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과 김밥 그리고 소주

Hornillos Del Camino - Castrojeriz

by OHz 오즈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 까스뜨로헤리스


메세타를 걸어본 적 있나요?

까미노 이후 장갑이 없이는 손이 시릴 정도의 추위는 처음이었다. 날이 흐리고 추우니 라면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오늘은 도착 마을에서 한국 라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나는 건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라면 생각에 눈빛을 반짝이며 씩씩하게 걷는 까미노 친구들이 앞뒤로 함께 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메세타 구간이 펼쳐진다. 생장에서 부르고스까지가 신체적 한계를 각자 가늠해 보고 순례자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적응기였다면 이제부터 레온까지는 메세타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침묵의 길 메세타 구간.

등지고 걷던 태양은 점점 내 앞으로 기울고 말없이 땅만 보며 걸음을 옮기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곳. 이런 지형은 호불호가 있어서 어떤 이는 지루하다 느끼고 어떤 이는 최애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후자가 되겠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을 가다 보면 생각조차 사라지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걷는다고 늘 무념무상이 되는 건 아니다. 걷는다고 마음이 비워지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인데 한번 빠져들면 그 일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나에게 온다. 이런 숨을 곳 하나 없는 평원을 걷다 보면 특히 그랬다.


그렇게 생각의 타임 루프(Time Loop) 속에 있다 보면 걷다가 눈물도 나고 욕도 막 나온다. 그리운 사람은 더 그립고 사랑은 더 절절해진다. 미운 사람은 더 밉고 용서 못 할 자는 더 용서 못 하게 된다. 그래도 그 상황과 내 감정이 더 명확해지는 명쾌함은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들은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 영화 속 타임 루프처럼 그때로 돌아가도 그걸 피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차라리 개운해진다.


메세타는 길과 지평선, 들판 정도의 단순한 풍경이 전부이다. 비슷한 풍경의 길을 장시간 걷다 보면 내 안으로 표류하는 것들과 자꾸만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감정적으로는 외로움이고, 슬픔이고, 불확실성이고, 무력함이며, 후회이고, 두려움이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언제나 정반대의 것들과 함께다. 모든 감정을 내 안에서 깨닫고 발견하는 순간 그 반대의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다.


생각이 많다는 건 자주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는 건 더 괴로울 뿐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으로 생각에서 자유롭기 위해 나는 그냥 끝까지 생각해 버리곤 했다. 괴롭긴 해도 명쾌함이 생겼고 때로 그 생각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 범주로 떠나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멍 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생각이고 명상이고 나발이고 다 모르겠고 걷는 것만 겨우 할 수 있을 만큼 지치고 힘들 때도 많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어느 순간 해방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것은 메세타가 나에게 준 선물 같았다. 지겹도록 충분하게 스스로 정직한 시간을 우리는 언제 가져본 적이나 있었던가? 세상과 모든 것의 근원인 '나'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낄 정도로 걸어본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오늘 메세타의 끝에는 13~14세기에 지어진 산 안똔 수녀원 유적지(Ruinas del Convento de San Antón)가 있었다. 얼핏 보면 폐허 같기도 한 곳. 성벽이 꽤 훼손되어 있지만 규모만큼은 크고 오래되어 보였다. 아마 유적지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알베르게도 운영하는 듯했다.

중세 시대에 "산 안똔의 불"이라는 병이 순례자들에게 유행했는데, 이 수녀원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순례자들을 돌보고 치료했다고 한다.


까미노를 걸으며 가끔 이렇게 유적지의 흔적이 방치되거나 날 것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믿어지지 않는다. 중세미술 그림 속에서만 보아오던 건물의 현장에 내가 서 있다니. 심지어 그것을 만지고 있다니. 도무지 비현실적이어서 차라리 두 눈을 감았다. 그때의 풍경을 조금 더 상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나 사건이 있었고 죽음과 친절과 삶들이 있었다.


좀 더 둘러보고 싶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까스뜨로헤리스에 도착한다.


메세타가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복붙(복사 + 붙여 넣기) 한 것 같이 같은 풍경만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저기 멀리 중세 시대 영화에나 나올법한 마을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생각의 메타버스에서 열일하던 자아들은 모두 흩어져 버리고. 막연한 기대감과 오늘은 뭘 먹지? 하는 단순한 생각만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 마을을 보며 걷다 보면 내가 가는 게 아니라 마치 마을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나는 숨 막히도록 좋다.





귀여운 KM 씨와 그의 딸

숙소 가는 길에 성당이 있어서 들렀다가 갔는데도 아직 체크인 시간 전이다. 알베르게 앞에는 메그와 몇 명의 순례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마을 산책할 때 얼핏 얼굴만 서로 봤던 한국인 모녀가 그들 중에 있다. 울산에서 왔다는 엄마와 딸. 딸은 이미 10년 전에 까미노에 온 적이 있고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한다.


"우리 딸도 나랑 같이 안 왔으면 여기서 친구들 사귀고 그럴 텐데. 아쉽지 않나?"

엄마는 조금 미안한 듯 말했다.

"에이, 나는 한번 와봤잖아. 그때 친구들 많이 만나봐서 괜찮다."

딸은 무심히 엄마의 마음을 살핀다.


"와 10년 전이면 오래전이네요. 그때는 어땠어요? 많이 변했어요?"

