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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다페스트의 첫 봄

봄이 최고라고 했다.

2월 말에 입국한 우리 가족에게 큰 위로이자 격려의 말이 되었던  그 말.

부다페스트의 봄은 정말 아름답다는 말이었다.

3월의 설렘과 낯섦, 그래서 약간의 고단함과 신남의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게 될 찐 봄에 대한 기대가 커져갔다. 반면 남편이 급속도로 피로를 느꼈고 콩깍지가 벗어지는 연애단계처럼 우리생활에도 여러 실제적인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일단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아팠다. 외국생활에서 제일 아쉬운게 '병원'이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정말이지 찬양받을만 하기에 아이들이 열이나고 이때쯤 시작된 치통(나중에 알고보니 치통은 아니었지만)이 아무리 심해져도 병원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과 나의 다툼도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나름 주체적인 가장노릇을 톡톡히 해오던(경제적, 정신적)으로 내가 물한병을 주문하는 일부터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ATM기계에서 돈을 뽑는 것조차 손을 떨어야 할만큼 수동적인 생활을 해야했는데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징징거림의 정도가 심해지는 날이면 남편도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모진말도 한두번 하며 지친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도 봄은 봄.

두터운 외투를 벗자 남편은 날마다 새로운 힘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야할 길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임을 알았지만 올라탄 말에서 내리기에는 늦었다는 걸 눈치라도 챈 듯이 ...아이들 나름대로 어색하지만 버라이어티 한 헝가리 유치원 생활에 적응해갔고 나는 인텐시브 한 어학원에 재미를 붙여갔다. 

남편은 6개월간의 '자유 중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나의 파트너가 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잠시 그때를 생각하려고 눈을 감아보니 그 따뜻한 봄 햇살과 어느 날의 충만한 행복감이 떠오른다. 몇 년간 아이 둘을 키우고 독박 육아에 최선을 다하고 마지막 몇 개월간은 남편도 없이 동분서주 뛰어다니며 눈물 훔친 나였기에 아침부터 남편이  내 뒤에서 내가 해야 할 말을 다 해주고 내가 들어야 할 짐을 들어주고 대낮에도 같이 밥을 먹고 아이들을 데리러 같이 가는  그 일상. 어떤 날은 한 시간쯤 좁디좁은 침대에 같이 나란히 누워있기도 했다. "세상에... 우리에게 이런 여유가 있을 줄이야. 결혼생활 10년 만에 처음인 것 같네. 믿기지가 않아" 그런 일상이 하루뿐만이 아니었던. 2017년 봄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런 나른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도 아프기 시작했다. 충치 때문인 줄 알고 한국에서 마지막에 치료받은 치과에 전화도 해보고 온갖 마사지를 해봐도 제자리. 턱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은 어깨와 귀로 번졌고 편두통으로 이어졌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두 달 가까이 계속된 통증에 결국 가져온 진통제를 다 먹고 말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통증의 이름은 '삼차신경통' 5년 차 외국생활 중인 지금도 간혹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나른한 행복감 아래에는 불안감과 또 다른 나만의 스트레스가 도사리고 있었고 결국 몸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우리 네 식구는 봄의 입구에서 두 팔 가득 벌려 봄을 안았다.

해가 길어지니 아이들이 하원하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남는 날이 많아졌다. 사실 아이들이 너무 슬퍼해서 일찍 데리고 와서 위로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럴때면 뭐든 해보기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교통권으로  두나 강을 가로지르는 배를 타기도 했었다.  반짝이는 국회의사당 건물을 공짜 배에서 보자니 뭐가 된 냥 어깨가 솟아오른다. 부다페스트에 관광을 오면 모두 먹어본다는 장미 아이스크림도 먹어보고 뉴욕 카페에도 구경도 가보았다.


