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프로그램의 난립에 부쳐
어느 때보다도 사회 분위기가 흉흉한 지금의 한국은 ‘경멸’이라는 비정상이 정상화된 시대라고 정의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인상적인 경멸의 어휘 중에서도 ‘어른’이 ‘꼰대’로, ‘조언’이 ‘훈장질’로 치환되는 양상에 주목하고 싶다.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는 분명하게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존경할만한 어른이 없다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러한 좌절감의 표현들은 청년들이 기성세대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고 있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척도다.
그래서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지겹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오늘도 인용하고야 만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앞서 말한 청년세대의 분노 위에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제를 겹쳐보면 재밌는 결과가 나온다. 나는 청년세대의 분노가 단순히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반발에서 온다고 보지 않는다. 어째서 ‘존경할만한 어른’을 찾아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그 결핍에 대한 표출에 가깝지 않을까.
청년세대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안정된 기반을 가진 기성세대와 분리되어 살아가기 힘들고 일정부분 의존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극대화된 오늘날, 청년세대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어른을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과거 ‘힐링’ 혹은 ‘멘토’ 붐에 청년들이 열광했던 이유, 안철수가 처음 정계에 입문했을 때 20대 층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디어는 이런 시대상을 ‘강연 프로그램’에 반영했다. ‘존경할만한 어른’이 없으니 ‘존경할만한 어른 후보’들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서 적극적으로 ‘전시’됐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것을 이야기 했음에도 결국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했다. 대부분 개인적 역경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해도 돼요’, ‘~도 괜찮아요’ 식의 조언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을 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강연 버스킹’을 표방하는 새로운 포맷의 강연 <말하는 대로> 역시 마찬가지다. 강연 프로그램의 첫 번째 붐이 사그라진 이후 대중에게 ‘힐링은 소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방어기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방어기제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추가했을 뿐 내용적인 측면에서 차별점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유사어른’들이 ‘강연 프로그램’이라는 공장에서 ‘감동’과 ‘존경’을 짜내는 것에 불과한 셈이다.
청년문제의 본질은 비틀린 사회적 구조에 있고, 사실 이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반면, 강연 프로그램이 오직 이 시대의 비극을 묘사할 뿐이라면 청년들의 고통 없이는 지속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청년문제는 이미 하나의 산업이다. 컨셉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화두를 던지지 못하는 강연으로는 기존 질서를 재생산할 뿐이라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헐벗고 목마른 사람을 정말 돕고 싶다면 생수를 팔게 아니라 우물을 파줘야 한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강연에서 마취와 고통의 상품화를 넘어선 가르침을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