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너에게

Castrojeriz - Frómista

by OHz 오즈

까스뜨로헤리스 - 프로미스타



아침에 주로 저기압인 편이라 여유 있게 준비하고 싶은 마음에 남들보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는 걸 선호한다. 그런데 내가 일찍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메그도 일찍 일어나고 꼭 나보다 한 발짝 먼저 준비를 하는 바람에 나도 늘 서두르게 된다. 첨엔 참 부지런하고 손이 빠른 사람이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메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 우리의 아침은 늘 얼마나 바빴던지.


아침의 찬 기운을 피해 오늘은 느지막이 나가자고 메그와 약속했지만, 부지런히 출발하는 사람들을 보니 또 마음이 서둘러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결국 아침 7시 조금 넘은 시간(평소보다 늦은 시간이기는 하다)에 길을 나섰다.


까스뜨로헤리스는 크다기보다 긴 마을이었는데 그 길을 따라 총총 걸으니 생각보다 마을의 다양한 풍경이 펼쳐졌다. 늘 어두울 때 마을을 빠져나가서 동이 틀 무렵엔 산길이나 밭길을 걷다가 오늘은 해가 뜨기 직전의 텅 빈 마을을 걸으니 새롭다. 꾸밈없는 마을의 숨겨진 모습을 만난 것 같은 신비로움이 동행하는 느낌이랄까. 푸른빛으로 변해가는 하늘 아래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기지개를 켜는 마을의 모습은 마치 살아 숨 쉬고 움직일 것만 같았다.




마을을 빠져나와 30분쯤 걸으면 해발 940m의 모스떼라레스 언덕이 보인다. 높진 않아도 꽤 넓어서 급한 경사보다 꾸준한 오르막길이 예상되었다. 오르기 전 뒤를 돌아보니 하늘에 온통 비행운이 떠 있다. 비행운이 겹쳐 있는 곳에서 해가 뜨려고 한다.


언덕 중간에 친구들이 멈춰 서 있었다. 말간 얼굴의 시선은 모두 한 곳을 향해있었다. 나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돌아본다. 붉은 해가 뜨고 있다. 우리는 말없이 저 수많은 나무와 풀과 다르지 않게 서서 해를 바라본다. 이 순간만큼은 해를 향한 경건한 마음이 저들 나무와 다르지 않기를.


찬 바람이 불어 해를 보는 눈에 자꾸만 눈물이 맺혔다. 핸드폰으로 여러 번 찍어도 눈앞의 장면을 고스란히 담지는 못해 그냥 이 순간을 가만히 바라보기로 했다. 지금 여기 바람의 감촉, 냄새, 소리, 공기, 하늘의 모습 그리고 해를 담은 너의 얼굴을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 풍경 위로 흐릿하게 겹쳐졌던 내 사사로운 감정들을 이 길이 끝난 후에도 떠올릴 수 있을까?


언덕을 오르는 길 내내 사람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영광스럽고 거룩했던 자신의 어떤 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꾸만 멈춰서 아쉽게 돌아다본다.






나를 닮은 너에게

언덕을 내려가 다시 메세타를 1시간 정도 걸으면 오늘 첫 번째 마을 이떼로 델 까스띠요(Itero del Castillo)에 다다른다. 이 마을의 성당과 다리를 지나면 부르고스에서 발렌시아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쉴 곳은 없어서 2km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 20~30분을 더 걷는다.

출발한 지 3시간여 만에 도착한 발렌시아의 첫 마을 이떼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에서 메그와 만나 간단한 아침과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길.

어느새 나의 옆에서 발을 맞추며 걷는 친구 Y가 있다. 걸을 때도 쉴 때도 항상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Y는 메세타 구간이 지루하다고 했다. 지난번 부르고스에서 진지한 대화를 나눈 이후로 우리는 더 친해져 있었다. 유난히 외로움을 타고 친구를 좋아하는 Y가 나는 마음이 쓰였다.


"친구란 정말 좋은 거야. 나한테 친구는 전부야. 친구를 위해서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너도 그렇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Y의 말에 나는 잠시 주춤하다가 대답했다.


"아니. 나는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나에게는 친구가 전부가 아니야."


뜻밖의 대답에 그는 당황하는 듯했다.


"왜? 그게 무슨 말이야? 누구나 친구가 필요하지 않아?"


"물론 우리가 혼자서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 친구가 전부는 아니야. 나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Y는 여전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음.. 나도 너처럼 친구가 전부인 적이 있었어. 그땐 모두가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거 같아. 근데 시간이 흐르니 모든 친구가 내 옆에 남는 건 아니더라고. 생각보다 쉽게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고 친구라는 것도 그렇더라고. 우리는 친구 관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몰라."


