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을 읽고
하노버 철학도서상을 받았다는 말, 많지 않은 여성 철학자의 저작이라는 소개,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라는 도발적인 표지의 문구.
2019년 초여름에 열렸던 북페어에서-축소되었다고는 하나 정우성, 성심당이라는 특급 게스트로 사람들이 많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무심코 집은 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을 이제야 완독 할 수 있었다.
저작자 특유의 날카롭고 명쾌한 시선으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타자를 향한 혐오, 브렉시트와 IS 테러활동, 정치적 우경화 등 거대한 담론에 관해 3세대 개인주의-즉 축소된 자아를 들면서 누구나 느끼고 있었지만 상세히 그려내지 못했던, 혹은 외면하거나 못 본 척했던 것들을 날것으로 생생하게 파헤쳐 거칠게 꺼내버린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소속도 없다. 더 이상의 허구는 없다.
기득권과 비 기득권층과의 마찰, 세대차이로 인한 갈등, 진보와 보수의 충돌로만 설명할 수 없었던 사회적 갈등들. 이졸데 카림은 이러한 문제를 어떠한 집단 혹은 사회구조에 그 원인을 짚는 것이 아니라, 다양화를 마주하며 변화해버린 '개인'에게 초점을 둔다.
그에 따르면 시대에 따라 개인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했다고 설명한다. 그중 1세대 개인주의는 180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친, 당시 모든 개인을 '동등하게' 만든 모순된 개인주의였다. 개인 자체를 억압하고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에 편입하게 하도록 하는 빅 브라더를 해체하고 개인은 시스템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1세대 개인주의의 선언은 1960년대에서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2세대 개인주의는 -혹시 유년시절 국민학교를 겪어보았던 사람이라면 좀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으나- 기존 삶의 양식과 표현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길, 새로운 체제를 택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여성의 참정권 운동일 수도 있고, 동성애 차별에 대한 저항일 수 있으며 기득권에 편입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의 권리 인정일 수도 있다. 때문에 2세대 개인주의는 본질적으로 표현적이며, 개인의 주장된 정체성이 핵심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 3세대 개인주의란 무엇인가? 왜 당신은 3세대 개인주의 오타쿠라는 제목으로 지었는가?
다원화는 3세대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제한된 정체성을 가진 다원화된 주체는 진정한 민주주의 주체이며 축소된 자아는 다원화된 주체의 결과로 나타난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 불완전한 정체성이며, 불완전한 사투아앵이다. 이런 축소는 어떤 가치에 따른 결정이 아니며, 도덕적 규율이나 훈련된 관용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이 상황은 다원화의 결과다.
오늘날 우리는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조차 다원화를 통해 불완전한 정체성이 되었다. 자신을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틀 아래 자신을 표현하기 어려워졌으며, 본인의 자아 정체성을 온전한 어떤 것으로 규정짓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3세대 개인주의는 2세대 개인주의와 달리 원하던 정체성이 아니며 의지로 싸움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이 정체성은 그냥 생겨났고 오늘날 삶의 환경에서 나온 효과이자 결과다. 그 결과는 자율적 주체가 아니며 스스로 힘이 있는 주체가 아니다. 다원화된 개인주의는 자기 내용이 없다.
'나와 타자들'에서는 이러한 3세대 개인주의-축소된 자아로 인해 발생되는 사회적 현상(혹은 갈등)을 분석하였지만, 나는 이곳에서 좀 더 축소된, 어쩌면 누구에게는 불필요하고 하잘것없는, 것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바로 현시대 서브컬처를 즐기는 사람들, 3세대 개인주의 오타쿠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PC, SF, 특수촬영, 피규어, 라이트노벨, 그 밖에 서로 깊이 연관된 일군의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오타쿠 혹은 팬덤(fandom)의 문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참 조심스러운 일이다. 우선 본인이 그 집단에 친숙해야 하며, 가능하다면 그 집단의 일원이었던 경험이 있어야 하며, 예민한 문제는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소위 어떤 '집단'을 상정하여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계몽하려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에 가서 다시 강조하겠지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문장은 이졸데 카림이 지적한 것처럼 이 조차도 페티시이며 환상이다.)
