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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ide Jan 03. 2020

입덧 일기

끝나지 않는 입덧지옥 속에서

-.  죽조차 핥아먹으며 겨우 생명 보전하고 살고 있다.


-. 냄새 뿐 아니라 온갖 촉각에도 민감해져서, 이젠 짝꿍과 같은 침대에 눕는 것도 힘들게 느껴졌다. 당분간 따로 잘수 있겠냐는 말에 짝꿍은 기꺼이 내게 안방을 내어주고 본인은 거실에서 자겠다고 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체가 우리 둘다 참 힘들게 한다 그치?ㅠ" 라는 내 말에, "아냐아냐 나 정말 괜찮아" 하고 위로해주는 짝꿍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미안하여, 혼자 눕게 된 2인용 침대에서 한동안 숨죽여 울었다.


-. 먹은것도 없고, 그나마 먹으면 토하고, 토하면서 온몸이 떨릴 정도로 기력을 소모하다보니 씻을 기운은 더더군다나 없다. 하지만 임신 중에는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져서 그런지 평소보다 분비물도 많이 나오고 금새 내 체취가 느껴져서, 샤워를 안 하면 또 너무 괴롭다. 좀비같은 몸을 겨우 이끌고 고양이샤워를 한다. 샤워가 이렇게 체력을 많이 쓰는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 엄마, 아빠, 할머니로부터 종종 안부전화가 오는데 너무 귀찮다. 말할 기운도 없는데 어차피 하는 말이 다 뻔하기 때문이다. 달리 도움되는 말도 없고... 요즘은 핸드폰 진동에도 몸이 따라 진동하여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 끝은 어디일까? 어제 또 수액을 맞았는데, 의사는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이제 점차 나아질거예요"라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을거란 것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걸까? 막막하고 먹먹하다.


-. 임신하고도 입덧이 없었던 수많은 지인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축복받은 사람들... 왜 나만. 왜 나만..!!!


-. 입덧약의 부수적인 기능은 '졸음' 이란다. 그래도 잠에 취하면 위장의 뒤틀리는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수 있기 때문에 난 이 기능이 좋다. 그런데 이 기능 때문인건가? 한주 째 반복되는 꿈을 꾸고 있다. 장소와 상황은 매번 달라지지만, 내가 정신을 못차리고 허우적거리는 꿈이다.


 며칠전엔 떼제 모임에서 기도를 하다가 누가 말을 걸었는데 입이 마비된것처럼 안 움직이고 혼자 빙빙 돌며 쓰러지는 꿈을, 어제는 건물 상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는 꿈을 꾸었다. 약의 효능(?)이 가장 정점으로 치닫는 순간에 나타나는 꿈인건지...


하여간 잠을 하루에 15-16시간씩 자다보니 별 희안한 꿈을 다 꾸는데, 그 와중에서도 꾸준히 반복되는 서사가 있다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 입덧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것이 너무 괴롭다. (물론 아무것도 안하는건 아니지.. 뱃속에서 태아가 내 양분을 빨아먹고 팔과 다리를 만들고 어제는 귀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내 몸인데! 내가 하고 싶은것도 좀 하고, 먹고 싶은것은 좀 먹을수 있게, 내 체력은 좀 남겨주면서 양분을 채가면 좋겠다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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