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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09. 2017

'자기만의 방'을 여성에게 허하라

버지니아 울프 - 자기만의 방

0. 어쩌다보니 또 다시 여성이다. 내가 대체 뭘 말할 수나 있다고 이걸 읽은걸까. 어쨌든 1929년 출간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선 위에 서있는' <자기만의 방>이다.

1. 내 입에서 선뜻 나올 말이 없으니 그녀의 말을 핑계삼아 시작해보자.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 역시 그다지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고 푸념하듯 말한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여러분에게 사소한 부분을 지적하는 의견 한마디, 즉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왜 '돈'과 '자신만의 방'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20C 초반, 인류에 큰 공헌을 하기에 충분히 위대한 지성을 갖고 태어난 어떤 남자를 떠올려보자. 만약 그가 빈곤에 시달려 하루 식사를 때우기도 버거운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래서 자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실질적인 작업을 진행하기 위한 장소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그는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그래서 대학과 연구소 등의 기관에서는 연구자에게 연구기금과 연구실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그는 다른 뛰어난 남성들과 학술적 교류를 맺으며 뛰어난 연구성과를 역사에 남겼다.

반면,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한 여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문학과 과학은 여성에 대해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지만 결국 그들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고, 지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결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편향된 상식을 생산해낸다.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 돌봐야할 식구는 열댓명에 가까워 하루종일 가사노동과 육아에 시달려, 개인적인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자유를 현실적으로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당시는 법적으로 여성의 투표권도,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았기에 당연히 그녀를 위한 또 다른 여성들이 마련한 연구기금과 연구실 따위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그녀의 재능은 발휘되기는 커녕 집밖으로 벗어날 수 조차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됐던건 운좋게도 유산 상속으로 인해 매년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신문사에 구걸해 얻은 잡다한 일들, 이곳저곳에서 열린 당나귀 쇼, 결혼식 등의 소식을 쓰는" 일이나, "편지 봉투에 주소를 쓰거나, 노부인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조화를 만들면서, 유치원에서 어린아이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면서" 부수적으로 돈을 벌어야 했을 것이기에 어려웠으리라고 말한다. "창조에 알맞은 심적 상태"는 그 당시 여성에게 사치 이상의 사치였다는 것이다.


여성이 글을 쓴다면, 그 여성은 가족의 공동 거실에서 써야만 했을 것입니다. (...) 그 시간마저 언제나 방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런 곳에서라면 산문과 픽션을 쓰는 편이 시나 희곡을 쓰는 편보다 쉬울 것입니다. 집중력이 덜 필요하니까요. 제인 오스틴은 죽는 날까지 그런 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녀는 고정수입을 갖게된 이후에야 비로소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말한다. 샬롯 브론테의 소설에서, 다소 느닷없이 등장인물을 통해 여성으로서 삶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드러나 작품의 완결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룩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세기의 여성으로서 사회적 활동을 하기 위해 견뎌내야 했던 비난과 조롱,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와 같이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로서 여성이 '정신적 활동'에 참가하지 못했던 알리바이가 완성됐다. '지적으로 무능력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편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경련과 분노를 눈여겨본다면,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전적으로 표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비틀리고 변형될 것입니다. 침착하게 글을 써야 하는 순간에 분노를 참지 못할 것입니다. (...) 그녀는 자신의 운명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짓눌리고 비틀린 그녀가 어떻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2. 다소 당연하게도 버지니아 울프는 이 결론을 받아 "왜 남성은 여성을 억압해왔는가?"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그녀는 남성들이 여성에 문학, 철학, 과학 등 다방면에서 무수히 많은 책더미를 써냈지만 그것들의 시각이 여성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남성 교수 혹은 작가들이 "여성의 열등성을 다소 지나치게 강조할 때는, 여성의 열등함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에 관심이 있는 것"일 뿐이며, "그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열성적으로 강조하면서 보호하는 것은 그것이 그에게 진귀한 가치를 지닌 보석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그녀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이유를 한쪽을 열등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신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남성이 이끌어온 정복과 지배의 역사는 사실상 '억압된 여성들'의 희생을 동력삼아 발전해왔다.