3세대 개인주의는 하나의 현상이다. 우리는 이를 피할 수도 벗어날 수 없다. 이는 그러한 현상에 대한 고찰의 글이며, 이것이 정답이 아닌 그저 다른 하나의 관점을 조심스럽게 제시하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물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시대에 따라 하나의 문화도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변화해버린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층위의 논의가 필요하다. 집단의 분위기, 정치적 문제, 대중의 문화 콘텐츠 소비 경향 등 분명 그 기저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집적되어 있을 것이며, 지금 일어나는 현상도 후에 가서는 금방 그 모습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와 타자들'에 나왔던 논의를 끌어내어 조금 거칠게 오타쿠를 분류해보자면, 1세대 개인주의 오타쿠는 전후 시절 일본에서 많이 양상 되었던 전쟁에 대한 회의, 반대, 거대한 시스템에 저항하는 개인들을 논하는 작품들(데즈카 오사무, 미즈키 시게루, 기동전사 건담)이나 SF물, 명랑만화와 같은 작품들을 향유해왔다고 정의할 수 있다.
2세대 개인주의 오타쿠의 경우 쉽게 예상했듯이 '모에', '캐릭터 콘텐츠'와 같은 일종의 오타쿠 취향 도식들을 양산해낸 오타쿠 르네상스 시기, 에반게리온의 등장과 라이트노벨이 범람했던 시기를 짚을 수 있겠다. 이러한 2세대 개인주의의 모습은 꽤 오랫동안 진행되어왔으며 현재까지도 그 형태를 자아내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오타쿠 문화에 적용하여, 그들이 향유하는 콘텐츠는 더 이상 '서사(드라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사 이전에 '캐릭터'가 우선됨을 강조하면서 서사의 미완결성, 캐릭터 중심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강조하였다. 오타쿠들 사이에서 캐릭터의 자유화와 공유재화로 인해 캐릭터는 더 이상 원본 텍스트에 얽매여 있는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그곳에서 유리되어 전혀 다른 세계의 편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데이터 베이스 소비란 단순히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담론에서 작은 이야기들로 쪼개어 생성된 표층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콘텐츠가 속하는 거대한 문화 담론, 즉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다시 작은 이야기들로 쪼개지고 이것이 무한대로 파생되는 시뮬라르크들을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서사의 형태가 하나의 캐릭터에 대해 독자에게 설명해주듯 상세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콘텐츠를 소비하는 집단과 공유하는 어떠한 '캐릭터 모에의 데이터베이스'가 있음을 상정하고 그에 기인하여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는 이러한 도식에 이미 익숙하고 별다른 설명 없이 그저 특정 키워드만 보고 캐릭터의 동기, 성격, 그리고 앞으로 할 행동들까지 무리 없이 유추할 수 있다.
데이터베이스 소비에 입각한 모에 요소의 조합, 캐릭터 중심의 서사 콘텐츠는 순식간에 오타쿠계 문화에 확산되어 자리 잡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소비되는 서브컬처의 덕목에 맡게 제작자는 도식, 모에 요소의 조합으로 빠르게 콘텐츠 생성이 가능하고 소비자(오타쿠)는 대량 소비가 가능해졌다. 드라마의 결론이 캐릭터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드라마를 결정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서사의 완성에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3세대 개인주의 오타쿠는 대체 무엇인가?
