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뭐 별건가요. 갖다 붙이면 다 운명입니다.
그때 나는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쿠리는 애니메이션 배경 작업을 하는 회사에 막 들어갔었다. 영상디자인을 전공한 쿠리는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하고 애니를 사랑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 당시에 쿠리가 쓰던 벽돌 같은 외장하드가 4-5개 있는데 전부 애니메이션이다. 그 덕에 쉽게 구할 수 없는 단편 애니도 많이 봤다. 지금은 방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다. _한번 꺼내봐야겠군!_
쿠리는 졸업도 하기 전에 갑자기 취직이 되어서 집을 구하기 전까지만 고시원에서 살겠다고 했다. 전주가 집인데 서울에 취직이 된 것이다. 그때 마침 같이 자취를 하던 하나뿐인 내 동생이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나가 있었다. 당연히 쿠리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고, 우리는 꽤 자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실제로 춤도 췄다. 얼큰하게 술 마시고 내 집에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
쿠리가 다니던 애니 회사는 언제든지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도록 모두에게 열쇠를 복사해주었고, 라꾸라꾸 침대가 늘어선 수면실이 있었으며, 반지하 사무실인데 쿠리 빼고 모두가 흡연을 하며 작업을 했다. 쿠리는 야근을 밥먹듯이 했으며 내가 보고 싶다고 새벽에 첫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와서 나를 잠깐 보고 회사로 출근하는 짓을 여러 번 했다. 나의 집은 안암역, 쿠리의 고시원은 구로 쪽이었다. 그리 가깝지는 않은 거리를 나를 보겠다고 거의 매일 오는 쿠리의 열정에 나는 반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쿠리가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궁금해서 고시원에 한번 가봤다. 고시원은 꽤 낡은 건물에 있었고 시설도 정말 구렸다. 아무리 잠깐 산다지만.... 방에 들어가자 너무 좁아서 놀랐고, 꽤 큰 쇼핑백에 소주병이 가득해서 또 놀랐다.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뭔가 씁쓸하다.
그런 데서 살지 말고 빨리 집을 구하라고 말하며 그동안에는 우리 집에 와서 지내라고 했다. 동생이 한국에 들어오려면 몇 달 시간이 있었다. 음... 거기서부터 우리의 운명은 제대로 엮이기 시작한 것이다. 연애한 지 한 달이 지나서 같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더 신나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쿠리의 출퇴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때 우리는 젊었다. 철이 없었다. 뭐, 지금도 철없이 살고 있지만...
_다음화에서 만나요!_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