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보 시절을 회상하며
벌써 중학생이 된 하나뿐인 아들이 어릴 때 나에게 종종 했던 말이 있다. "엄마! 깨어나!" 누가 들으면 중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적에 아침에 등원할 때는 당연하게 자고 있고 하원할 때도 자고 있었기에 종종 듣던 말이다.
내내 잤던 날도 있고, 중간에 깨서 뭔가를 한 날도 있다. 아이는 내내 자고 있는 무기력한 엄마를 보고 깨어나라고 흔들었다. 나는 위로받고 싶었고 우울증이었다. 현실이 악몽 같아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 상태였다. 모든 것을 회피하고 잠만 자고 싶었다. 깨어있기 싫었다.
살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던 나를 짝꿍은 그저 바라봐주었다. 내키는 대로 해도 나를 용서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되었다. 어릴 때 눈치를 보며 자랐던 내게 이렇게 까지 해도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내가 낳은 아이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다. 짝꿍이 많이 힘들었겠지만 나도 힘들었다. 돌이켜보면 병원에 갔어야 했다.
누워있는 시간이 짧아지고 삶의 패턴이 달라지면서 지금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때 치유를 많이 받았고 마음의 응어리가 부드러워졌다. 언젠가 사라지는 날이 올까? 부드러워진 응어리 조금은 안고 가도 괜찮다. 딱딱하고 날카롭던 응어리가 아닌 것에 만족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어린 자녀는 힘이 없기에 부모에 의해 그들의 삶이 크게 좌우된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생각이 많다. 좋은 영향을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그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봐주려고 노력한다. 부모만큼 중요한 사람이 결혼해서 함께 사는 배우자가 아닐까 싶다. 배우자는 부모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내 삶을 안정시켜 주기도 하고 흔들어 놓기도 한다.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살아가는 게 부부지만 때로는 심적으로 부모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음의 부모 나의 동반자여, 사랑합니다.
나를 그저 바라봐준 참 좋은 당신, 나의 짝꿍 양구씨.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