전반에 이졸데 카림이 정의한 것처럼 3세대 개인주의 오타쿠 또한 두 가지 개인주의가 존재하는 다원화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혼재된 양상의 축소된 자아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이라 정의할 수 있다. 현재 3세대 개인주의가 맞닿뜨리는 콘텐츠들의 형태 또한 아즈마 히로키가 주장한 '데이터베이스 소비'에서 나아가 다른 형태의 콘텐츠로서 소비하게 되는데, 그가 주장한 개별로 생성된 시뮬라르크들이 참조한 각각의 데이터베이스 요소들 사이의 흐릿했던 구분선이 점차 선명하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일종의 작품성, 혹은 캐릭터성으로 퉁쳤던 것들이 이제는 확연히 구분된 하나의 개별 키워드로서 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장르소설의 해시태그(키워드) 분류법을 살펴보자면 기존에 2~3개 정도로 정의되어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기본 5~6개, 혹은 그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검색어에 걸리기 위한 전략적인 시도에 기인한 것일 수 있겠지만, 대부분 작품 소개에 이 작품이 어떤 내용인가를 효과적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완성되어가는 변화의 과정마저 미리 보여줄 수 있는 형태로, 독자의 편의성을 위해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서사라는 것은 캐릭터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성장 혹은 변화를 겪게 되고, 이로 인해 이야기가 변화하게 된다. 아무리 하나의 속성으로 서사의 분위기, 성질을 결정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언급되지 않은 키워드가 작품 세계에서,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변화가 가능한 빈 공간'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독자는 이런 빈 공간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완성된 '키워드'를 원한다. 완성된 서사가 아니다. '키워드'다.
3세대 개인주의는 다원화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축소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불안정함, 쪼개진 자아를 수복하기 위해 '완성된 정체성'에 자신을 넣으려고 한다. 그것이 어떤 정치적 집단이든, 종교든, 그들은 그 집단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자아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 그 집단에 속한다. 이는 분열에 대한 자기 방어이자, 다원화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방어다.
이러한 경향은 오타쿠의 소비문화에도 적용된다. 그들은 더 이상 불완전한 어떠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소설 안의 캐릭터들은 어떤 형태로든 완성되어 있어야 하며, 서사가 진행됨으로써 나타나는 변화는 그들 고유의 '캐릭터성'에 영향을 주어선 안된다. 적어도 그런 면모를 독자 본인이 미리 키워드로 수집할 수 있게끔 다양한 키워드로 명시를 해야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카타르시스를 즐기지 않는다.
결핍에 대한 카타르시스, 결핍을 완성으로 바꾸는 카타르시스는 이제 3세대 개인주의 오타쿠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스트레스일 뿐이다. 그들은 이미 불완전한, 축소된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이 환상적인 무언가로 작용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하게 변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환상이며 그들이 채워지길 원하는 욕구다.
3세대 개인주의의 대두로 나타나는 변화는 콘텐츠 소비방식뿐만이 아니라 오타쿠 활동 즉 팬덤의 활동 양상에도 영향을 준다. 여기서는 팬덤에 관해 너무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겠다. 팬덤 연구에 관해서는 훌륭한 다른 저작물들이 많으며, 혹 일반론을 살펴보고 싶다면 마크 더핏의 '팬덤 이해하기'를 추천한다.
여기서는 오타쿠가 생성한 콘텐츠, 혹은 팬덤의 활동과 공식의 경계선이 갈수록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에 기인하여 나타나는 몇몇의 팬덤 양상을 언급하려 한다.
나와 타자들은 종교, 인종문제와 더불어 정치에 관한 문제도 언급한다. 여기서 3세대 개인주의는 정치를 어떠한 국민적 소양, 혹은 목표의식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팬으로서 참여한다'라고 언급한다. 다원화된 주체는 정치에 관심이 많으며 그 관심의 형태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이는 공식을 소비하는 오타쿠의 태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미 오타쿠는 하나의 팬덤이기 때문에 팬으로서 참여하게 되는 행동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기존보다 더 원작의 스토리에 개입하고 참여하고 싶어 하게 된다. 즉 본인들의 열망으로 기인한 특정 서사가 공식으로 인정받길 원한다.
