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맨딩 하이츠>와 경제 이념 전쟁의 역사
지난 글에서는 케인즈 이론이 힘을 얻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케인즈의 이론이 경제 위기에서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지만, 케인즈가 주장하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죠.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케인즈의 경제 이론이 등장한 이후로도 경제 이념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책 <커맨딩 하이츠(The Commanding Heights)>의 내용을 중심으로, 역사의 흐름에 따라 거시경제학 이념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커맨딩 하이츠>는 다니엘 예르긴과 조셉 스니슬라프가 쓴 책으로, 지난 20세기동안 이루어진 경제 이념 전쟁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냅니다. 우선 책의 제목 ‘커맨딩 하이츠’는 레닌의 연설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석탄, 철강 등 중공업, 즉 국가 경제의 핵심 부문을 의미합니다.
이 ‘커맨딩 하이츠’를 과연 정부와 시장 중 누가 통제해야할까요? 커맨딩 하이츠를 정부가 통제한다면 그 국가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시장이 통제한다면 그 국가는 자본주의에 가까운 경제체제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죠. 주요한 역사적 사건에 비추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도출해내는 과정이 바로 이 책 <커맨딩 하이츠>에 담겨있습니다.
케인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경제에 대한 통념은, 시장은 효율적이고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에 시장에 자율성을 부여해야한다는 고전학파의 입장이었습니다.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이 이러한 입장을 아주 압축적으로 잘 나타내죠.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잘 맞춰주기 때문에 자원은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계화와 기술 발전으로 번영을 누리던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오자 자본주의, 즉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 외에 다른 길이 있는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국가마다 경제 체제의 길이 나뉘게 되죠.
대표적으로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며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하게 됩니다. 또한,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배상금을 충당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내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이에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국가는 실패한 듯 보이는 자본주의 대신 전체주의, 즉 파시즘을 택하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미국은 전쟁 이후 호황을 누렸지만, 역시 1930년 대공황이 발생하며 큰 경제적 혼란을 겪습니다.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자산가치는 하락했습니다. 그 충격은 유럽에까지 전해졌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심상치 않은 기세의 파시즘을 경계하면서, 대공황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케인즈의 경제이론입니다. 대공황의 원인과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면,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에 잡아먹힐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죠.
케인즈는 국가경제도 기계처럼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전 고전학파의 입장과 달리 시장에 결함이 있다는 전제 하에,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규제하고, 정부지출을 늘려 완전고용을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경제상황과 정부지출은 반대여야 하므로, 호황기에는 지출을 줄여 자금을 비축하고 불황기에는 정부지출을 늘려 사람들의 구매력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이죠. 또한, 국가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케인즈는 국내총생산, 실업률, 인플레이션율 등 우리가 현재까지도 중요한 경제지표로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만들어 낸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실상 거시경제학의 창시자로 여겨집니다.
미국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케인즈의 이론에 따라 시장 규제를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정부는 항공사의 티켓 가격이나 항로를 결정해주었죠. 이러한 처방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상황과 잘 맞물려 성공적인 경제 회복을 이룰 수 있었고, 케인즈는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케인즈가 이전까지의 경제학을 완전히 부정했다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케인즈가 시장을 불신한 것은 아니지만,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다시 안정을 찾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정부가 개입하여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자는 입장이었죠. 이와 관련해 케인즈는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한편, 케인즈의 이론에 반대하는 의견을 지닌 하이에크도 있었습니다. 그는 책 <예종의 길>에서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은 자유 침해이며, 정부가 지나치게 많은 경제 계획을 세우면 결국 자유를 말살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는 충격적인 발언과 함께 케인즈를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중앙계획 경제는 전체주의 국가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말도 덧붙였죠. 그는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심각한 경제 불황의 상황에서도 정부는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되며,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시장경제의 신뢰도는 매우 낮아졌습니다. 소련의 계획경제가 파시즘을 패배시켰죠. 과학적 사회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전진했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정체했습니다. 당시 국가의 1/3이 사회주의를 채택하는 정도까지 이르렀으니 말이죠.