"네 사람도 많아진 거 같고, 길도 훨씬 좋아졌어요. 알베르게 시설도 안 좋았는데 이번에 와서 깜짝 놀랐어요. 너무 깨끗하고 편해서요."

"그래, 따듯한 물도 막 안 나오고 그랬다던데, 맞나?"

"어. 그런 곳도 있었지. 길도 걷기 훨씬 힘든 길이었다."


통성명하고 난 뒤 어머님께

"이름을 잊어버릴지도 모르니 제가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하고 물으니

"아이고 선생님은 무슨요."

라며 부끄러워하신다.

"선생님 부담스러우시면.. 그럼, 앞으로 이름 불러드릴게요. KM 씨~."

이름을 불러드리니 소녀처럼 한참을 웃으셨다. 아마 싫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이 귀엽고도 귀여운 울산 엄마 KM 씨와 그녀의 딸 EB가 왜인지 살갑고 좋았다.




라면과 김밥 그리고 소주

예고한 대로 오늘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왔다. 체크인하는데 친구들이 워낙 한국 음식에 대한 기대가 커서 도착했을 때 이미 흥분 상태였다. 더군다나 까미노위에 한국인 (여)사장님이라니 왠지 특별하게 느껴져 무차별 질문으로 다소 사장님을 정신없게 해 드렸다. 나는 한국어로, 일본인 Y는 영어로, 이반은 스페인어로 질문하는 바람에 사장님은 3개 국어(한국어, 영어, 스페인어)를 섞어서 하시다가 결국 영어로 통일하셨다.

나는 눈치가 보여 머쓱히 웃으며 뒤에 서 있었다.


곧이어 정신을 차리신 사장님이 일사천리 능숙하게 체크인 진행을 해주셨다. 한 호흡으로 얼른 끝내시려는 의지가 엿보였는데 미안하게도 일본인 Y가 중간에 말을 걸었다. 그것도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Y입니다. 이름이 뭐예요?"


순간 사장님의 눈빛이 흔들. 하지만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인싸 중에 인싸 아이스 브레이커의 왕 Y의 매력은 정말 대단했다.

훅 들어온 질문에 사장님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계획에 없던 통성명을 하게 된 것이다.


저희에게 잘해주셔서 고마웠어요. 까미노에서 알베르게를 운영하시다니! 정말 멋지고 대단해요!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되는 까미노 위의 삶. 특히나 같은 한국인이 그 꿈을 실현한 것이라서 더욱 공감과 응원의 마음이 들었다.


점심으로 라면과 김밥을 먹을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속성으로 해치워 버린 샤워와 빨래. 1시 땡 점심 주문이 시작되자마자 테이블에 착석, 친구들과 라면과 김밥과 소주를 시켜 나눠 먹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뜨거운 라면은 우리를 사르르 녹이고 소주는 한 개도 안 쓰고 달달하기만 하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우리는 15분 거리에 있는 마켓을 산책 겸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과 달리 해를 바라보며 걷는 것은 매우 힘들다. 스페인의 강렬한 해를 실감하며 마트에 도착, 일요일인 내일 식량까지 간단히 구입했다. 달달한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평화롭고 행복한 오후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비빔밥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저녁 식사로 나오는 비빔밥이다. 시간이 되자 다른 알베르게에 묵는 순례자들까지 비빔밥을 먹으러 찾아왔다. 식당 문이 열리길 마당에서 기다리는데 미국에서 온 한국계 미국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런데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갑자기 6.25 때 서울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잠시 듣다가 아마도 이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르겠다 싶어서 눈치껏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왔다.

선생님 제가 배가 고파서 그만.. 쿨룩..


연세가 있으신 분들도 까미노에 많이 오신다. 까미노는 대단한 체력과 의지의 사람들이 걷는 길이 아니다. 보통의 체력과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땡땡땡!

드디어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향기로운 된장국과 비빔밥이 테이블 가득 세팅되어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Y가 참기름을 넣어야 한다며 추가 요청을 했다. 조금만 덜어서 나올 줄 알았는데 주방에서 참기름 한 통을 그냥 가지고 나온 직원. 하하. 덕분에 그 참기름병은 모든 테이블을 다 돌았다. 스페인에서 구하기 어렵고 비쌀 텐데.. 우리가 다 해치우는 건 아닌지 나 혼자 조금 땀이 났다. 다행히 참기름 통이 비지는 않았다.

휴..


각종 야채에 따듯한 흰쌀밥,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쓱쓱 비벼 먹으니 한 그릇이 금방 비워졌다. 이 매운맛 정말 오랜만이네! 생각보다 와인과도 마리아주가 좋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이렇게 만족할 만한 음식이라니. 흐뭇했다.


아직 식당에서 와인을 즐기는 친구들을 남겨두고 혼자 슬그머니 일어선다. 혹시 소화가 안 될까 봐 마당에서 스트레칭도 하고 숙소 주변을 가볍게 돌아보다가 방에 들어왔다. 해가 지려고 한다. 아직 아무도 방에 없는 걸 보니 와인 파티가 한창이로구나.


개와 늑대의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혼자 어슬렁거리며 하늘을 본다든지, 컴컴해질 때까지 방안에 가만히 있는다든지 하는 게 좋다.

저 멀리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좋다. 그들과 적당한 거리에서 홀로 적막함을 숨 쉬는 이 순간이 좋다.





Bonus!

-알베르게 : Albergue Orió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