여성은 수백 년 동안 내내 남자의 형상을 실물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법 같은 달콤한 능력을 발휘하는 거울 역할을 해왔습니다. 여성의 그러한 능력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여전히 늪과 밀림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 문명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이건 간에, 거울은 거칠고 영웅적인 행위 전반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둘 다 여성의 열등함을 그토록 단호하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만약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남성을 확대해 보여 주는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는 왜 여성이 남성에게 그토록 빈번하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지를 일부 설명해 줍니다.

즉, 여성이 남성에게 이 책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거나 이 그림은 인상적이지 못하다는 등 비평을 내놓을 때마다, 남성이 같은 의견을 내놓는 경우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할 때면, 거울 속 남성의 형상은 줄어들기 때문이지요. 그의 생명력이 줄어들 테니까요. 하지만 아침과 저녁 적어도 하루에 두 번씩 실제 자신보다 두 배는 더 큰 모습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남성이 계속해서 판결을 내리고, 원주민을 문명화하고, 법을 만들고, 책을 쓰며, 화려한 옷을 입고, 연회에서 연설을 할 수 있겠어요?

(...) (여성의) 선거권 운동은 남성이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면, 구태여 생각해 보지 않았을 자신의 성과 특징을 강조하게 만들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도전을 받게 되면, 더구나 이전에 한 번도 도전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다면 과도한 보복을 행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어느정도 맥이 닿고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블랙넛'이라는 캐릭터의 근간을 이루는 '찌질함'이라는 속성이 그렇다. 버지니아 울프에 따르면 더이상 "거울 속 남성의 형상"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찾을 수 없게 된 '초라한 남근'이 공론화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블랙넛'의 변주된 형태들을 일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3. 한편으로 최근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에서 생리 묘사로 불거진 여성혐오 논란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일찍이 자신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에서 김훈을 "몸의 일"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천착해온 작가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김훈은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만의 고통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철저히 '타자로서의 여성'을 분리하여 서술한 바 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내 젊은 날의 숲>에서 문제가 된 서술은 남성이 여성의 신체현상에 대해 부주의하게 서술했을뿐만 아니라 신체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에 조차 미달했다는 지적 또한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여성 독자들의 "어처구니 없다"는 의견이 '생리' 논란에 대한 대부분의 반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문학의 차원에서 여성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해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들은 차치해 놓고서라도) 이 대목이 기술적으로 실패했다는 근거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은 여성에 대한 서술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도달한다.

<자기만의 방>에서 이와 연결지을 수 있는 대목이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의 말미에서 의외의 결론을 맺는다. 남성과 여성의 본질이라는 것은 없고 사회적으로 학습된 성별만이 존재한다는 주장 또한 고려할 때는 비판의 소지가 있는 대목이지만, 그녀는 "순전한 남성 혹은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이기에 "사람은 남성적인 여성 혹은 여성적인 남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시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치명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의식적인 편향을 가지고 쓰는 글은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글은 비옥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글은 하루 이틀 동안은 훌륭하고 효과적이며, 강인하고 능수능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해 질 녘이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글은 다른 이의 마음에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 (...) 작가가 전적으로 충실하게 자신의 경험을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면, 온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야만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하며, 평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바퀴 하나라도 삐걱거리거나, 불빛 하나라도 깜빡여서는 안 됩니다. 커튼은 단단히 쳐져 있어야만 합니다.


다소 양비론적으로 읽힐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 태도는, 아마도 양성간의 갈등과 대치는 결국 여성해방의 과정으로서만 불가피하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을 듯하다. 글쓰기에 있어서 결국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이 성별이 됐든, 사회적 관습이 됐든, 경제적 계급의 문제가 됐든, 사람들의 평가 법칙에 굴복하지 않고서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이었으니 '의식적 편향'은 도움이 안되는게 당연하다.

<자기만의 방>의 배경이 여성 참정권 운동이 이뤄지던 시기의 페미니즘을 반영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오늘날의 맥락에서 그대로 읽기에는 부적절한 대목이 눈에 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가 바랬던, 성별의 차이를 유난스럽게 의식할 필요가 없이 서로의 차이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는 최소한 앞서 논의했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역사적 가난, 지적 부자유, 사회적 진출에 대한 제약의 해소가 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체적인 개인으로서의 해방을 향하고 있다. 여성인권의 문제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회복하는 문제에 대해서 절반, 혹은 그 이상의 진실과 맞닿아 있다.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다. 모두의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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