한국에 없는 건 뭐든 더 재밌다. 헝가리의 봄은 축제의 계절. 모든 공원에서는 매 주말 흥미로운 축제가 계속된다. 봄 축제를 처음 접한 우리는 눈이 휘둥그래. 사실 우리가 입국 후 4년 동안 헝가리와 부다페스트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져서 지금과는 또 많이 다르기는 한데 그때는 축제에서 체험코너에서도 공짜로 아주 내실 있게 해 볼 수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것도 정말 다양하고 많았다. 말이 유창하지 않아서 어려웠지만 눈치코치로, 그리고 6개월 말 선배인 아빠 가랑이에 매달려 아빠의 더듬더듬하는 헝가리 말이 세상 유창하게 들리면서 뭐든 다 이뤄줄 것 같았기에 엄청 용감하게 뭐든 해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남편은 대학시절부터 미국 유학은 일부러도 생각을 안 했다. 나에게는 그 방향은 묘한 반항감으로 느껴졌었는데 왜냐하면 언니와 큰오빠가 미국 유학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둘 다 성공적인 유학생활을 마쳤고 그 시절 미국 여행에 가서 이것저것 신문물? 경험해본 나로서는 이유 없이 '미국은 아니다'라고 우겨대는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무조건 '유럽'을 주장하던 남편은 독일도 영국도 기웃거리다가 결국 헝가리라는 중부 유럽으로 오게 되었는데 6개월 동안 '자유 중년'이 경험한 헝가리는 남편의 취향에 아주 딱이었던 게 틀림없다.  일단 4년 전 헝가리는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꼭 10년 전쯤 한국 같았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 다시 적자면 긍정적인 면에서 말이다.

뭔가 덜 계산적인 느낌, 아직은 돈이 전부가 아닌 느낌, 뭔가 덜 빨라도 되는 느낌적 느낌.

예를 들어 줄을 길게 서 있다가도 아이나 어른이 있으면 줄 가운데 자연스럽게 끼워주는 이유 있는 새치기가 미소를 자아내는 문화가 남아있었다.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백화점 문은 당연히 아저씨들이 열어주는 것이고 버스나 트램에서의 양보는 안 하면 욕먹을 짓이었다. 시간이나 돈이 제한적이라는 경쟁적으로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바쁨'에서 허덕이다 마주한 이곳의 '속도'는 신선함을 넘어 고마울 지경이었으니... 남편은 자신의 이 선택을 몇 차례고 옳았다고 증명하며 행복해했다. (미국도 그럴텐데 여전히 아닐거라고 우기는 건. 안가봐서 그런거임) 이러한 면은 역시나 다른 면에서 볼 때는 답답함과 상식의 범주를 넘어설 때가 있어 지금 다시 돌아보면 꼭 좋다고는 할 수는 없는 부분도 많지만  한국과 다른 면이 다 재미있었던 우리에게는 꽤 괜찮은 느낌이었다.

놀이터도 별거 없어도 이렇게 '힙'할 수가 없고, 모래놀이와 오름 직한 나무가 최고의 놀잇감이 될 수 있다는 건 나와 남편을 위한 것 같았다.(애들 말고 ㅎㅎ)

뭐든 해봐야지 내 것이 된다는 지나친 적극성으로 어느 날의 미션은 공용자전거!

한국은 '따릉이' 였던가.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용자전거 이름은 '부비' ㅎㅎ

이거 빌려본다고 체크카드 앱에 등록하고 난리 법석을 떨어서 두대를 빌렸는데 이게 또 웃긴 게 24시간 정액권을 초과금액 없이 타려면  30분이내에 자전거 정거장에 도킹?을 해야 하는 약간 이해되지 않는 시스템을 하고 있어서 여유 있게 뭐 사진 찍고 그런 거는 상상도 못 하고  학원 앞에서 빌려서 일단 달려! 무사히 도착했음 된 걸로 하자! 했었던 기억이 난다.  4년이 지난 요새는 공용 싱싱 카가  부다페스트 시내를 싱싱 다닌다. 막상 돌아다니다 보면 자전거보다는 싱싱 카를 더 많이 타는 것 같은데 싱싱 카는 생각보다 많이 비싸기도 하고 교통사고의 원인으로 문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딴 길로 빠진 얘기지만 요새 우리 가족은 부비도 아니고 싱싱 카도 아닌 공유차(리모)를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다.(한국에서도 '쏘카'를 이용해본 유저로서 볼때 헝가리 공유차는 매우 합리적이고 사용하기도 편하다.)