영국에서는 전시의 계획경제 정책을 유지하자는 입장의 노동당이 승리하며 커맨딩 하이츠를 국유화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윤추구보다는 국민 복지와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전후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평등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에도, 대부분의 조언은 계획경제를 기반으로 정부가 커맨딩 하이츠을 관리해야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인도의 한 수학자는 계획경제의 우수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하기도 했죠. 이렇듯 개발도상국 사이에서도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정부 통제와 규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계획경제를 채택하는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서독은 조금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경제 책임자로 임명된 자유시장 경제학자 루드비히 에르하르드는 가격 통제로 인플레이션을 제어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더 악화시켰다는 주장과 함께 아무 말 없이 모든 가격통제를 폐기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결과 기존의 골칫거리였던 암시장이 사라지고, 경제의 기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서독의 경제는 당시 계획경제에 의존하던 영국을 빠르게 따라잡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국가는 계획경제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시카고 대학에서 하이에크와 프리드만을 중심으로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시카고 경제학파가 조금씩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케인즈의 영향력이 너무나도 막강했고, 대부분의 국가가 사회주의적 성격이 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은 시대에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죠.
워싱턴의 케네디 역시 케인즈를 택했습니다. 경제가 악화되는 이유는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전제 아래, 전문 관료들이 중앙에서 치밀하게 경제를 계획했습니다.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풍요가 찾아왔고, 영광의 30년을 보냈습니다. 일본과 유럽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나 이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경기가 침체되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경기가 과열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스태그플레이션은 물가는 상승하는데 실업률도 함께 높아지는 상황입니다. 대체 어떤 재정정책을 펼쳐야 할지 알 수가 없죠. 케인즈의 이론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케인즈의 경제이론에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영국에서 역시 가격통제 시도가 실패하고,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한 잦은 파업으로 고비용과 저효율, 즉 지속적인 임금상승과 생산성 저하가 특징인 ‘영국병’이 나타납니다.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하며 복지국가의 한계가 드러나게 되죠.
한편,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74년 하이에크가 노벨상을 수상하며 경제 이념전쟁의 전환기가 찾아옵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영국에서는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가 당선되며 그들을 중심으로 다시 경제에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항공, 수송, 철도 산업에 대한 규제는 경쟁을 저해했습니다. 항공권 할인을 금지하자 항공사는 비싼 기내식을 제공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정부는 샌드위치 크기까지 규제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죠. 국가의 시장에 대한 규제가 점차 일반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부의 지나친 개입은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가져오며, 경쟁을 도입하면 인플레이션을 타파할 수 있다는 입장의 시카고 학파가 힘을 얻으며 항공 산업의 규제를 철폐하자마자 가격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항공사가 사라졌고, 항공 산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를 당하거나 급여가 낮아지면서 고통을 겪었죠.
그러나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 항공업 종사자는 이전에 비해 오히려 2배 증가했습니다. 폭발적인 가격 경쟁으로 항공권 가격이 낮아지며 수요가 증가해, 승객 수가 3배 증가했기 때문이죠.
이처럼 시장의 힘을 막 체감하기 시작한 순간, 하이에크의 경제 이론을 받아들인 공화당의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자유시장경제를 되찾기 위한 미국의 행보는 더욱 과감해졌습니다.
인플레이션율을 낮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화 긴축이었지만, 통화 긴축 정책을 펼치면 일시적인 경기침체는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은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If not us, then who? If not now, then when?)’라는 말과 함께 정책을 밀어붙였죠.
예상한대로 혹독한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높은 금리로 사업은 어려워지고, 현금흐름이 경색되며 서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죠. 그러나 3년의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인플레이션의 그림자가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나쁜 것이고, 중앙은행의 임무 중 하나가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1980년대에 처음 생겨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레이건의 경제정책은 크게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이를 ‘레이거노믹스’라고 일컫습니다.
