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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Apr 10. 2021

우산이 없어서, 기쁜 하루

아침에 본 오늘 날씨에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 모두들 우산을 들고 걸어갔


우산이 없어서기쁜 하루


붉은색, 파란색, 검은색 앞서서 걸어가는 모든 사람이 우산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확인한 오늘 날씨에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 우산이 없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초조한 마음으로 역에서 내렸다. 다행히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다. 식사를 할 12시쯤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의 불안감이 살짝 옅어졌다.


4시경 동료가 “비가 오네요”라고 했다. 그래도 이후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퇴근시간이 30분 이상 지나 있었다. 퇴근을 하는 길에도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았던 건 아니고, 나는 비를 비껴갔다. 그랬기에 비를 느끼지 못했다. 땅은 비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촉촉이 젖어 있었다. 대중교통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도 물방울 하나 맞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누웠다. 


무거운 몸이 소파에 붙은 듯 푹 어깨가 잠겼다. 요즈음 퇴근 후 몸은 피곤했으나, 머리는 온갖 생각으로 복잡했다. 힘들었던 일들, 피로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몸을 움직일 힘이 없었다. 모기에게 피가 빨리듯이, 쭉쭉 기운을 빨리며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똑같은 서류를 몇 번이고 반복하여 수정하는 일. 그것도 보고서를 낫게 하기 위해 수정하는 것이 아닌, 보는 사람이 계속 바뀌기에 수정하는 일. 타인의 관점을 맞추는 일이 배우는 일이 될 수 있지만, 그저 복사와 붙여 넣기가 반복되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 든다. 것도 몇 년간 하고 있는 일이었다. 


밥을 차리는 것도 귀찮아, 소파에 누워 핸드폰으로 웹툰이나 커뮤니티를 보다 보면 1시간이 금방 갔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또 이렇게 시간을 낭비한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음식을 시켜먹을까, 배달어플을 뒤지다가 겨우 해 먹어야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몸을 일으켰다. 시장을 보러 장바구니를 들고 문을 열었다. 


대문이 묵직하게 잘 밀리지 않았다. 내가 시켜둔 택배들이 그 사이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퇴근 후 내가 잠깐 쉬는 동안 왔다 간 택배였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 대문을 나서자 또다시 소나기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택배 아저씨는 비를 맞으셨겠구나. 아니 누군가는 내가 피한 비를 몇 번 맞았겠구나. 

 

피로에 쌓인 하루였지만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비를 피하는 행운을 겪었다. 나는 바싹 몸이 마른 상태로 지나간 하루, 누군가에게는 소나기가 머리 위로 떨어졌을 것이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오늘 하루의 수많은 행운들이 급작스레 떠올랐다. 

 

오늘 비를 맞지도 않았으며,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어떤 사건사고 없이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수분을 머금은 바깥공기가 내 뺨에 닿으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고마운 하루였다. 나는 기운을 내야지 되뇌며 찬거리를 들고 비가 그친 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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