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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월은 늘 그랬던가

여행 느낌이 사라지면

딱 1주일이 지났다.

남편은 우리가 이곳을 좋아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재미있는 곳을 찾아 아침이면 마음이 쏙 빼앗기게 매일 브리핑해주었다. 그렇게 확신에 찬 전담 가이드의 말을 듣고 따라다니는 길은  파 한단을 사러 장을 보러 갈때마저도 재미있었다. 차도 없고 끌고 다닐 작은 수레도 없었지만 시차적응도 끝나지 않은 두 녀석을 대동하여 겁도 없이 이케아에 가는 것,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한참을 걸어 돌아오는 길도 신이 났다. 그러다가 아빠는 아이들에게 싱싱 카를 두대 사주었다. 데@트론이라고 보급형? 스포츠매장이 있는데 가격도 합리적이고 워낙 다양한 제품이 있어서 구경만 가도 재미있을 그곳에서 한국에서 겨우내 비워내기만 하던 아이들에게 싱싱카 사준다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아들에게는 바퀴가 큰 자전거도 사주었다.(지금 생각해보니 아빠의 대리소비심리가 발동했던 것 같다. 우리가 오기 전에는 뭘 사는게 미안했는데 우리가 오자마자 쇼핑쇼핑!!그러면서 인터넷쇼핑 연습도 해보고 각 마트탐방도 제대로 시작했던 듯)


3월이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현장에 투입되었다. 아이들은 싱싱 카를 매일 타야만 하는 일상을 시작했다.

집에서 500미터쯤 거리에 있는 유치원에(내리막) 등원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전정보도 없었다. 남편이 집을 구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찾아낸 사립유치원이었다. 우리는 아직 비자도 주소카드도 없는 여행자신분이었기에 공립유치원에 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누군가 이야기 해주었던 것 같아 남편도 생각도 안해보고 일단 그 유치원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가 더듬더듬 전화를 해봤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그곳에 찾아갔다.



작은 규모의 그 유치원에는 영어를 할 수 있는 교사가  딱 한 명이었다. 

아이들은 아직도 '멍'함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겁도 없이 첫날부터 한 시간 적응했다.

그냥 뭐든 신나던 때여서 크게 거부감 갖지 않고( 지금 돌이켜보면 요녀석들 몇일 다니다가 싫으면 안다녀도 된다고 생각했을수도 있겠다 싶다. 진짜 여행같은 하루 하루 였기 때문이다.)

다음날부터 다니기로  본인들 입으로 얘기하고 재미있었다고 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남편은 나를 어학원에 등록시켰다. 매일 9시부터 1시까지 수업을 해야 하는 인텐시브 헝가리어 코스에 나를 등록해놓고 (남편은 이미 5개월째 다니고 있던 학원) 선택사항은 없다고 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은 9시 전에 등원해야 했고 나는 트램을 두 번 갈아타고 공원을 가로질러 40분 거리의 학원을 매일 가야 한다고 했다.

헝가리에 도착하고 딱 3주만에 시작된 실전상황

출발은 순조로웠다. 나는 새로운 상황이 재미있었고 늘 그렇듯 위기에 강함을 보였다.

게다가 3월은 늘 그렇듯 고단 한듯하지만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들썩거리는 달이 아니던가.

어학원 담임선생님은 정말 기가 막히게 훌륭했고(지금도 만나고 있는 나의 최고의 선생님) 영어를 한마디 못하시는 두 분의 할머니 선생님마저 좋았다.

일단 나는 영어를 참 못하고 영어를 아주 아주 싫어한다. 사실 남편이 영국으로 유학을 준비할 때 나도 꽤 오랫동안 유명한 학원을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영어가 싫고 영어는 늘 나에게 큰 벽처럼 느껴지는데. 웬걸. 여기 이 학원. 아무도 영어를 안 쓴다. 담임선생님은 영어도 잘하시는 능력자였으나 가능하면 모든 질문에 영어로 대답하지 않으셨다. 어쩔 수 없이 학생들과도 더듬더듬 헝가리어만 써야 했고 이 환경은 나에게 너무나도 적합했다. 숙제도 재미있었고 친구들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친구들은 나보다 평균 10세가 어렸다. ^^;

