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균, <녹색이념> : 7번 트랙 "대마초"
대마초를 안 피워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표적인 다운-필(Down-Feel) 마약이라고 합니다. 감각이 강화되고, 몸이 나른해지고, 기분이 축 가라앉는다는군요. 나름의 격렬한 정신노동에서 오는 피로감 때문인지, 정신과적 차원에서의 개인적 문제 때문인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국내의 적지 않은 예술계 종사자들이 대마초에 알음알음 손을 댑니다. 7번 트랙 ‘대마초’는 이런 대마의 흡연 효과와 그 흡연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곡을 전개해 나갑니다.
릴 보이의 피쳐링으로 곡은 시작됩니다. 후렴의 가사를 보면 ‘허탈감을 느껴 한숨을 쉬는 김태균 자신’과 ‘대마를 흡연하며 연기를 뿜어내는 장면’의 모습을 겹쳐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매분 매 초가 흐려지는 듯”, 그리고 “느려지는 듯”, 두 번째 후렴에서 등장하는 “난 좀 더 차분해지고 싶을 뿐” 등의 서술은 대마의 효과에 대한 묘사이자 김태균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무엇보다도 ‘돈’의 마지막 구절인 “사라져줄게 당신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를 대마 연기처럼 사라지겠다는 가사로 받고 있다는 점을 짚어줘야겠죠.
이러한 이미지를 먼저 제시한 뒤 “나도 옳고 그름은 잘 몰라”라면서 갑자기 지금까지 보여줬던 ‘떳떳한 모습’은 커녕 가치관이 붕괴된 자신의 모습을 던져놓습니다. 서사적으로 어떤 캐릭터가 돋보이기 위해서는 적이 명확하고 강력한 것으로 제시되는 편이 좋습니다. 마치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첨예할 수 있었듯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곳곳에 숨겨진 이분법으로 절단할 수 없는 회색지대를 뜻밖에 발견합니다. 그는 이제 사실상의 판단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그 회색지대는 “법이 다 정답이 아니란 걸 알아”나, “나를 가뒀던 법칙이 깨질 때마다 막상 느꼈던 느낌은 나름 괜찮아요”로 표현됩니다. 이 균열은 의외의 효과를 낳습니다. 물론 스스로가 세웠던 규칙의 붕괴는 뼈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사회적 환경으로서 주어지는 ‘법’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부모님께 안 된다고 배웠던” 법칙 등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던 외적으로 주어진 껍데기도 함께 부서져나갈 조짐을 보입니다. 분명 “겪어보면 괜찮”을 텐데 웃기게도 “우린 사상을 차별”하고, “편견대로 껄렁이고 거만하게” 고정관념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가 이제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법칙에 의한 편견의 위험성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에 따라 ‘떳떳하다’ 캐릭터가 설득력을 잃고 내적으로 파산하게 됩니다. “음악이 가르쳐준 나만의 삶의 법칙” 역시 누군가에 대한 편견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그는 ‘법칙’의 속성으로부터 불합리성을 발견했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인해 수많은 진실이 은폐되고 있습니다. 지난 날의 그였다면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 발언을 해야 했겠지만, ‘쇼미더머니’라는 사건을 겪은 그는 “엉덩일 떼어내야 하지만 앉아 난 피곤하지”의 상태로 주저앉을 뿐입니다. 마치 대마에 취해 둔해진 몸처럼 말이죠.
그를 상처 입힌 현실 논리의 기저에 깔려 있었던 원인은 ‘돈’이었습니다. 돈은 사회 구조를 생산하고 현실 규정력을 갖습니다. 시청률을 위해 악마의 편집으로 그의 이미지를 희생시킨 것은 PD의 행동에 의한 것이지만 그 행동을 하도록 지시한 것은 그가 그 일을 하도록 만든 돈입니다. 기획사가 찍어내는 상업주의와 적당히 영합한 음악 역시 돈에 “깔아 뭉개져 변한 음악”으로 표현됩니다. 이 음악들의 테마는 “신나는 음악 그리고 사랑과 이별”로서 대부분의 경우 예술가의 자아와 개별적 표현이 희생된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이죠. 공감이란 타자와의 소통입니다. 교집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집합 바깥의, 타인에게 번역되지 않는 자신만의 특이성이 다소간 포기되기 마련입니다(Impossum님, "한영혼용 재론"). 그리고 ‘돈’의 강제성은 역시나 “공부하라 얘기하던 부모님”의 압박감을 상기시킵니다. 이 압박감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죠. 여기서 ‘책상’은 ‘부모의 강제’가 실현되는 곳이자 동시에 자신의 ‘음악적 고뇌’ 속으로 침잠하는 공간으로서 제시됩니다. 뒤에 다시 언급될 ‘책상’의 이중적인 속성을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벌스 3에서는 돈과 자신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좀 더 직접적으로 서술합니다. “부모님이 보낸 유학 부모님이 보낸 대학 / 부모님이 소개한 회사들을 벗어나 / 내 신발을 신고 이 길을 맘껏 걸어가 / 이제는 떳떳하다 믿었어 그런데 현실을 봐”까지 드러난 모습은 정확히 ‘보여줄 때’ 까지의 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좇아 갔다가 피 맛을” 보게 되죠. 음악은 사회적 구성물이고, 사회적 구성물이 직조될 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돈’입니다. 때문에 그는 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부모와 사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도망친 음악 역시도 또 다른 강제력인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무력감의 상징으로 제시되던 ‘대마초’가 저항과 일탈의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 것을 요청하고, 스스로를 프로메테우스(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신의 전유물이었던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산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습니다.)로 자처하며 계몽을 위한 희생과 저항의 상징이 되고자 합니다.
여기서 “나는 불을 가져왔지 나의 간은 배밖에 있어”라는 가사는 꽤 복합적입니다. ‘불’은 프로메테우스가 희생을 감수하고 인간에게 전달한 번영의 씨앗이기도 하지만 이후 ‘촛불-최루탄’과 연결되며 시위대의 전복적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하죠. 동시에 ‘간’이 배밖에 있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간을 쪼아 먹히는 신화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겁이 없다는 뜻인 ‘간이 배밖에 있다’는 관용구를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격렬한 벌스는 붕괴하는 ‘떳떳한 자아’의 마지막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촛불만 들어도 내게 최루탄을 던”지는 세상에서 그의 선택지는 사실상 봉쇄됩니다. “깊은 밤이 지나면 해가” 뜰 것이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현실 속 그는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벅찬, 누구라도 지금 손을 잡아줬으면 하는 나약한 상태입니다. 결국 이 곡의 마지막 시퀀스는 ‘날이 밝아오는 것’이 아니라 ‘쏟아지는 도시의 빛’ 속에서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이 흐려지는 영상적 묘사로 처리 되며 끝을 맺습니다.
대마초의 의미를 한 번 더 살펴보며 이 곡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기존의 법칙에 따르면 ‘대마초’는 어쨌든 사회적으로 쾌락과 일탈의 상징이기 때문에 욕망으로 들어서는 입구로서 배치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그는 “고작 삼겹살 한 점에 만족하기엔 모잘”랐던 사람이고, 음악을 위해서 “여자친구는 떠나가 친구는 몇 안 남아”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었죠. 그러나 이렇듯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던 그가 스스로의 무게중심을 잃고 다른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팔짱을 풀어줘 열린 맘으로 받아들여 한번 끄덕여줘”, “날 잡아줘 제발”) 극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8번 트랙 ‘막다른 길’에서 그렇게 싹튼 욕망이 ‘여자’라는 대상으로 확장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