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작은 다이닝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Burgos

by OHz 오즈

부르고스


미술관 옆 경찰서

아침 8시, 이반이 간단히 아침을 차려주겠다고 해서 기다린다. 이반은 불가리안이지만 마드리드 레스토랑 셰프이다. 셰프답게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까미노에서도 매끼 맛있는 걸 찾아 먹는 편이라고 한다. 티격태격하며 아침을 차려주는 이반과 소은이 꼭 남매 같다. 둘을 보면 귀여워 흐뭇하게 웃게 된다.


소은과 이반 그리고 메그는 필요한 것이 있어 데카트론에 다녀온다고 한다. 나는 혼자 할 일이 있어서 남았다. 사실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다녀올까 싶었는데 이를 포기하고 경찰서를 가려고 한다. 고프로 카메라 분실과 관련해 혹시 모르니 폴리스 리포트를 받아두기로 했다. 고가의 카메라를 찾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화장을 조금 하고 나서니 슬그머니 기분이 난다. 오전에 대성당 옆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가보기로 했다. 도시와 성당이 보이는 멋진 뷰를 가진 곳이다. 이곳에서 펠릭스 드 라 콘차(Félix De La Concha)라는 스페인계 미국인 작가의 그림을 만났다. 어떤 하나의 장소가 조금씩 다른 시간, 위치에서 무려 75개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고 작가가 의도하고 계산된 좌표에 따라 시점의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프로젝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그림 속 공간에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림의 장소는 분명 작가에게 이야기와 의미가 있는 곳이겠지. 까미노를 걸으며 특정 장소에서 다수의 사진을 찍게 되는 나의 경우도 그랬다. 기억하고 싶어서 찍고 또 찍게 되는 순간들. 그러니 한 장소를 수십 장으로 그린다는 것은 1mm의 공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장소에 대한 애정과 열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의 건물과 공간에 대한 디테일한 연작들은 그 장소와 시대에 대한 초상화였다.


미술관에서 경찰서까지는 약 2km, 3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지도를 보니 근처에 작은 경찰서도 있지만 언어가 통해야 할 것 같아서 조금 떨어진 큰 경찰서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되어가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었으니 일단 경찰서부터 가보자.





도착 전에 구글 번역기를 돌려 스페인어 몇 가지 문장을 준비해 두었다. 이곳 시스템을 알 수 없어 도착해서도 계속 눈치를 보다가 번호표가 있길래 일단 뽑았다. 한국이라도 좀 기다려야 했을 것 같은데 이곳은 유럽이니 반나절은 기다릴 각오는 되어있었다. 어, 근데 생각보다 빨리 순서가 왔다?! 하지만 내가 번역해 놓은 문장을 보더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안내를 해준다. 아마도 이런 일을 처리하는 부서 중에서도 영어가 되는 경찰관에게 안내하는 것 같았다. 나의 대기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각오는 했지만 대기가 길어지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스페인에서 이 귀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는 게 맞을까? 차라리 도시 구경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간은 흐르고 결국 내 차례가 왔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영화에서 보던 딱 그런 스페인 경찰관이 앉아있다. 서툰 영어로 인사하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영화배우 휴 잭맨을 꼭 닮았다.


그렇다. 그 휴 잭맨 경찰관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친절했고 자기 일처럼 나의 사정을 들어주었다. 공감과 걱정을 해주며 믿음직스럽게 리포트 장성을 해나가는 그에게 나는 반해버렸다. 대기시간 동안 심난했던 마음은 대체 뭐였던가?!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한 시간 가까이 정성을 다해 리포트를 작성해 주는 휴 잭맨 경찰관님. 그 완벽한 일 처리에 제가 쫌 반했습니다. 휴 잭맨 최고다. 부르고스 경찰관 만세! 콜록..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한 것 같았다. 스페인 경찰관을 만난 것도 나름 특별한 경험이라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경찰서를 나오니 벌써 오후 3시가 훌쩍 넘었다. 갑자기 허기짐이 느껴져 마트에서 먹을 것과 와인 한 병을 사고 숙소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나의 작은 다이닝에 초대합니다.

도시를 구경할 시간은 남아 있었지만 경찰서를 다녀오니 기운이 좀 빠진 상태였다. 기대했던 부르고스에서의 두 번째 날, 더 욕심부릴 것 없이 이것으로 만족하며 마무리하려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호스텔 공용 식당에 앉아 마트 음식과 와인을 먹으니 혼자 있는 이 여유로운 시간이 참 좋았다. 공용 공간이라서 간간이 오고 가는 순례자 친구들과 인사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나의 테이블은 누구에게나 열린 작고 편안한 "팝업 다이닝"이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꺼내놓는 마법 같은 테이블.

어서 오세요. 차린 건 와인밖에 없지만 누구든 환영합니다.


첫 번째 손님은 까미노에서 사랑에 빠진 일본 친구 Y.

유난히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던 그는 내가 혼자 있는 것에 마음이 쓰인 모양이다. 각자 할 일을 하면서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나의 테이블에서 와인 한 잔을 하면서 깊은 대화로 이어졌다. 유난히 밝은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그의 그늘도 함께 보인다. 늘 많은 이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인싸 중에 인싸 Y가 그랬다.


"까미노를 걷는 누구나 사연을 가지고 있잖아. 말하진 않지만 다들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겠지. 나도 그렇고."