아침부터 할 일이 있다는 동력은 나를 활기차게 만들었다. 아이들 아침을 챙기고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2시까지는 아이들을 걱정할 새도 없이 내 일에 집중했다. 그 생활패턴은 날 즐겁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순탄할 수많은 없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달리고 있는 그 시간은 꽤나 힘들었던 것이 조금씩 떠오른다. 먼저 아이들 얼마지나지 않아서 부터 많이 힘들어했다. 큰애는 한국에서 1학년을 마치고 다시 유치원에 보내진 것이었다. 덩치는 제일 큰 데  말을 못 했다.  다행히 큰 덩치 때문인지 유일한 동양인이어서(선입견조차 없을만큼 신기한 존재)였는지 아이들은 큰 아이를 대놓고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작년 봄. 3년 전 그때를 기억한 아들이 울먹이며 나에게 말했었다.

" 다시 유치원에 가는 건 사실 아주 별로였어. 말도 못 했고 답답했고... 금방 말을 배우긴 했지만 기분이 아주 별로였어. 제일 큰 반이긴 했지만 낮잠시간도 있었어. 이게 말이 돼? 하늘만 보고 누워있었어. 기분이 아주 별로였다고" 

"다은이는 자꾸 울었고 그때마다 선생님이 나를 찾아서 다은이를 위로해주라고 손짓으로 얘기 했어. 나도 힘든데 다은이도 챙겨야했고 많이 힘들었어"

나는 1시 반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거나 남편과 간단히 점심을 먹으며 중요한 일들을 하고 4시에 아이들을 픽업할 때까지 그냥 아이들을 믿었었다. 사실 매일 아들은 나에게 '괜찮았어'라고 말해줬었다. 오늘은 무슨 말을 알아들었고 자기가 무슨 말도 했다고 자랑을 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 괜찮은 줄 말 알았다. 하지만 그때 짧게 적었던 내 일기를 읽어보니 큰아이도 억울하게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일도 있었고 선생님께 억울하게 혼난 일도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무심한 엄마는 나중에서야 그때 아들이 겪어던 야경증이 말못한 스트레스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찬이는 잠이 들면 정말 알람시계를 켜둔것처럼 정확히 한시간후에 용을 쓰며 일어났다. 어떤 날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갑자기 끙끙거리기도 했다. 심한 날은 문을 열려고 더듬거리기도 했는데 그렇게 무의식적인 행동을 하는 아들을 깨워 다시 품에 안고 재우면 곤한 잠이 빠지곤 했다. 물론 다음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둘째였다. 둘째는 매우 예민한 똘똘이 꼬마 스타일이다.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게 어려워서 큰일 치를뻔한 날 아빠에게 쪽지에 그 문장을 써달라고 꼼꼼하게 부탁하는 다섯살.

이런 둘째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낯선 상황은 쉬울 리 없었다.

자꾸 교실 구석에서 혼자놀기를 선택했다. 거기에서 손을 꼼지락 거리며 아이들의 말을 머릿속에 넣고 또 중얼거렸을 것이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그 성격때문에 더듬거리며 말하는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던 그 작은 몸은 등원 둘째주부터 몸살로 드러내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못된 행동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신발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하고 잠을 자기전에 내 품에서 아무말도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때를 떠올리는 그랬던 딸아이가 안쓰러워 내 눈에도 눈물이 차오른다.

쉬는 날마다 아이의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에 귀기울이고 그 입술이 까르르 웃는 소리를 낼때까지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아이들과 다시 이야기 해봐도 그때의 아이들이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과 느낌은 지워줄수는 없었던 만큼이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더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그만큼이 아니었다 싶다.

 

매일매일 낯선 음식, 모르는 말...

헝가리의 에티켓 중에 우리나라와 다른 하나가 있는데 콧물이 흐를 때 절대로! 코를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설사 공연장이나 도서관에서 코를 소리 나게 풀지언정 절대 코를 들이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알리가 만무한 우리 꼬마들은 찬바람 부는 초3월 코를 훌찌럭 거려 혼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다.

억울했을 것이다. 그 사소한 억울함은 이방인으로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반복적으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을 터인데 사실... 그때가 시작이었고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는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3월 한 달 몇일의 결석과 조퇴를 제외하고는 엄마 아빠의 발맞추어 유치원을 잘 다녀주었다.

