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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10. 2017

'운명'과 '분노', 미국 중년의 결혼 바라보기

로런 그로프, <운명과 분노>를 읽고

내가 이렇게 두꺼운 장편소설(600p)을 마지막으로 읽었던게 언제였더라? 음, 아마 2012년 초 겨울. 그러니까 수능을 제대로 망치고 뭘 해야할지 몰라서 찐고구마를 우유로 꿀꺽 삼켜가면서 읽었던 <천사와 악마>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정말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 못견딜 지경이었다. 다음 날 나는 대낮까지 잠만 잤고, 엄마는 한낮도 살짝 꺾일 때 쯤에야 죽겠다는 듯이 부시럭대며 일어난 내게 눈총을 주셨다. 내 수면을 박탈했다는 의미에서 댄 브라운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용두사미 6부작 <신>도 열심히 읽었던 나였구나.

5년(다시 생각해보니 저절로 '우와'가 나온다)의 시간을 건너 뛰어 읽게 된 이 묵직한 소설, <운명과 분노>는 오바마의 후광이 무색하게 재미가 없었다. 물론 내가 읽기 훈련이 덜 된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바마가 꼽은 2015년 최고의 책이라는데 그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을듯.) 그래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기에 두 소설은 종목이 달랐다. 피겨 스케이트 선수한테 쇼트트랙을 뺑뺑 돌라고 강요하는건 가혹한 짓이니까. 누가 보더라도 이 소설은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 메시지를 꽁꽁 숨겨놓은 듯한 몇 가지 장치들을 품고 있었고, 그래서 묵직해질 수 밖에 없었겠지 하는 인상을 받았다.

하나의 이야기를 '운명', '분노'라는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운명' 파트에서 영문학 선생 덴턴 스레셔의 입을 빌려 흘러나온 강렬한 암시. 비극과 희극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저 어떤 관점, 어떤 틀을 선택하느냐에 달렸을 뿐. 나도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주제고, 그런 측면에 있어서 저자의 주제의식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하지만 꼭 이렇게 수다스러워야 했을까? [아니오.] 이 소설의 결말부 플롯은 신선했는가? [우리는 이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오이디푸스>, <채식주의자>, 그리고 수많은 한국의 막장드라마들에서 익숙한 파편들을 보아 왔다. 게다가 이런 흐지부지한 결말. 그리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헐거운 연결.] 차라리 훨씬 파괴적인 결말을 보여줬다면, 그랬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물론 그건 언제나 요구하는 자의 쉬운 투정일 뿐이다. 더 맛있는 음식을 가져와라!

그래도 이 소설에서 감명깊었던 부분이 있다면, 인생은 마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원뿔 모양의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모양일거라는 비유였다. 마치 어릴 적 뺨에 난 자그만 화상이 사춘기에 커다란 콤플렉스로 자리잡게 되는 느낌이랄까. 내 과거의 행동들은 그 자체로서는 힘이 없다. 지금의 내 시점에서야 해석되고 의미가 확정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개똥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과거의 상처에 그 책임이 있다. 지금의 내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면 과거의 상처가 발판이 되어줬기 때문이거나, 아예 인식조차 안됐을 것이다. 희극과 비극은 관점의 차이니까. 끝없이 어린 시절의 나를 채찍질하던 나를 반성하는 기회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뭐가 잘한거고, 뭐가 못한건지에 대한 판단은 필요하다. 한번 뿐인 인생 즐겁게 살아야 하지만, 반대로 한번 뿐인 인생이기에 함부로 살 수 없기도 하다. 그러니까 로토와 마틸드가 어떻게 했어야 잘했다고 박수를 받을 수 있냐는 질문이다. 답은 없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아직 인간의 삶에 대한 공식따위 도출된 바 없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플로베르'를 '로런 그로프'로 바꿔도 어지간히 맞아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에게 딱히 위로가 안될 것 같은 기분이군.] 그러면 마지막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알렉산더 포프를 인용해보자. "악덕이란 보기도 싫은 무서운 모습을 한 괴물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보면 친숙해져서 처음에는 참고, 그다음에는 불쌍해지고, 마지막에는 끌어안아 버린다." 인물들의 행동을 하나씩 들춰내 재판정에 세우는 것은 우리의 몫도, 저자의 의도도 아니다. 그저 '로토'처럼, '앤트워넷'처럼 죽어 사라지기 전에, 살아있을 때 그냥 끌어안아 버리자. 인생이란 원래 그런 악의 없는 악덕들의 총체이고, 그 악덕들은 '마틸드'안의 '오렐리'처럼 등을 맞댄 단지 두 관점에 대한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전적으로 용기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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