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못미 Aug 11. 2017

인간이 인간을 설계하는 미래

유발 하라리 -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는 600페이지에 달하는 <사피엔스>에서 인류학역사학사회학적 연구성과를 넘나들며 인류 역사를 직조해 나간다그리고 끊임없이 독자에게 말한다. “인간에게 어떻게 그것은 가능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작은 대답들의 연쇄작용은 무엇이든 가능했다로 수렴하는 듯하다그리고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7만 년 전 시작한 인지혁명을 마무리 짓고 곧 지적설계라는 2차 인지혁명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것이라고 확신한다그래서 새로운 질문이 도출된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러나 이 질문도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종의 역사를 끝장낼 궁극의 질문이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되고 싶다는 여전히 원한다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책은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라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남겨둔 채 마무리 된다.
  
정리하자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를 예비하고 있는 이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까마득한 과거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를 탐색해야 했다. ‘인류의 진보라는 개념이 근대적 발명품임을 드러내야 했고이 근거 있는 자신감이 과학과산업과자본주의 시스템의 신용과 맞물리며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가는 과정을 조망해야 했다그리곤 그것들의 강력한 추동력으로 인해 비로소 근미래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의 범위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에 닿는다저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진다.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설계하고 강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나의 지능은 지금보다 열 배 증가할지도 모른다열 배 증가한 지능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감히 상상할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이 왜 하필 열 배여야 하겠는가백 배천 배천 백배천 백배의 천 백배혹은 그 이상을그 이상의 이상을 바랄 수도 있다팔이 한 쌍 더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팔을 다는 김에 다리도 한 쌍 더 달지 않을 이유가 없다무엇이든 가능한 세상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당혹스럽게 한다예전에는 그저 죽어야 해서 죽었지만미래에 죽음은 팔다리를 한 쌍 더 다는 것처럼 선택의 문제로 옮겨간다하지만 과연 그 선택은 무엇에 근거할 것인가이미 과거의 기준이었던 원하다는 시효가 만료됐다예컨대 미래의 인간이 원한다는 것은자기가 이렇게 원할 것을 과거에 원했다는 뜻일 뿐이라는 것이다자기 창조의 시대에는 욕망마저 스스로 설계할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욕망이란 그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등장하는 이중사고처럼 자기가 속고 있다는 사실마저 속여 버리지 못한다면 말이다.
  
<사피엔스>의 질문은 표면상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의 문제에서 멈춰있지만배후에서는 이처럼 그 원하다의 곤란함을 은밀히 드러내고 있다궁극적인 질문은 사실 왜 원하는가?”의 문제처럼 보인다지금까지 우리의 욕망은 선택에 달렸다기보다 생물학적 한계로 인해 주어진 것에 가까웠다이런 생물학적 한계로 인한 부자유는 제약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넓은 의미의 욕망으로서 행동의 근거가 되어 주기도 했다즉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종의 역사는 바꿔 말하자면 주어진 것들의 역사였다그러나 니체는 세상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던 을 죽였고앞으로 과학기술의 지적설계는 자유주의적 개인의 신화를 지탱하던 진정한 욕망을 죽일 것이다이쯤 되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살해해온 비정한 자식에 다름 아니다그 대가로 인류는 감당할 수 없는 무의미를 향해 내달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1995년 개봉된 극장판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가 이에 대한 간접적 답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인간과 기계의 중간사이보그로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 회의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부품이 결코 적지 않은 것처럼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는 놀랄 정도로 많은 것이 필요해."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쿠사나기 소령보다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더 이상 우리를 인간으로서 규정하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그 무의미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지조건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물론 그 조건이 농업혁명처럼 부분적 합리성이 전체적 비극으로 이어지는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에 빠지지 않을, ‘행복한 필요의 역사를 써나가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이제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분류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도전의 출발점에 서있다많은 닉 보스트롬엘론 머스크 같은 과학자 혹은 사업가들이 인류가 근본적이고 결정적 변화를 겪게 되는 특이점이 머지않았노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단어 그대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가 된 인간이라니인간은 또 다시 무지하고미래는 알 수 없다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16세기에 신대륙을 찾아나섰던 유럽 탐험가들처럼 호모 사피엔스 너머의 세계를 위한 빈 지도를 다시 채워나갈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예상하건대아마 이번에도결국엔인간이 호모 사피엔스이던 시절에 유명했던 어느 우주영화의 인간예찬처럼 외치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늘 그랬듯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