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균, <녹색이념> : 3번 트랙 "입장"
빛의 인도에 따라 이제 배우가 무대로 입장합니다. 제목에서 중의적 의미를 암시하면서 중심주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미리 알아봐 줄 필요가 있겠죠. ‘입장(Entrance)’과 ‘입장(Stance)’이 그것인데, 전자의 경우 연극이라는 전체적인 트랙들의 컨셉 속에서의 의미이고, 후자의 경우는 이 곡 내부에서 진로방향을 놓고 벌어지는 부모와 자식간의 첨예한 입장차이와 갈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새삼스레 이제 성인이라는 말을 여러 번 다른 말로 바꿔가며 반복합니다. “더 이상 비행기 놓치지 않아 길 잃지 않아 이제 어린이가 아냐 / 열두 시간이 넘는 비행이 무섭지 않아 창문을 닫아 오늘은 해가 지지 않아.” 이렇게 까지 반복한다는 건 성인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여전히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그 불안의 원인이 유년시절의 회상을 통해 드러납니다.
벌스 1은 유학 이전의 학창시절, 벌스 2는 유학 시절의 부적응, 벌스 3는 귀국 이후 부모님과의 충돌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다양한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시각적인 몰입감을 높이고, 묘사 안에 장치로서의 상징을 심는 것 또한 잊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의 “오늘은 해가 지지 않아”와 2절의 “태양은 제 갈 길을 가네 열 네 시간 만에”는 비행기가 동쪽으로 운항하면 해가 천천히 진다는 사실을 통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의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냅니다. 이 묘사는 이 곡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시차’의 개념과도 연관을 맺습니다.
“바퀴는 마찰해 주황색 빛이나”라는 표현을 통해 비행기 바퀴가 지면과 마찰하는 순간 그 너머로 일몰이 겹치는 장면을 표현했습니다. (다음 라인에서는 그 ‘주황색 빛’이 서울의 밤을 빛내는 가로등 빛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섬세한 심상의 전환을 볼 수 있기도 하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 합니다.) 하늘에 박혀있던 태양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죠. 이렇게 시간개념에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에 “서울의 밤이 내 아침”이 되었을 때 시차를 적용해 알람을 고쳐주지 않으면, 제 시간에 울리는 알람도 “잘못 맞춰버린 알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알람은 여지없이 잘못 울리고 이 시차 부적응이 낳은 의도치 않은 긴장감은 부모와 자식간의 입장 차이로 확장되는 효과를 낳습니다.
이 곡의 제목 ‘입장’이라는 단어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듯, ‘꿈’ 역시 곡 안에서 부모와 자식의 입장에 따라 두 가지 뜻으로 나뉘어 쓰입니다. 우선 부모가 자식에게 품은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가깝습니다. 능력과 성공에 대한 대강의 대립적인 견해는 ‘붉은 융단’에서 이미 예비되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돈 집안은 시끄러워져”라는 라인과 “집안 사정은 몰라봐 얼마를 버렸나 봐”라는 라인으로 유추해보면,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에도 무리해서 뉴욕 올버니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들만은 번듯한 교육을 받고 돌아와 훌륭한 직장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보는 추측은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반면 아들의 입장에서는 ‘꿈’을 꿀 수 있는 자유라는 건 애초에 부모로부터 ‘박탈당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미국과 한국의 공간 분리는 크나큰 상실의 경험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부모로부터의 강제력이 어느 정도 희석되는 계기가 됩니다. 음악은 가족과 교우관계로부터 충족되지 못해 억눌린 자의식의 표출과 성장의 유일한 창구였으나, “문을 잠가” 놓고서(‘문을 잠갔다’는 표현은 이 앨범 전체에서 중요한 장치로 사용됩니다)야 성립할 수 있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두 ‘꿈’이 동기화되지 못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긴 시간 엇나가게 됩니다. 이윽고 그 균열은 자식이 귀국한 뒤 “이제서야 그 문을 열고 얘기를 시작”하면서 한꺼번에 붕괴하고, 뒤늦게서야 직시하게 된 균열의 깊이만큼이나 가족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셋이 남은 식탁을 벗어나”라는 가사로 미루어 외동아들이라고 가정한다면 부모에게는 더더욱 큰 상처가 되겠죠.