4월에는 꽃이 핀다. 말했다시피 축제가 열리고 헝가리의 가장 중요한 명절과 다름없는 부활절이 있는 달이다. 부활절이 되면 슈퍼에서부터 꽃가게, 장식품 가게에 달걀과 관련된 상품들이 줄을 잇는다. 사실 첫해에는 부활절이 유럽 인근 국가에 얼마나 큰 행사인지 잘 몰랐다. 유럽에는 일반적으로 전통 명절이 없는 이유로 부활절과 성탄절이 가장 큰 명절이며 행사일이었고 그날 전후로  작고 큰 기념일도 많고 행사도 많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저 기독교와 관련된 행사일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학원에서도 선생님이 양파로  예쁘게 달걀 물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일주일이 넘는 부활절 방학에 놀러 간 근교 도시(센첸드레)에서 우리는 전통행사를 구경하는 행운도 얻었었다. (봄을 알리는 행사: 남자들이 여자에게 물을 뿌린다: 꽃에 물을 주는 의미라고 했다:학교에서는 간단히 향수병에 물을 담아 여자 친구들에게 좋은 향이 나는 물을 뿌리는 방법으로 한다.)

나의 헝가리어반 수업은 매일매일 다이내믹하고 인텐시브 하게 진행되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숙제가 나왔고 그걸 성실히 하려면 하루에 최소 한 시간 이상은 책상에 앉아있어야 했다. 6개월 선배님 되시는 남편 덕분에 공란 없이 숙제를 잘해서 반의 모범생 언니가 되었으니 망정이지 그냥 달려들었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학습량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시험의 강한 민족이 아니던가? 말은 한마디 못해도 쪽지시험만 보면 반에서 1등. 한국교육의 우월성을 뽐냈다. 진짜 6개월후에 최종 시험에서도 종이시험은 내가 최고득점이었다. (ㅋㅋ)여기서 꼭 기억하고 싶은 우리 담임선생님 되시는 칠라! 그녀의 수업을 들으며 나는 나의 10년의 교수법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해야만 했다.(미안하다. 나의 학생들아.) 꼼꼼히 준비하는 수업 부교재와 학습지로 수업 외 복습이 없어도 학습이 되는 기적을 경험한 두 번째 달 4월에는 매일 타는 트램과 버스에서"꿰백꽤죠 메갈로 ~~~~"라고 하는 말도 갑자기 들리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하고 마트에서 "돼지고기 1킬로 그램 주세요"도 온갖 손짓 발짓 눈짓까지 섞기는 했지만 주문이 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반에서 나는 아주 많이 어른이었는데 그래도 나를 왕따 시키지 않은 나의 어린 친구들과 세상 천사 같은 칠라 덕분에 나의 첫 학기는 매일매일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칠라 선생님은 흥미로운 행사나 좋은 공연 , 장소 등도 꼼꼼히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뭐든지 내가 해보기'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게는 좋은 안내자가 되어주었다.

어느 주말인가 헝가리 전통춤 엑스포가 열린다길래 학원 친구 중 나랑 나이 차이 제일 적게 나는 제시카와 가서 발바닥에 땀나게 춤도 추고 아이들은 전통인형도 만들고 왔다. 생각해보니 그곳에 있던 헝가리 사람도 우리가 참 신기했겠다 싶긴 하다. 헝가리 전통춤 엑스포에 나타난 한국인 가족 4인. 그것도 열심히 돌아다니며 클래스도 참여하고 체험코너도 빠짐없이 땀 흘리며 참여하는 모습에 눈빛으로 이쁨 받고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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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달이 되니 학원 친구들이 제법 친해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파튀파튀. 이들의 파티문화를 알 리 없는 노땅은 여기서는 참 비싼 음식 김밥을 싸서 파티마다 열심히 따라다녔다. '초대해줘서 고맙다 '는 마음으로 ㅎㅎ

늘 김밥은 최고 인기 식품이었고 그 후로 열리는 모든 파티에는 나는 꼭 초대되었었다. 어떤 애는 나보고 초밥도 만들어달라고 하기도 했는데 아쉽지만 내가 그때는 그정도의 짬밥이 안되서 그 부탁은 들어주지 못했다. 지금은 연어초밥정도는 뚝딱 해내는 집밥여왕이 되었다는 점을 덧붙이며  여하튼 이들의 파티는 진짜 별거 없었다. 저렇게 소박히 음식을 올려놓고 술만 잔뜩 먹고 이야기를 밤새. 오른쪽 파트너와 이야기했다가 왼쪽 파트너와 이야기했다가...