1) 건실한 금융
2) 규제 철폐
3) 적정한 세율
4) 제한적인 정부지출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해보이는 것들이, 당시에는 극단적이라고 비판받는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세금을 줄이자 재정적자가 심해졌지만, 경제는 다시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자유시장의 기본적인 힘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어느새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가장 사회주의적인 국가가 되어있었습니다. 마가렛 대처는 하이에크의 영향을 받아, 불평등과 파산이라는 고통을 감내해야 영국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평등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도전해야했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는 이유로 국민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영국의 과도한 세금과 시장 규제, 공공지출을 줄여야하며, 지나친 정부 개입은 오히려 더 깊은 경기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견을 견지합니다. 정부지출을 늘리고 돈을 마구 써야 실업자와 기업을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친절하지도, 배려가 깊지도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덧붙이죠.
기업 보조금을 삭감하고 정부지출을 줄인 결과, 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고 실업률이 높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지만,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하며 무사히 입지를 지킬 수 있었던 마가렛 대처는 성과를 내지 못했던 정책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 노동당은 커맨딩 하이츠를 국가소유로 만들었습니다. 이 국영기업이 대처의 주요 공격 목표였죠. 국영산업은 점점 그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필요하면 재무부의 돈을 가져다 썼고, 이익은 거의 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렛 대처는 비경제적 사업은 혈세 낭비이며 접어야한다는 입장 하에 국영기업에 대한 정부보조금을 대폭 줄였고, 시장 논리를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당시 영국의 탄광산업은 정부보조금에 크게 의존하였고, 탄광 중 75%가 손실을 보고 있었습니다. 광산 노조와 대처 정부는 경제 · 정치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대립을 시작했습니다. 노조와 정부의 충돌로 표면화되었지만, 사실상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 자유시장 대 계획경제 사상의 거대한 대립이었죠.
긴 대립 끝에 결국 대처 정부가 승리하며, 보조금이 크게 줄어든 대부분의 탄광은 문을 닫게 됩니다. 일자리를 잃은 탄광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비극이 펼쳐졌고, 노동당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마가렛 대처는 민영화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국가 소유 기업의 주식을 민간에 파는 것이죠. 대처는 전기, 전화, 가스, 석탄, 심지어 수도까지, 영국 경제의 커맨딩 하이츠를 시장에 내놓습니다. 국영 산업의 2/3이 민간부문에 매각되었죠.
대처의 승리 이후 단시간에 전 세계 대부분의 정부들은 경제의 중추 산업분야에서 퇴각했고, 경제의 주도권은 정부에서 시장으로 옮겨갔으며, 주류 거시경제학도 케인즈에서 하이에크의 이론으로 옮겨갔습니다.
지난 20세기동안 경제 이념은 다음과 같은 큰 흐름을 보입니다. 20세기 초에는 작은 정부론이 지배적인 흐름을 보이다가, 20세기 중반에는 큰 정부론이 주를 이뤘고, 20세기 말에는 다시 작은 정부론으로 회귀했죠.
하이에크는 평생 학계를 벗어나지 않고 프리드만과 함께 이론을 발전시켰고, 레이건과 마가렛에 의해 채택되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가 우연히 동시에 집권하며, 세계는 시장 기반 경제 체제와 통화정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론적 정치가였습니다. 본인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한 이론을 받아들이고 실제 정책을 펼치며 실천에 옮겼죠.
누가 국가경제의 중추, 즉 커맨딩 하이츠를 통제해야할까요? 시장일까요, 혹은 정부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커맨딩 하이츠>에서 말하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가 증명해준 승자는 결국 시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에는 시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했지만, 현재는 결국 시장이 인간의 창의성을 가장 잘 살린다는 데 대해 이견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시장의 힘을 어떻게 잘 이용하는지에 따라 국가의 성장과 쇠락이 결정되겠죠.
파시즘은 사라졌고, 계획경제를 채택한 구소련은 붕괴했습니다. 소련 외의 국가들 역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죠. 아직까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경제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채택하되, 심각한 시장실패의 상황에서는 최소한의 정부 개입을 통해 고통을 줄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경제 정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또 흐르고,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짐에 따라 경제 이념의 흐름이 다시 어떻게 전환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겠죠.
오늘은 책 <커맨딩 하이츠>를 토대로 경제 역사의 흐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글이 역사적 사건과 함께 거시경제의 주류 이론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알아보고, 올바른 경제정책에 대해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글을 마칩니다.
<참고자료>
The Commanding Height -Daniel Yergin, Joseph Stanisl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