그러나 가사의 표현에 따르면 자식은 처음부터 부모님의 말과 행동을 강압적인 것으로서 마지 못해 받아들여왔던 데다, 인종과 언어의 벽으로 인해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 전체가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상처의 크기는 부모의 상처 못지 않게 심각한 상황으로 묘사되죠. 이 곡에서 김태균의 미국 생활에 대한 묘사는 “자유의 여신상이 보여도 갇혀있는 내가 보여”라는 라인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듯이 시선이 닿는 곳마다 소외와 부자유의 흔적만을 찾아냅니다. 또한 2002년 월드컵이라는 전국민적인 일체감을 느낀 사건 직후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추방된 경험의 낙차와, 부모가 외동아들에게 거는 기대만큼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부담감이라는, 두 상처가 모두 어리고 예민한 그가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결국 그의 ‘꿈’은 음악을 하는 것으로 굳어졌습니다. 이 결심이 부정 당하는 순간 그는 부모님의 아들 외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벌스 1에서 홀로 14시간이 넘는 비행에도 홀로 잠들지 못하고 “단어들이 떠올랐다가 지웠다가”하며 글을 썼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올수록 거짓말로 감춰왔던 진실의 간극이 점점 현실로 다가왔고, 그 불안에 떨며 “무섭지 않아”라며 스스로를 다독인 것입니다. 결국 벌스 3에 이르러 “내가 만든 음악만큼 커진 내 목소리”를 믿고 부모에게 맞섭니다. 그러나 부모 입장에서는 그런 아들의 일탈이 갑작스럽고 일시적인 방황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겠지요. ‘드림(Dream)’과 ‘꿈’이라는, 두 입장의 ‘시차’가 빚은 갈등은 ‘뺨을 때리는 것’으로 폭발합니다. 그래도 부모와 자식 간, 특히 강압적이고 두려운 아버지와의 부정적이지만 공식적인 첫 번째 대화가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벌스 3의 후반부로 보아 이 폭발의 결과는 외동아들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부모님의 마지못한 지원으로 마무리 지어진 듯 합니다. 그러나 “도망가 보았지만 여전히 손바닥 안에 / 난 계속 용돈을 받아”라는 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화해되지 않고 남아있는 감정적 거리감은 김태균에게 부채감과 죄책감으로 남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그저 부모로부터 “인정 받기를”, “벗어나기를”, “사랑 받기를”, “자유롭기를” 바랬던 그에게 우연히 다가온, 그다지 필연적이지는 않았던 ‘결핍으로부터의 수많은 도피책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겁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렇게 망설이기엔 “이미 난 멀리 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생시절 부모님이 전화로 시험점수를 물어본 것처럼 음반은 언제 나오냐는 부모님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며, 후렴의 시작을 “나 언제나 사랑 받기만 했지만”으로 열고 “정말 미안해”로 닫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실제로 그는 “막상 처음 맛본 달콤한 자유에 취해” 시간을 허비하고 친구들과 술에 빠져 하루하루를 낭비합니다. 그의 음악은 부모로부터, 죄책감으로부터 ‘떳떳하지 못한 채’ 여전히 도피처의 역할만을 하며 끝없이 도망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앞으로 “내 음반은 언제 나와”라는 질문은 4번 트랙 ‘이제는 떳떳하다’에서 “일년이면 돼”라는 확신어린 외침으로 유예되었다가, 5번 트랙 ‘보여줄 때’에서 “이제 나와 결과가”라는 선언으로 ‘떳떳하게’ 대답될 것입니다.
P.S) “안된다고 하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다이나믹 듀오 ‘서커스’의 라인을 인용한 것입니다. 본인의 믹스테잎 17번 트랙 ‘Rhymes’에도 사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