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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Mar 31. 2021

대화의 수심, 종종 오리배, 때때로 잠수함

우리의 대화는수면 위에떠다녀 충분한 산소가 필요치 않았다.


대화의 수심, 종종 오리배, 때때로 잠수함


T와의 대화를 생각하면, 나는 숨이 많이 남았다. 우리의 대화는 수면 위에 떠다녔기에, 충분한 산소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T는 타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  


“내가 어제 회사에서..”

“여기 계정 옷 예쁘지?.”

“응 예쁘네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어제 내가 상사한테 이런 말을 들었는데..”

“여기 음료수 테이크아웃하면 할인되나?”


T는 또한 깊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대화는 그물코의 면적이 넓었다. 말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낚시를 하려고 그물을 드리웠는데 어떤 물고기도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들어 보기 위해 그물을 펼쳐주어도 T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며”

“응”

“왜? 불편한 점이 있었어?”

“그냥. 별로였어”


이런 화제가 싫어서 얘기를 안 하는가 싶어,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T는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받아주지 않았다. 질문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좋아하는 곡을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 노을을 볼 때 떠올리는 것, 최근에 왜 울 것 같았는지?’ 


나는 그런 대화를 통해 수심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대화는 수면 위에 떠있는 우리를 해저 깊이 데려다준다. 몇 가지 질문으로 우리는 잠수함을 탄다. 하지만 T는 수심이 깊어지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응, 맞아, 아니, 그래, 글쎄, 그냥’ 등의 대답을 들으며, 나도 물밑으로 내려가기를 포기했다. 대신 우리는 


‘최근 유행하는 밈, 요즘 애정 하는 뷰티템, 자주 하는 게임.’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T와 함께 있으면 오리배를 타고 둥둥 한강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오래간만에 다 같이 술을 마셨을 때, 여러 번 화두가 된 나의 ‘실패담’이 주제로 떠올랐다. 나의 ‘실패담’을 두고 친구들은 수심 깊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다. 이렇게 했어야지.’ ‘포기하면 편해.’ ‘미련하게 산다.’ 등의 말이 포장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건네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유독 그 주제에는 폐활량이 부족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앞접시에 있는 안주를 뒤적거리는 것뿐이었다. 점차 숨이 막혀 올 때쯤, 오리배를 타고 T가 나타났다.


“야 심각한 얘기 그만하고. 나 너네랑 이거 하려고 사 왔다.”


T는 슬라임을 하나씩 친구들 손에 쥐어줬다. 친구들은 다들 스트레스받을 때 이런 걸 하고 싶었다며 양손에 슬라임을 조물조물거리기 시작했다. 쫀득쫀득한 감촉은 우리를 금세 수면 위로 인도했다. T의 오리배를 타고 우리는 어제 본 펜트 하우스 2와 , 싫어하는 상사 이야기로 돌아갔다.


T가 오리배를 타고 나를 구해 준 일은 또 있었다. 친구들과 다 함께 간 여행에서였다. 마지막 날 호텔 체크아웃 후, 한참 역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숙소에 놓고 온 게 떠올랐다.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친구들에게 고백을 하자. 험한 말들이 들려왔다. 저렇게 얼이 빠졌다느니 등의 핀잔을 들으며 숙소로 향했다.     

다시 돌아서 간 숙소를 밟자마자 T가 신나게 외쳤다.


“다시 여행 온 것 같은 기분 들고 재밌다.”


천진무구한 T의 말에 다들 웃었다. 다들 T한테 좋냐고 물었다. T는 본인이 여기 다시 오고 싶어 해서 내가 원피스를 놓고 간 것 같다는 농담을 했다. 친구들은 한번 더하라고 말했다. T는 죄인이 된 나의 오랏줄을 끊어줬다. 분위기가 밝아졌다. T가 탄 오리배에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가, 겉돈다고 생각했다. 대화란 모름지기 수심 깊이 파고들어 서로를 이해하는 해저탐사형이 즐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T에게 대화는 한강 위에 둥둥 떠다니는 오리배 산책 같은 거였다. 여러 번의 대화를 통해 내게도 숨이 모자란 날이 있고, 수면 위를 부유하는 언어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음을 깨달았다. 오리배에서 건져진 미숙한 잠수부인 나. 내게는 풍량이 나쁜 날도, 폐활량이 가쁜 날도 있음을 알았다. 이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각자의 폐활량과 사정이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한다. 가볍다고 생각한 T와의 대화도 유쾌한 산책이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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