정말이다. 나에게도 수많은 친구를 거느리며 쿨하고 괜찮은 적당한 우정과 의리를 즐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친구라고 누구나 우정을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라고 다 내 마음 같지 않다. 친구 사이에도 질투가 있고 서열이 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절절매고 이를 이용하는 관계도 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상처를 먼저 줘버리는 그런 게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며 보낸 시간들이 나중에 돌아보니 가여웠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나를 더 사랑해 주었다면.


얼마 전 부르고스에서 만난 미국인 테리를 떠올리며 메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친구는 만드는 것(make)이 아니고 그냥 되는 거(be) 같다고. 메그와 나는 그런 점에서 정말 잘 통한다.


"그럼 너는 친구가 아니라 뭐가 중요해? 가족?" Y가 다시 묻는다.

"아니. 가족도 친구도 중요하지만..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해."


나의 말이 조금 이기적으로 들렸을까?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Y의 표정을 보며 나는 방긋 웃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 무엇보다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다.

나는 Y가 꼭 나 같았던 거 같다.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가엽고 자꾸만 마음이 쓰였던 것 같다.


내 영혼이 충만하기를 바라.

그래서 내 주변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이런 생각들을 나는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Y가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기를 바랐다.


해가 완전히 뜨면 이제 묵묵히 각자 걷는 시간이다. 점점 뜨거워질 것이기에 더 늦지 않게 걸음에 집중한다.





출발이 늦었던 만큼 늦게 도착한 프로미스타의 공립 알베르게. 오랜만에 공립 알베르게로 왔으니 그리운 얼굴들을 볼 수 있을까?


유난히 해와 바람이 좋다. 딱 맥주가 땡기는 날이다. 또다시 마주친 울산 모녀가 바로 옆 식당의 깔리마리(오징어튀김)가 맛있다고 힌트를 주었다. 어휴 그러니 맥주가 더 생각나잖아!

씻고 나와 바로 옆 식당으로 향했지만 아쉽게도 점심시간이 지나 요리는 안 된다고. 어쩔 수 없이 메그와 맥주만 시켜 홀짝거리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나헤라 새벽길을 함께 걸었던 그렉과 첫날 론센스바예스에서 만났던 올리. 내가 정말 좋아하는 까미노 친구들인데 어느덧 그 둘도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렉이 마시는 상그리아가 맛있어 보여서 나도 두 번째는 상그리아로 주문했다.

와.. 이 맛은 천국인가?!

25km를 걸어와 샤워와 빨래를 마무리한 후, 그늘진 야외 테라스에서 마시는 시원하고 달달한 상그리아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점심 먹으러 갔던 소은과 이반, Y도 어느새 테이블로다가온다. 또다시 작은 원이 된 우리들. 수다스럽지 않은 우리들. 솔솔 부는 바람을 느끼며 각자의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우리는 늘어지는 오후를 보냈다.


내일은 여기 프로미스타에서 19km 떨어진 마을(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까지 걷는 순례자와 그다음 마을까지 걷는 순례자로 나뉜다. 19km면 적게 걷는 편이라 다음 마을까지 가는 경우가 보통인데 이번엔 좀 다르다. 그다음 마을이 무려 16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총 36km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리하고 싶지 않았지만, 메그와 올리는 36km를 걸어보고 싶다고 한다. 메그는 언제나 기운이 넘쳤기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라도 내 한계를 느껴 보고 싶을 것 같다.


메그와 함께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잠시 헤어지기로 했다. 친구들은 메그가 무리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걱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처럼 잘 걸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했지만, 각자의 속도대로 잘 걸어왔다. 나도 그녀도 뭐든 혼자 하는 걸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언제든 만났다가 헤어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만날 날은 기약해 본다. 3일 후쯤 같은 마을에서 만나기로.


저녁을 먹고 메그와 마을 산책을 하는데 나는 석양이 보고 싶었다.


"석양이 보고 싶어."

"그래? 그럼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가 보자."


해가 지는 곳을 따라 걷다 보니 프로미스타의 평범한 일요일 저녁 풍경을 골목골목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오늘처럼 해가 뜨고 지는 걸 온전히 보게 되는 하루는 흔치 않다.

해는 차갑던 도시를 깨우고 나무와 풀과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했다.

해는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도 잊지 않고 마을 골목의 후미진 곳에, 자전거 타고 집으로 가는 어린이의 얼굴 위에, 이웃의 안부를 묻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굽은 등을 따듯하게 쓰다듬으며 저물어 간다.


마을을 끝나는 길에서 우리는 멈추고 석양을 보다가 되돌아왔다.





Bonus!

- 알베르게 : Albergue Municipal Frómis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