< 유치원 첫 소풍 사진이었는데 "여기를 보세요"말을 못 알아들은 두 명의 꼬마. 그리고  바지만큼 중요한 의복인 비니를 생략한 두 꼬마가 관전 포인트>

그 사이 우리는 부다페스트의 봄을 받아들이며 주말이나 휴일에는  여전히 여행자 모드로 즐겁기도 했다.

첫 국가 공휴일인 3월 12일에는 몸이 아픈데도 타이레놀을 먹어가며 무료박물관 투어를 다녀오기도 했다.(공가공휴일에는 국립박물관 미술관이 무료다!)

꼭 필요할 것 같은 가구를 주문하고 배달받았다. 배송 서비스가 별로인 헝가리에서는 뭔가 중요한 걸 배달받을 때는 집에 하루 종일 붙어있어야 해서 나는 이날(지금도 비슷하다.쩝) 처음으로 학원을 빠졌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일단 네명이 함께 있으면 뭐든 재밌었다. 가구를 조립하고 59제곱미터인 우리 집을 아기자기 꾸몄다.

한국에서의 정든 나의 첫 집을 팔고 그 안에 있는 것들도 눈물 머금고 싹 다 정리하고 온 나의 빈 손길이 닿은 이 아담한 집은 참 소중했다.

이 집을 구하느라 남편은 1월 내내 한국에 있는 나와 매일 한 시간 가까이 영상통화를 했었다.

우리는 예산이 정해져 있는 유학생 가족이었고 좋은 동네에 아이들이 함께 살기 좋은 집을 구해야 했기에

남편은 학원을 마치고 메일에 답장을 준 부동산업자를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영상통화로 집을 둘러보고 주변을 둘러보기를 3주 차에 애들 아빠가 지칠 대로 지쳐 이 집을 계약하겠다고 했다. 말도 잘 못하는 남편은 헝가리어로 된 월세계약서에 용감하게 싸인했고 집주인 부부는 그런 우리 남편을 대학생쯤으로 생각했다고 했다.(여기 사람들 아시아인들을 굉장히 젋게 생각한다.)

우리가 처음에 계획한 예산보다 오히려 적은 가격으로 검색해서 처음 나온 이집은 아직은 뭔가 어색해서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있던 우리에게 안성맞춤이었다. 30년이 넘은 이 집에서 3년을 꼬박 살았다.

(나중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같은 건물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오해도 많이 받고 낙후된 집이어서 여러문제로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겨울에 빨래를 못하기도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난 이 집에 참 좋다.)


날씨가 좋은날...그러나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힘들었던 어느날에는  동물원도 가봤다. 뭐. 공기도 좋고 해는 길고 엄마 아빠가 체력되니 이런거하면서 기분 풀자!!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다니는 곳곳. 보이는 건 하나여도 우리는 한국과 다른 모습에 두배의 재미를 느끼며 지냈다.

봄이 되니 축제가 봄을 알리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느닷없이 아이스크림 가게도 열었다. 간식거리가 (우리나라만큼) 다양하지 않은 이곳은 저렇게 아이스크림 한 컵 먹자고 줄을 서야 했다. 이런 것도 신기했지 싫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또 마찬가지로 쓰라리는 경험도 없지 않았다. 어느날은 축제장에 갔다가 둘째가 음료코너 옆에 있는 각설탕을 하나 입에 쏙~넣었는데 가게 주인장에게 어찌나 눈총을 받았는지 ...미안한 마음에 거기에서 수제레몬에이드를 시켰는데 음료용량단위와 돈에 익숙치 않았던 우리는 레모네이드를 소주한컵분량을 비싸게 주고 사본 일도 있었다. 그날 어떤 헝가리 아저씨가 우리 뒤에서 그랬다."그래. 헝가리어가 어렵지.어려워."(그날 애들 아빠는 사전을 찾고 구글을 검색해서 그날의 실수를 복기하며 공부했다.)

어떤날은 큰애가 아빠랑 라이딩을 갔는데 마주오던 아주머니의 실수로 살짝 충돌이 있었던 모양. 근데 아주머니가 눈과 입으로 억세게 뭐라고 이야기를 한통에 민찬이가 크게 주눅이 들어 집에 온적이 있었다. 남편은 그아주머니의 말을 소리나는 대로 기억해서 다음날 학원에가서 선생님께 물었다고 했다. 선생님 말씀은 (하얀거짓말일수도 있지만) 그 아주머니가 민찬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한거라고 하셨다. 