"맞아. 다들 혼자 감당하고 있는 것들이 있을 테지."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자신의 그늘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는 홀가분해지고 서로 위로가 되었다.


그가 왜 여러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하게 되었는지, 지난 배낭여행에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왜 까미노에 왔으며, 일본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는지.

그는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온 까미노에서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을 어떤 마법 같은 순간을 통해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런 그녀가 무릎을 다쳐 내일 돌아간다고 하니 마음이 안타까워 어찌할 줄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바보같이 눈물이 그렁한 Y를 보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서로 왜 우냐며 울다가 웃는 Y와 나.


"네가 확신이 들면 그녀를 따라가! 그녀가 가는 곳이 어디든 함께 있어!"

"그녀는 내가 예정대로 까미노를 걷기를 바랄 거야. 산티아고까지 다 걷고 나서 만나러 갈 거야.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다 해내고 당당한 모습으로 찾아가고 싶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정말 시간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벌써 그녀와 결혼까지 상상하고 있다고 했다. 아니 그녀의 마음도 아직 모르잖아?!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아직 모르고 속도가 너무 빠르지만 그냥 내 상상이니까 이해해 줘."

"그래 네가 결혼하게 되면 나를 꼭 초대해 줘.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이 순간이듯 사람의 마음도 쉽게 변하잖아. 일단 너의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지 잘 지켜봐."


어느새 메그도 데카트론에서 돌아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오늘 경찰서 다녀온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아까부터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혹시 아이스크림 먹을래? 내가 먹고 싶어서 샀는데 박스로 밖에 안 팔아서 한 박스 사 왔거든."


오늘 다이닝의 두 번째 손님, 미국 오하이오에서 온 테리 아줌마다. 그녀는 영드 <닥터 후> 뉴 시즌 4에서 도나 노블 역을 맡은 케서린 테이트를 꽤 닮았다.


"너희는 모두 까미노에서 만난 친구니?"

"어 우리 다 까미노에서 만났지."

"너네 진짜 부럽고 대단하다. 나는 여기 와서 친구들 만나려고 했는데 아직 못 만났어. 내가 생각했던 까미노는 이게 아닌데.. 여러 가지로 좀 실망스러워."


까미노는 외로운 사람들로 가득하며 외로울 수밖에 없는 길이다. 모두이게 친절하지만 모두에게 친절해서 외로울 수도 있는 길이다. 그녀는 기대했던 순례길이 아니라고 투덜거리다가 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내가 친구를 사귀려고 어느 정도 노력을 했냐면, 다들 올라(hola)라고 인사하잖아. 근데 나는 혹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일부러 헬로(hello)라고 인사하면서 걸었어. 누군가 똑같이 헬로 해주길 바라면서."

"미국 사람도 많은데 아직 못 만났어?"

"많이 만났지. 근데 내가 미국 친구 사귀려고 여기까지 온건 아니잖아. 돌아가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아이고.. 여기는 스페인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올라'라고 인사하는 게 모두에게 더 편하고 당연할 텐데... 꼭 영어를 해야 친구가 되나요. 좀 더 마음을 열어봐요.. 하지만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오, 유감이네요.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 우리를 만났잖아요!"

"맞아. 그렇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영어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은 언어가 안 통하면 대화를 포기해 버린다. 아마 평소 외국인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거나 자신도 이방인이었던 경험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테리를 위로하긴 했지만 그녀가 조금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모두 비슷하게 하고 있었다.


브라질 모녀도 와인 한 잔을 하고, 배낭여행 중인 영국인도 나의 테이블을 왔다 갔다. 그들의 세상이 더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는 않았다. 저녁이 되고 식사를 하러 이반과 소은이 들어오고 메그는 떠난다. 방금까지 훌쩍이던 테리도 친구들과 밖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며 신이 나서 나간다. 어느덧 내 왼편으로 쭉 이어진 테이블에 사람들과 음식들로 채워진다. 한병의 와인만 있던 나의 작은 테이블이 두병, 세병의 와인으로 채워져 간다.

먼저 시작했던 나는 한참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부르고스에서의 또 다른 하루. 도시를 더 구경하고 엄청나게 좋은 곳을 가지는 못했지만 드디어 "a bottle of wine"의 작은 소망을 이루었다. 이 와인 한 병은 의도치 않게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소망, 지나간 시간과 인생을 잠시나마 만나게 해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나는 또 다른 우주를 만난 것 같았다.


과연 수많은 존재들의 상실이나 슬픔, 허무함 같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가 있을까? 아마 우리는 그것을 찾지 못해 마음이 방황한 채 이 길을 걷는 중일 지도 모른다.


그들의 침묵과 말 사이,

깊고 반짝이는 눈빛과 그 시선이 가끔 향하던 허공의 사이들을 기억한다.

또다시 준비하는 내일과 마음속에 있는 어제들의 간극들

그리고 그 간극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던 오늘의 마음까지.


고마워요. 마음을 열어줘서.


홀로 외로운 여기서 내 안으로 깊게 빠져들다가도

이렇게 가끔 다른 존재들을 통해 나는 새로워지고 있다.






Bonus!

- 부르고스 호스텔 : Hostel Catedrad Burgos
- 부르고스 현대미술관 : Centro de Arte Caja de Burgos C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