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 나의 세상은 확장되고 있어

Burgos - Hornillos Del Camino

by OHz 오즈

부르고스 -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뜻밖의 사람들

아직 잠든 도시 부르고스를 부지런히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옷이 두껍다. 지역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계절이 온 건지. 이곳 부르고스를 기점으로 아침, 저녁이 쌀쌀한 초가을 날씨로 들어섰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순례자들은 조용한 마을에 들어서거나 도시를 걸을 때는 가능하면 스틱을 접어 사용하지 않거나, 고무 캡을 낀 상태로 사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틱의 뾰족한 쇠가 마을의 돌길이나 도시의 시멘트 길에 닿으면서 생각보다 큰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순례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면 조심할 수밖에 없는 순례자 매너 중 하나이다.


특히 모두가 잠든 새벽길을 나설 때 조심하게 되는데, 오늘 부르고스 도심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좀 요란스럽고 특이한 순례자들을 만났다. 네댓 명쯤 되는 그들은 모두 독특한 머리 스타일에다 히피 분위기를 풍겨서 눈에 잘 띄었다. 문제는 그들이 스피커를 들고 시끄러운 음악을 크게 틀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적막한 새벽을 걸으면 평소와 다른 감각들이 살아나곤 한다. 그런 고요한 순간을 방해하며 자기들만의 취향으로 바꿔버리는 그들의 이기심에 메그는 조금 화가 난 듯했다. 나도 좀 시끄러워서 속도 조절을 하며 그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도시를 빠져나가자마자 물안개로 가득해지는 묘한 아침이다. 앞서 걷던 사람이 자꾸 안갯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한다. 해가 밝으니 금세 더워져서 바람막이 재킷은 벗어버렸다. 옷을 벗을 때 이제는 멈춰서 벗지 않는다. 가방을 멘 채로 걸으면서 재킷 벗는 것 정도쯤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참, 물병도 이젠 한 손을 뒤로 뻗어 배낭에 넣을 수 있다. 순례자 루틴에 정착하느라 정신없던 그때의 내가 아니란 말이다. 후후.

까미노 적응기를 지나 이제 까미노 중반기로 접어들었다. 14일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했다.





라베 데 라스 깔사다스(Rabe de las Calzadas)에 들어서자, 순례자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들이 눈에 띈다. 아인슈타인, 간디, 마틴 루터킹의 벽화들은 까미노의 정신을 인도하는 듯했다. 벽화들을 심심치 않게 보면서 가다 보면 아주 작은 성당(모나스떼이호 성모 성당)이 있다. 그 앞으로 순례자들이 모여있길래 나도 가보았다.


들어가니 한 할머니가(아마도 수녀님?) 순례자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물으며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해주고 있었다. 기도가 끝나자, 소박한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며 앞길을 축복해 주셨다.

우연히 들어온 성당에서 뜻밖의 블레싱(Blessing)을 받으니, 눈이 뜨거워진다.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낯선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타인을 축복하며 기도해 주는 사람이라니. 그녀의 눈에도 왜인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까미노는 얼핏 보면 수많은 여행객(순례자)이 소비하고 누군가는 수익을 가져가는 평범한 여행지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걷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없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매일 같이 뜻밖의 사랑과 친절과 다정한 사람들을 목격하고 있는가.





뜻밖의 다짐

마을을 벗어나자, 본격적인 오르막길의 메세타 구간을 만났다. 해가 점점 뜨거워져 고개를 숙이고 몸을 늘어뜨린 채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오전이라 이 정도지만 12시를 넘기면 더 뜨거워질 것이 뻔해서 부지런히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12시 전에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다. 때때로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는 자전거 순례자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걸음이 빠른 그렉과 메그는 벌써 마을에 도착해 어느 상점 앞에 앉아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곧이어 12시가 되자 모여있던 순례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알베르게가 꽤 여러 개 있나 보다.

시간이 이르니 시에스타(오후 2시) 전에 씻고 나와 점심거리를 사다 먹기로 했다. 서둘러 씻고 나오니 어제 소은과 이반 그리고 Y도 나란히 숙소로 들어온다. 메그와 나는 간단히 상점에서 보카디요(스페인 샌드위치)를 사서 돌아왔고 이반은 셰프답게 근처 식당에서 먹겠다고 소은과 떠났다. 숙소 라운지에서 맥주와 보카디요를 한입 베어 먹으니 캬~ 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점심을 먹고 메그, 소은과 마당 선베드에 늘어졌다. 파리가 엄청나게 붙는 거 말고는 상쾌하고 조용한 완벽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불편하지 않고 조급해지지 않고 뭔가 안정이 된다. 많은 순례자가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할지도 모른다. 북적거리는 것 같지만 실은 홀로 외롭고, 외롭다가도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는 요상한 순례길. 말 한마디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안전한 공간에 안전한 사람들과 있는 이 휴식의 순간. 만끽하기만 해도 부족할 그 순간 속에서도 나는 이것이 벌써 달아나 버릴 것이 분명해서 슬프게 행복했다.