이 녀석들. 한국의 잔칫상을 받아봤어야 이 아줌마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을 거야... 쩝.

나는 술을 많이 마실 수 없기에  맛있는 음식 선물하고 한국문화와 음악들 소개하고 내가 할일만 딱 하고 항상 제일 먼저 자리를 빠져나오곤 했는데 그 다음 날 학원에 가면.. 누구랑 누구는 원나잇을 하기도 하고 ㅋㅋ (역시 젊음이 좋구나...) 그렇게 참여했던 여러 번의 파티를 통해 이 나라 저 나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왜 그들이 헝가리를 선택하고 헝가리어를 배우는지를 듣는 것. 그리고 이 친구들에게 생뚱맞게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친구들이 있기도 하고 그들과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는 는 조금은 어색하지만 조금은 부럽기도 한 문화를 배울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세대차이가 극복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느낀 건...'역시 공부는 젊어서 하는 거구나''지금은 그게 다 인 것 같지? 좀만 지나 봐라'였다. 여기서 한마디 내뱉으면 나도 꼰대가 되겠구나 싶었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헝어로도 영어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안되니... 다행인 걸로.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것

어느 날은 마트에 갔더니 사람들이 저 두 수첩을 들고 각자 너무 바쁘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제일 친절해 보이는 헝가리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일단 왼쪽 것은 우리 동네 가장 가까운 백화점의 한 달의 한번 세일데이에 나눠주는 쿠폰북이란다. 한 칸 한 칸 잘라서 각 매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참으로 유용한 녀석. 저 쿠폰을 가지고 지하에 있는 약국에 가면 약국 화장품(한국에서는 꽤나 유명한)들을 20프로 가까이 싼 가격에 살 수 있어서 나도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 오른쪽! 저건 뭐냐. 저건 패션잡지인데 5월 12,13,14일 동안  저  책에 있는 쿠폰을 잘라서 잘만 사용하면 엄청 난 세일가에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저 책 두 개를 같이 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찾은 기분이었다. 물어라. 그러면 누군가는 가르쳐줄 것이다!

남편은 묻고 대답을 얻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나 역시 비슷한 성향이었으므로 저렇게 알게 된 사실을 몇 안 되는 한국 이웃분들께 부지런히 알렸고 남은 쿠폰들을 마구마구 뿌렸다. 저때부터였겠지. 뭐든 알려주고 보람 있어하고... 그런데 이 습관도 좋기만 한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겠으니 미련한 면도 다분하다.  


아. 4월에 나는 처음으로 그 유명한 판도르프 아울렛을 구경 가보았다. 우리는 차가 없었으므로 그런 기회는 나중으로 미뤘었는데 천사 같은 이웃이 동행을 권하셔서 여권 들고 국경 넘기!! 헝가리에 와서 육로로 국경을 넘는 첫 경험이었는데 그게 아웃렛이라니. 나는 쇼핑에 워낙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는 것도 전혀 없는 아줌마로서 그냥 국경 넘기가 궁금해서 따라나섰다가 프라이팬과 남편 운동화를 하나씩 사서 돌아왔다는 첫 판도르프 아울렛의 날. 헝가리 국경에서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막 넘어갔을 때 운전해주셨던 이웃 아저씨가" 길이 다르죠?"라고 물었었다. "그러게요. 어... 뭔가 매끈해진 것 같기도 해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고 했다. 나도 나중에 이나라 저나라 육로로 여행을 다니면서는 확연히 알게 된 사실이긴 한데 헝가리의 왼쪽(서쪽)에 있는 나라들은 확실히 그 국경부터 도로의 질 차이도 느껴질 정도일 때도 있다. 이 사실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나중에도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냥 신기하다 신기하다 하기만 했었던 것 같다.

