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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7. 2월

32시간의 하루

2016년 7월에 남편은 먼저 짐을 쌌다.

2008년 결혼할 때부터 꿈꿨던 유학의 길

독일이냐, 미국이냐, 영국이냐(거의 갈 뻔) 매해 갈팡질팡하던 8년의 숙고를 마치고 그는 7월에 헝가리로 떠났다가, 12월에 잠시 들어와 우리의 출국 준비를 잠시 돕고 연초에 먼저 다시 짐을 잔뜩 싸들고 진짜 떠났다.

그를 따라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나, 그리고 아이 둘, 팔아야 할 집과 차, 정리해야 할 내 직장, 아이들의 어린이집, 학교... 그리고 우리들의 가족과 지인들을 남겨두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떠난 후 남겨진 과업을 정리하는 일은 하루하루가 고비였다. 남편 없이 집 매도계약을 했다. 계약금 받고 그날은 저녁도 못 먹었다. 손이 후들거려서.... 근데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의 애마 하늘색 큐엠이 셀프 중고차 견적을 몇 차례 받고 지인에게 팔기로 결정. 구청에 가서 서류 작성하는 일을 할 때쯤에는 뭔가 원만한가 싶기도 했는데 이사(짐을 옮기는 것)가 아닌 모든 걸 정리(남김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 집에 있는 각종 가구와 전자제품을 중고거래로 하나씩 정리해야 하는 일은 그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직장 휴직 처리하는 일, 아이들 학업을 정지하는 일 역시 그랬다.

2월 18일에 나는 마지막 출근을 했고 21일에 둘째 아이 어린이집 종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필  그날 눈발이 심하게 날리고 날은 너무 추운데 차는 없고 택시도 안 잡혀 8살, 5살 아이 둘을 손을 잡고 고갯길을 오르며 아이들 몰래 눈물을 훔친 기억이 떠오른다.

22일 오후 핸드폰을 정지하고 시어머님을 집에 모셔와서 빈집에서 잠을 청하기 전에 어머님 전화를 빌려 친정아빠 엄마랑 전화를 하며 결국 엉엉 울음을 터트렸던 나.

내 감정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을 버텨내고 있다는 생각에 서럽기도 하고 겁이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23일 아침에는  마지막으로 헌 옷 삼촌에게 세탁기와 헌 옷을 넘기고 1톤 트럭을 빌려 시댁에 보낼 짐과 냉장고 실어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23킬로 일곱 박스(남편도 두 번을 이렇게 갖고 갔었다)를 아주버님 차에 꽉꽉 채우고 짐 무게를 줄일 요량으로 옷을 네 겹씩 입고 마음도 몸도 손도 정말 천 근 만 근 한 마음으로 공항에 갔다. 예상대로 짐을 보내는데 문제가(추가짐 결제하는 부분) 생겨 결국 우린 유일하게 마중 나오신  시어머님과 아주버님과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마지막 탑승객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벗어도 벗어도 끝없는 두 아이와 나의 외투를 벗어 짐칸에 올리고 숨도 돌리기도 전에 덜덜 떨리는 내 두 손에 두 꼬마의 손을 담고 왈칵 솟아날 것 같은 눈물은 눈꺼풀로 꾹 누르고 기도했다. 무사히 도착하게만 해달라고.... 반년 가까이 혼자 독박 육아, 워킹맘, 남은 일 정리를 하며 무사히 ' 그 나라'에 '그 어떤 집'에 도착하여 '우리가 드디어 해냈다'라는 안도감으로 같이 저녁을 먹을 그 시간을 상상하며 버텨온 우리... 를 위해 기도했다.



아이들도 여행이 아닌 이렇게 긴 비행은 처음이었기에 바짝 긴장. 8살 된 (만 6세) 아들은 뭔가 모를 책임감으로 쪽잠도 거부하며 얌전히 내 옆자리를 지켰고 아직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둘째는 밥도 잘 먹고 어찌 저지 첫 10시간의 비행은 잘 마쳤는데 문제는 두 번째 비행이었다. 경유시간이 40분으로 매우 빠듯한 터였다. 승무원에게 먼저 내릴 수 있게 부탁했지만 연착되고 있지 않아 무리 없이 경유가 가능할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으나 나는 불안감으로 다리를 덜덜 떨었다. 연착을 없었지만 나에겐 핸드캐리 트렁크가 세 개와  배낭 세개.. 그리고  두 아이가 있었다. 폴란드에서 유럽 입국 심사는 무사히 지나갔는데 짐이 말썽. 아이들 장난감이 들었있던 트렁크까지 샅샅이 열리고 뒤적거림 당했다. 나는 네 겹의 외투를 벗었다 입는 것도 모자라 신발까지 벗어야 했다. 둘째 아이는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공항 직원 그 누구도 우리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내가 진땀 흘리는 걸 본 뒷 승객이 직원에게 다 장남 감라고 내 대신 한마디를 거들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역시나  두 번째 비행기에서도 우리가 마지막 탑승객이었다.

긴장감에 버티고 버티던 첫째도 두 번째 두 시간의 비행에서는 꿀잠에 빠져들고  둘째는 뭐. 아까 공항에서부터 숙면 상태 유지

나는  고도의 간장감으로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부여잡고 집에서 떠난 지 22시간 만에 두 아이와 함께  '그 나라'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둘째는 등에 업고 큰 애 한 손에 핸드캐리  하나 쥐어주고 가방 매어 주고. 160cm도 안 되는 나는 다른 한 손에 나머지 짐을 다 잡고  공항에 들어와 불편한 컨디션으로 공항이 떠나가라 울어제끼는 둘째를 트렁크 위에 앉혀놓고 아들을 챙기고 나서 보니 수하물 벨트에 김칫국물 터진 우체국 박스를 포함한 나의 짐 일곱 개가 곱게 남아 있었다.

아.... (탄식)

그러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불쌍한 눈빛 탑재하고 가수면 상태인 둘째를 안고 큰애를 끌고 입국장 문으로 다가가서 마중 나온 아빠에게 아이들을 토스하고 나는 다시 수하물 벨트로 와서 카트에 짐 테트리스 시작.

정신없이 공항을 빠져나와 아빠를 만나니 하늘이 컴컴하다. 오후 다섯 시쯤이었던 것 같다. 두 녀석은 다시 잠이 들었고 달리는 우리 차(한인교회 목사님의 차로 도움을 받았다) 옆으로는 세계 3대 야경으로 꼽히는 부다페스트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30분 후쯤 '그 어떤 집'에 도착했고. 오랫동안 상상했던  그 저녁 식사는 밤 8시쯤 이뤄졌다.

아빠가 웰컴으로 끓여둔 미역국과 닭볶음탕으로 배를 채우고 그제야 눈이 밝아진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둘째는 두 번째 비행기부터 쭉 잠이 들었다가 새벽 2시에 일어나 배고프다고 일어나 우리가 남긴 미역국과 닭볶음탕을 먹었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더 먹고 싶었는데 고기가 없었어..."

그렇게 나의 2월 23일은 24시간+8시간(시차)= 32시간을 살아낸 하루였다.

네 식구의 삐딱한 헝가리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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