 입고 걷는 중이다. 벌써 9월 중반에 들어섰으니 한국도 가을이 성큼 다가왔겠지? 추우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앞에서 걷고 있는 키가 크고 건장한 순례자가 있다. 자세히 보니 나와는 다르게 그는 유유자적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중간에 통화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여유롭게. 한데 그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갑자기 승부욕 발동. 나 혼자 그를 따라잡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빠르게 걸어본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고 메그와 Y는 어느덧 내 옆으로 왔다.
"오짱, 무슨 일이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빨라?"
"아니 추워서 빨리 걷다가, 저기 저 남자를 봤는데 엄청 천천히 여유롭게 걷더라고. 그런데 거리가 안 좁혀지잖아! 저 사람 따라잡아보자고 걸어봤지."
"아 그 심정 내가 잘 알지. 보통 다른 사람들 한 걸음이 내 두 걸음이거든."
메그는 나와 15cm 이상 키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나보다 훨씬 빨리 걷는다. 그러니 남들보다 얼마나 더 빠르게 발을 움직이며 걷는 것일까? 속도와 체력만으로 보자면 메그는 빠르고 지치지 않고 잘 걷는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선두 그룹에 속했다. 물론 까미노는 경쟁의 길도 아니고 속도와는 무관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대로 걸을 뿐이다. 다만 그렇게 매일 장시간 걷다 보면 때로는 앞선 이들이 페이스메이커(pacemeker)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힘들기만 하고 엄두도 못 내던 것들이 이제는 가능한 걸 보니 어느 정도 까미노에 적응이 되어가는 중이겠지. 내 체력의 한계와 상태를 조금 알게 된 지금, 몰랐을 때보다 걷는 것 자체가 더욱 즐겁고 재밌어졌다.
공원을 만나 걷는데 점차 느낌이 온다! 대도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커도 너무 커서 한 시간 이상을 계속 걸어야 했던 푸엔테스 블랑카스 공원(Fuentes Blancas Park). 다채롭고 아름답게 조성된 풍경도 좋았지만 현지 사람들과 뒤섞여서 걷고 있으니 왠지 새로운 기분도 들고 사람들 관찰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런 공원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대충 저 멀리서 걷는 순례자 G의 뒤를 따라 걸었다. 메그와 Y는 그런 내 뒤를 쫓으며 걸어오다가 우리는 모두 한 곳에 멈추게 되었다. 어랏, 화살표가 어딨지?
그랬다. 오늘도 줄줄이 소시지로 까미노 길을 벗어나 공원 끝까지 가고 말았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갑작스럽게 길 찾기 회의가 열린다. 나는 길 위에서 순례자들이 갑자기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런 순간들이 왜 이렇게 좋은지. 위기가 왔을 때 동질감과 동지애를 반짝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옆에 동료들이 있다면 가끔 길을 잃어도 괜찮은 것이구나. 더군다나 이제 드디어 도시에 들어선 것 같으니 어디로든 길이 이어지게 되어있다.
한참을 더 걸어 부르고스 도시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추레하기 그지없는 그지꼴을 한 4명의 순례자들이
마치 애비로드(Abbey Road)를 걷는 비틀즈라도 된 것처럼
신나고 당당한 걸음으로 도시를 횡단한다.
두리번거리는 두 눈은 번뜩.. 아니 반짝이고 입꼬리는 자꾸만 올라간다. 여기가 부르고스다.
우연은 인연이 되고
많은 순례자가 하루 더 쉬어 가는 대도시 부르고스. 12일을 꼬박 걷다가 드디어 여기서 2박을 한다.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는 연박이 어렵기 때문에(체크아웃을 했다가 다시 체크인해야 함) 근처 호스텔을 예약했다. 사정이 비슷한 순례자들이 같은 숙소에 많이 있어서 반가웠다. 순례자들만이 아니라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어서 환기가 되기도 했다. 메그와 나는 며칠 만나지 못한 소은이 왠지 그리웠다. 어디쯤 오고 있을까? 공립 알베르게에서 자려나? 마침 공립 알베르게로 가는 Y에게 소은을 만나면 우리가 찾는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오랜만에 손빨래 대신 자주 안 입는 옷까지 모아 세탁기를 돌리기로 했다. 배낭과 등산화도 테라스 햇볕에 말려둔다. 그렇게 모든 짐을 정리 점검하다가 알아차리게 되었다. 지금 핸드폰을 제외하고 내가 가진 가장 비싼 것. 바로 고프로(GoPro) 카메라가 배낭에 없었다.
