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어떤 책이든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수많은 인물, 지명, 인용구와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인류사를 종횡무진 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은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이 책을 읽게 되어 교차하며 읽어가는 재미도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 자문했다. 가벼웠나? 무거웠나? 복잡했나? 단순했나? 생각해본 결과 이 책의 미덕은 '경쾌함'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감상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새삼스레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이라는 제목을 곱씹어봤다.
몰락귀족 출신 독일인 저널리스트는 세계사를 농담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왜 저자는 세계사라는 농담을 참을 수 없었을까? 우리는 드립을 설명하려 드는 설명충의 목을 기꺼이 쳐버린다. 농담을 설명하려 드는 순간 의미가 손상되기 때문이다. 농담에는 증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농담이 피식 웃게 하는 것만으로 자기 충족적인 행위인 것과는 별개로 그 안에 일정 성분의 진실이 꼭 녹아 있어야 한다. 농담과 개소리의 결정적인 차이는 거기에 있다. 가볍되 가볍지 않다. 언중유골이다. 속담과, 신화와, 구전설화와, 우화 등의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농담을 가장한 그 가벼운 무거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안녕 조르바!
무거움 하니까 이 책과 유사한 주제의 무거운 책이 생각났다. 저자가 서문에서 부터 친분을 과시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다. 인류의 발원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빅히스토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쇤부르크의 <세계사 농담>과 동일하다. 그러나 600 페이지와 350 페이지라는 분량에서 부터 차이가 현저하다. 심지어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 이전부터 근미래까지의 인류사를 논증하는데만 그 분량을 온전히 할애하고 있는 반면, <세계사 농담>은 총 10가지 주제의 챕터를 통과하는 동안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씨실과 날실처럼 왕복하며 성긴 직물을 자아내는 만큼 치밀함의 측면에서는 비교 대상이 못 된다.
그러나 애초에 <세계사 농담>은 학술적 논증을 보태기 위해 태어난 책이 아니기에, 그 '성긴 직물'이 갖는 나름대로의 멋을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서문에서부터 '유럽중심적인 관점의 세계사'를 서술할 것임을 인정하며, 자신이 학자가 아닌 그저 '저널리스트'의 자격으로서 세계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달하겠다고 아예 양해를 구해버린다. 그가 갖고 있는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취재-전달하기'의 능력이다. 그는 문헌을 취재하여 이야기의 뼈대를 만들고 문장으로 구미가 당기도록 살을 붙이는 방식을 택한다. '농담'이라는 제목 때문인지 이런 식의 너스레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기분이다.
무대장치 준비를 끝낸 그는 직접 사료를 제시하기 보다는 각 챕터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위한 하나의 기획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연극을 펼쳐 보인다. 저자의 독백이 전면에, 다양한 사건들이 무대 배경처럼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간다. 세계사라는 하나의 시간축을 각 챕터별로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한 덕분이다. 그래서 적은 분량에도 읽을 거리는 꽤나 풍성하게 느껴진다. 뻔하지 않은 예시 또한 즐길거리다. 그 중에서도 두 '루터(마르틴 루터,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비교하는 대목이 개인적으로는 압권이었다.
각 챕터의 호흡 또한 20~30페이지 정도로 단촐하여, '세계사'나 '빅히스토리'라는 단어에 미리 지루함을 느낄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준다. 챕터의 첫 머리를 여는 방식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 또한 여러 역사가의 말이나 신화에서 등장하는 비유적 요소들을 적절히 인용하며 독자가 문장의 늪에 빠질 일을 애초에 차단한다. 무엇보다도 각 챕터의 시작과 끝에 인용구와 중요한 개념 10가지를 정리해주는데, 이것만 골라 읽더라도 충분한 재미가 된다.
저널리스트의 글쓰기를 보면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다는 문체의 느낌이 가장 먼저 와닿지만, 그보다도 항상 놀라게 되는건 사건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솜씨가 아닐까 싶다. 거의 모든 대목에서, 제시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정확히 이해를 도울 만큼의 전후맥락 설명이 제공되고 있다. 그런 글쓰기 전략을 통해 우리가 교과서에서 무비판적으로 학습했던 역사적 편견들을 몇 꺼풀 벗겨낼 수 있기도 했다. 10번째 챕터에서는 그런 팩트를 제공하고자 하는 기자 정신이 조금 과했던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대체로 명료한 설명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보자. 저자가 왜 이 책을 농담하듯 써야 했을까? 그는 기자이기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느냐 보다,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지가 중요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경쾌한 문체를 통해 세계사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끌어당긴 뒤 맨 마지막에 가서야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말하기 방식. 가벼운 무거움, 농담의 전략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사를 두 가지 형태의 사랑이 서로 다투는 과정으로 보았다. 하나는 극단적인 경우 세계를 파괴하는 자기애이고, 또 하나는 극단적인 경우 자신을 포기하기에 이르는 이타적 사랑이다. 인류의 진보는 이러한 인간 고유의 자기애가 낳은 결과이자 동시에 종말을 암시하는 징후이기도 하다.
- 301p
서로 판연히 다른 가치를 가진 전세계인이 몸을 부대끼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세상이다. 과학과 자본주의와 기술의 발전 속에서 윤리와 도덕은 얼핏 구시대의 유물처럼 흩어지는 듯 하다.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으로 미래를 내다보지만 한치 앞 미래마저도 불확실해 보인다. 이 불안감을 해소시켜주기는 커녕 저자는 역사적 사건은 소리 없이 찾아오며, 그 사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그 사건의 영향의 한 가운데 처해있을 것이라는 꿈도 희망도 없는 말을 속삭인다.
왜? '인간의 불완전함'이 세계사의 추동력이자 브레이크고,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을 꿈꾸며 발전을 거듭했지만, 내재된 불완전함 때문에 스스로 파멸하는 존재다. 이타심과 자기애가 빚어낸 창조와 파괴의 왈츠를, 인류 역사가 춰온 그 몸짓을 그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더 나은 실패를 반복해야만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는 역설이 담고 있는 진리 말이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썩 괜찮은 농담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