이즈음 유치원에서 하루건너 하루씩 힘덜었던 딸은 처음으로 친구를 초대했었는데 이름은 밀러. 밀러의 아빠도 영국에서 일을 했다.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고 헝가리로 돌아와 가족들과 시간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비행기로 출근하며 지냈는데 결국 1년 후 밀러네 가족은 영국으로 이사를 갔다. 생각보다 이런 가족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헝가리를 선택했고 어쩌면 여기서 오래 살게 될 지 도 모르는 유학생 가족이다. 한국도 아닌 헝가리. 이곳에 멈추는 것도 참 큰 도전인데 어쩌면 여기를 경유지로 하고 또 다른 세상의 멈춤을 준비해야 하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잠시 잠깐 무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사실. 헝가리에 들어오기 전, 남편과 나의 첫 충돌. 아이들의 학교 문제였다. 나는 빚을 내서라도 한국사람들이 다 다니는 국제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보고 싶었다. (사실 빚을 내서도 불가능한 범위이긴 했다.ㅜㅜ) 근데 남편은 합리화인지 핑계인지 아니면 진짜 확신인지 절대 국제학교를 보낼 마음이 없다고 했고 무조건 공립학교 혹시 사립이라도 헝가리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했다. 돈도 없던 차에 지나 칠 정도로 확고한 그의 주장을 믿고 싶기까지 한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결정하였고 이렇게 4년을 살아온 지금. 남편의 선택에 고마움을 표한다. 하지만 가끔 저 왼쪽? 나라들에 대한 동경이 이 온 나라에서 느껴질 때면 4년 전 그 찰나가 떠오르기도 한다.'빚을 냈어야 했던 건가?''영어학교를 선택해야 했던 걸까'

4월의 푸르른 날이 계속되었다.

세체니 온천(5년 차인 나는 아ㅅ직도 여기에 안 가봤다 ) 옆에 안익태 동상이 있다.

그는 이 나라의 유명한 리스트 음대에서 공부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애국가를 작곡했다고.

내 느낌인 건가 우리나라의 애국가와 헝가리의 애국가는 느낌이 비슷하다.

요새 큰 아이가 학교에서 '힘누스' 이나라 국가 찬송가를 배우고 있어서 집에만 오면 흥얼흥얼 거리는데 곡의 기승전결이나 약간 슬픈 그 느낌적 느낌이 비슷하다고 나는 계속 우기는 가운데 우리 아들의 트럼펫 과외 선생님도 그렇다 해줘서 힘을 얻었다. (다른 나라처럼 행진하지는 않는다고....ㅎㅎ)

헝가리에서의 한국을 찾는 것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말을 배우며 비슷한 문법을 찾고 역사를 배우며 비슷한 정서를 배워갔다. 닮은 듯 다른 두나라에서 틀린 그림 찾기를 하며 헝가리의 이방인. 그러나 '하루를 살아도 이들같이'살고 자 했던 우리는 빠른 속도로 적응해 나가던 그 시절. 한국에서는 탄핵소식이 들려왔다.

남편도 없이 어린 두 녀석 데리고 광화문에서 촛불을 여러번 들었던 나는 그 소식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다. 그리고 생각보다 여기 언론에 한국 소식에 심심치 않게 소개된다. 일단 북한 소식은 아주 재빠르게 나오고 그때 대통령 탄핵소식도 주요뉴스에서 언급되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재외국민투표를 신청해야하는 날을 맞이했다. 처음으로 주헝가리 한국 대사관에 갔다. 잠시 나라를 떠나 외국에 살고 있고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더욱 우리나라가 강성하고 멋진 나라가 되길 응원하게 된다.  이런 게 타국에서의 애국심이로군...


집에서 딱 20분만 걸으면 세계 3대야경을  매일도 볼 수 있는 동네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마음이 울적하고 한국이 그립고 가슴이 쓰라릴 때 네식구 같이 손을 잡고 걷고 걸으며 그저 감사하기로 마음을 달래는 일이 잦았는데 이건 4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하다.  

이렇게 4년이라는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나와 포개다보니 달라진 점도 많지만 여전한 점이 많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때도 작은 일에 감사하기도 했고, 별거 아닌일에 눈물짓기도 했으며 한없이 우울해하다가도 어떤날은 자신감 뿜뿜. 결정적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외롭다는 말을 주기적으로 적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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