까미노를 영상으로 담아보고 싶었다. 배낭 무게 때문에 떠나기 직전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가져왔었다. 하지만 까미노 초반 너무 힘이 들었고 사진을 찍으면서 영상까지 찍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사진에 집중하기로 하고 4일째부터 고프로는 배낭 깊숙한 곳에 넣어 두고 꺼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가방이 가볍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기도... 휴.. 문제는 그게 내 것이 아니라 친구 것을 빌려 왔다는 것이다.
나가려는 정신을 붙잡고 몇 번을 반복해서 짐을 탈탈 뒤졌지만 없다.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누가 가져간 건 아닐까? 멘붕이 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지금껏 묵었던 알베르게를 역추적해 가며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메일이나 왓츠앱이 있는 곳은 번역기를 돌려서 분실물에 대해 물어봤고, 전화는 조금 애를 먹었다. 결국 호스텔 바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염치 불고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고맙게도 그는 몇 군데 통화를 직접 해 주었다.
하지만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그나마 3일 정도 아주 짧게만 찍어놔서 천만다행인 것을.. 자.. 마음을 내려놓자. 내려놓자...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이 바보 맹꽁이... 하며 콩 하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래도 배는 고프다. 이미 점심시간은 지났으니 메그와 호스텔 앞에서 간단히 먹고 산책을 하러 나왔다. 산책 중에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는 추로스가 있어서 커피와 함께 시켜보았다. 평소 좋아하는 간식은 아닌데 스페인 다녀온 한국 친구들이 꼭 먹어보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추로스였다. 그런데 이 앞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우릴 발견하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바로바로 홍콩 친구 포였다.
이런 우연은 까미노에서 순례자들끼리 종종 있는 일이긴 하지만, 포와의 인연이 또 한 번 우리와 엮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는 한참 수다를 떨다가 포가 추천해 준 타파스 집을 지도에 저장해 놓고 저녁에 가보기로 했다.
나는 술을 꽤 즐겨하는데 그동안 가끔 와인 한두 잔 정도만 마시며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사실 너무 힘들어서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부르고스에 가까워 올수록 나는 메그에게 부르고스에 가면 반드시 'A bottle of wine'을 먹겠노라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면 메그가 "그래, 우리 거기 가면 꼭 'a bottle of wine'을 마시자!"라고 환하게 웃었다. 사소한 소망들은 그렇게 우리가 힘들 때 힘차게 걸을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곤 했다.
저녁에 들른 타파스 집에서 나는 결국 와인 한 병은 마시지 못했지만 평소보다 여러 잔의 와인을 타파스와 즐길 수 있었다. 들어가는 곳마다 스페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이젠 그런 시선도 익숙해졌다.
알베르게와 달리 호스텔은 통금시간이 자유로워 오늘만큼은 여유로운 저녁을 보내고 숙소로 향했다. 그냥 방에 들어가기가 왠지 아쉬워서 괜히 공용 키친을 들렀는데 그토록 찾던 소은이 거기 있는 게 아닌가! 우연은 정말 인연이 되는구나! 우리는 반가워 얼굴이 다 빨개졌다. 소은은 함께 걷고 있는 불가리아 친구 이반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함께 마시며 내일 일정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내일은 쉬는 날이지만 사실 순례길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고 부족했던 것을 해결해야 하는 아주 바쁜 날이기도 하다.
너무 늦지 않게 침대로 돌아와 조용히 잘 준비를 한다. 내일 다시 순례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의 숙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부르고스의 밤은 길었다. 이어 플러그를 뚫고 들려오는 홍대의 불금 같던 거리의 소리는 새벽 3시가 넘어서도 계속되었다.
Bonus!
- 부르고스 호스텔 : Hostel Catedrad Burgos
- 타파스 바 : Casa Pan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