워낙 마을이 작으니, 산책도 여유롭게 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다. 유유자적 걷다가 경치가 좋은 곳으로 향하니 성당과 공립 알베르게가 있었다. 알베르게에서 막 나오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모녀와 눈이 아슬하게 마주쳤다. 수줍어서 인사를 건네지는 못했지만,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성당을 구경하고 공립 알베르게 주위를 서성이다가 이번엔 브라질 모녀를 만났다. 앞으로 일정을 얼추 이야기해 보니 우리와 꽤나 비슷하다. 티셔츠를 맞춰 입는 이 사랑스러운 엄마와 딸을 까미노에서 계속해서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까미노를 부부가 함께 오거나 모녀, 부자, 혹은 부녀가 함께 걷는 모습은 누가 봐도 부럽다. 내 부모님과 동생도 2017년에 함께 순례길을 걸은 적이 있다. 부모님은 순례길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언젠가 나도 사랑하는 내 가족과 까미노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언니나 동생과는 달리 나에겐 가족과 여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워낙 또래들과 어울리길 좋아했고 혼자 여행하는 낭만도 꽤 즐겼으니까. 20대에 긴 시간을 혼자 살기도 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일구는 것이 익숙하고 편했다. 그래서 그 시절 가족 앨범을 보면 나만 거기에 없는 사진이 많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자리를 지켜준 언니와 동생에게 고맙다.


지금은 두 아이가 있는 워킹 맘으로 가정과 일터를 모두 챙기느라 바쁜 언니와 이제 막 새 직장 1년 차를 보내고 있는 동생이 상대적으로 부모님과 여행하는 시간이 없는 편이다. 나 역시 직장에 다닐 땐 그랬었다. 간신히 연차 내고 '휴양'과 '힐링'차 휴양지만 겨우 다녀오느라 가족여행 같은 걸 챙길 여력은 없었다.


다행히 우리가 열심히 사회인이 되어갈 때 여행 좋아하는 부모님은 순례길도 다녀오고, 두 달 가까이 뉴질랜드에 캠핑카 여행도 다녀오셨다. 계획 짜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아빠와 호불호 별로 없고 두려움 없는 엄마가 여행 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나름 갭이어가 된 나는 이제야 부모님과의 여행이 특별해 보인다. 부모님과의 여행은 상상도 안 해본 내가 웬일인지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뭐 대수냐 할 테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만한 뜻밖의 변화이다.

이제는 여행 좋아하고 시간 부자인 우리들이 함께 장거리 여행을 계획하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순례길이 끝나면 그동안 가족여행 불참러로서 만회의 기회를 마련해 보고 싶다.





뜻밖의 발견

이렇게 작은 마을일 경우, 숙소에서 커뮤니티 디너를 열면 메그와 나는 대부분 신청해서 먹는 편이다. 오늘도 기대되는 커뮤니티 디너. 꽤 많은 순례자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메뉴는 빠에야! 오예 밥이다!


일자로 길게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앞에는 메그가, 옆에는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된 미국인 데이빗이 앉았다. 데이빗의 앞에는 영어를 전혀 못 하는 프랑스 할아버지가 자리했다. 메그와 나 빼고는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어서 인사를 나누는데 데이빗이 아주 편안하고 배려 있게 대화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특히 프랑스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구글 번역기로 끝까지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의례적인 질문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고 또 그의 말을 귀담아듣고,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놀라웠다.


데이빗은 내가 만난 미국인 중에 가장 수다스럽지 않고 필요할 때 말했으며 아주 따듯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말이 아니라 눈빛과 자세와 태도로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는 이 사람이 너무 궁금했고 호감이 갔다. 어떤 사람이지? 뭐 하는 사람일까? 왜 왔을까? 이 사람의 세계관이 너무 궁금해졌다.


까미노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데이빗 같이 40~60대 중년의 남성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솔직히 아마도 나에게 "중년 남성"에 대한 이미지나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 권위적이고 보수적이고 강하지만 속은 텅 빈 모습 같은? 그런데 까미노에서 만난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중년 남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깊은 눈을 가졌고 배려가 있었으며 선을 넘지 않으려는 조심성과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일까? 혹은 아마도 나 또한 중년이 되어서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일지도.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엔 이들의 노력이 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기존 세대도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번 까미노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발견. 바로 까미노에서 든든하고 성숙한 동료가 되어주고 있는 중년 남성들의 재발견이다.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즐겁다. 마치 나의 세계가 점점 확장되는 것 같다. 낯섦과 거리 두기식 재발견의 연속인 '여행'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내일은 메그와 소은, 이반과 Y까지 모두 함께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예약했다. 한국 라면과 비빔밥이 나오는데 모두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해서 5명 숙박을 예약해 두었다. 한국 라면을 좋아하는 일본 친구들은 벌써 신이 났다. 이반의 까다로운 입맛에 한국 음식은 어떨까? 소은은 언제나 한국 음식이 그리웠고, 나는 소주가 있다는 말에 조금 솔깃해졌다.


참, 오늘 까미노에서 처음으로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작은 물집이 잡혔다. 원래 걸어도 물집이 잘 안 생기는 편인데 어쩌다 생기면 늘 생기던 그 발가락이 아니라 엉뚱하게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왜일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Bonus!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알베르게 : Albergue Hornillos Meeting P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