아. 정말 그런건가? 날개를 피려고 애를 써봐도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일들은 늘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나의 아담한 집에서 새로운 식재료로 이것저것 밥을 해 먹는 일상도 아직까지는 재미있었고 윗집 할머니께 허락을 받아 집 바로 뒤에 텃밭도 꾸미는 프로젝트도 시작해보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텃밭은 일조량 때문에 일궈질 수 없는 땅이었는데 무식이 용기였던 우리는 그저 신났었다. 대형마트에서 물(식수는 시켜먹는게 나름의 방법이었다.)과 음식을 배달시켜 받는 일, 처음으로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 일, 헝가리 스타일 아침(빵, 치즈, 버터, 고추. 살라미)을 차려 먹는 일, 한국 과자보다 맛없는 과자에도 유레카를 외치는 일, 아메리카노를 매우 낯설어하는 커피숍에서 라떼를 맛있게 먹는 을 터득하는 일들을 소소히 해내며 두 번째 달을 채워나가던 중

외국생활의 끝판왕! 이민국 방문의 날이 되었다.

여기서 남편의 성격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뭐든 정해진 대로 쉬운 길을 가는걸 일단 거부하고 보는 

청개구리과. 

돈이 좀 들어도 도움을 받아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 꼭 실수가 생기거나 돌고 돌아도 일단 스스로 해보고 싶어 하는... 좋게 보면 주체적이고 나쁘게 보면 쓸데없는 소양을 가졌다. 여기에 나는 반대를 하기는커녕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치켜세워주는 은사를 가졌으니 이건 뭐 말 다했다. 이놈의 성격 때문에 한국에서도 네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한 번도 포장이사를 해본 적이 없고 도배도 셀프. 가구 만들기도 셀프... 중고 거래도 무조건 우리 손으로.... 적으면 쉽지만 하나도 수월한 적 없었던 그런 수많은 일들을 마치고는 늘 그 끝에 우리는 둘이 마주 보고 그랬다.

"아... 역시 비싼 이유가 있었어. 다음엔 꼭 사람(돈) 쓰자!" 

근데... 더 웃긴 건. 다음에도 또 우리가 하고 있었다. 쩝


헝가리에 와서 그 힘들다는 비자를 받는 일. 이민국에 가는 일역 시 그랬다. 굳이 스스로 하겠다는데 뭐 말릴 필요가 있겠는가.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 이민국에 간 날. 아무것도 준비 없이 순진하게 갔다가 정말 생고생의 정점을 찍었다. 아침 10시에 들어간 이민국에서는 우리는 저녁 6시에 나올 수 있었고 그마저도 일을 말끔히 해내지 못하고 일보 후퇴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진짜 온몸으로 고통스러워했다.

하루 종일 쫄쫄 굶으며  딱딱한 의자에서 몸을 비틀던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깜깜한 저녁 6시에 근처 백화점으로 무거운 몸을 끌고 가서 장난감을 하나씩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우리는 그 똑같은 일을 두 번을 더하고서야. 첫 비자를 받았다.(그것도 1년짜리...). 작년 겨울 아들의 성토대회에서  이날의 쓴 기억도 언급되었는데 

"우리가 한국에서 살면 그렇게 힘들게 이민국에서 줄 서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렀다.

서러워도 시간은 간다.


티브이도 없는 집이었지만 아이들과 헝가리 동화와 동요동영상을 보며 헝가리어를 배우는 시간도 뿌듯했고

비 오는 날 달팽이를 보며 소소한 행복에 즐겁고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페이스 페인팅에 놀랍게 재밌고

한 달 동안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한 달 교통시설 이용권이 끝날 무렵에는 한 달을 살아낸 스스로에게 감동받을 정도였다.


둘째의 생일이 3월에 있다.

우리 네 식구가 옹기종기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우리의 3월을 함께 축하했다.

파@바게트같은 보드라운 케잌을 찾을줄 모르는 나는 아이 케잌을 처음으로 손수 구웠는데

베이킹파우더와 이스트를 구분하지 못하여 저렇게 찹쌀파이같은 케잌을 구워냈다.

그러나 보아라. 헝가리식 초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격려했다.

이렇게 아프고 어려웠지만...그럼에도 

참 잘했다. 잘 살아냈다. 이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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