즉 2차 창작을 통해 나타났던, if월드에서 펼쳐진 별도의 세계관을 자신들의 놀이터로 향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것들이 공식적인 세계관에 편입되길 바란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Right)을 흥행적 지표로서 발 빠르게 활용하는 할리우드 콘텐츠의 경우 소위 팬보이(fanboy)라고 통칭되는 올드비 집단과의 마찰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꼭 그것이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마찰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들로만 구성되었다고 생각한 그 집단 속에는 기성세대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편입된 어린 연령층도 존재한다. 그들은 그 집단의 정체성으로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확립된 정체성의 틀 아래 작품을 수용한다. 신세대 팬보이들은 본인들이 스타워즈 세대가 아님이 확실하더라도 라스트 제다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미국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Voltron의 경우도 한 주요 등장인물의 성적 취향이 콘텐츠 안에서 드러났을 때도 노골적인 저항이 존재했다고 한다. 한 제작자 인터뷰에서 프리미어 시사회에서 공개된 영상의 반응 때문에 결국 그 캐릭터가 게이이며, 남자 친구가 존재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을 수정해야 했다고 설명한다. 거기서 나타난 저항세력은 Voltron이라는 작품을 예전부터 봐왔던 올드비 세대가 아니다. 새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으로 들어온 신세대들로 이루어진 팬덤의 저항이었다. 감독은 '시간을 돌리고 싶다면 해당 화가 처음 공개되는 프리미어 시사회에서 미리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그 과정에서 팬들의 기대치, 혹은 그에 대한 거리 조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꼭 Voltron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실시간으로 연재되던 모든 콘텐츠들, 심지어는 과거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홈즈를 죽이고 완결시켰던 시대에서 나타났던 팬들의 거센 저항까지도 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팬과의 소통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이를 수용해달라는 방식과는 다르게 문제가 되는 콘텐츠를 자신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 수용자적인 운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수용 미학을 넘어서서 콘텐츠와의 상호작용, 혹은 그 이상의 영역을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진영의 집단 논리와 흡사한 형태로 관찰되며, 나아가 팬덤에서의 '공식 선언'이 '공식'으로 결정되는 일종의 오타쿠 정당의 정치선언으로 이어진다.
팬덤의 주도로 해당 콘텐츠를 공식에서 삭제 해달라는 청원운동을 벌이는 모습은 이제는 그리 특이하지도 않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열망을 노골적으로 활용한 것이 바로 본인들이 프로듀서가 되어 아이돌을 구성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AKB48이나 프로듀스 101같은 콘텐츠가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나와 타자들'에서는 이러한 정치활동 혹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무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꼬집는다. 정체성적 자유주의는 더 이상 개인을 보지 못한다. 단지 정체성 집단만을 호명한다. 그러나 다양성의 고정화는 자유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스트들을 낳았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적 나르시시즘은 진보적 힘의 거부에 대한 책임이 있다. 왜냐면 이 나르시시즘이 다양화를 위해 국내 정치에서 공통의 문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졸데 카림은 글의 마무리를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며 끝을 맺는다. 다양화로 인해 나타난 3세대 개인주의들.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질문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불안정한 자신의 자아를 뒤흔들게 하는 매혹적인 질문이며, 이 불안정성을 탈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대안'을 꿈꾸게 한다. 그러나 지젝이 언급한 것처럼 꿈은 출구 없는 상황에 저항하는 페티시이며, 즉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일종의 페티시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신전들, 그 믿음의 환상에 빠져 계속된 선택을 해왔다.
이 달콤한 유혹의 구속은 3세대 개인주의 오타쿠에게도 피할 수 없는 매혹적인 덫이다. 무엇을 향유할 것인가? 올바른 오타쿠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에 참여할 것인가? 이 작품에서 무엇을 이룰 것인가?
이 또한 계속 순환될 것이며, 아무런 답도 남기지 않은 채 존재할 것이다. 아, 단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그들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그나마 자신의 욕망에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민음사, 2019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연실문화연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