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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Apr 10. 2021

적어서 다정했던 결혼식

결혼은 남편과 내가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적어서 다정했던 결혼식


20년 8월 말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2.5단계였다. 당시 국가 공공기관 예식장을 예약했는데 코로나 19의 위험으로 10월에 결혼식을 못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누구도 탓할 수 없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괴로운 마음도 잠시 원래 크게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떠올려, 집 근처의 한정식집을 대관하기로 했다. 양가 합친 인원을 50명밖에 초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족끼리 밥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식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미리 골라 두었던 어깨가 드러난 웨딩드레스는 한정식 집과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아쉽지만 취소했다. 


드레스의 안타까움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주만 해도 친구들에게 청첩장을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 친구들에게 청첩장을 줄 수가 없었다. 노아의 방주처럼 50명만 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중 신랑의 손님과 절반의 인원을 나눈다면 각자에게 할당된 손님은 25명이었다. 친척만 헤아려 봐도 초대할 수 있는 좌석이 별로 없었다. 결국 사회를 봐주는 친구 외에는 지인을 초대할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초대를 하기 어렵다는 사과 인사를 건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 곳은 식당이었지만, 시어머님은 너무 식당 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식장을 꾸미는 업체에 연락하여, 간단한 꽃과 버진로드 장식을 하기로 했다. 식당 느낌의 병풍도 치우기로 했다. 결혼의 형식은 유사하게 갖추되, 장소와 형식을 간소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시어머니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됐다. 우리 엄마는 한복을 찾는 날, 눈썰미를 발휘했다. “한복 앞쪽에 있는 장식 꽃이 하얀색이라서, 따뜻한 계절 느낌이 나네요, 다른 색으로 바꿔주실 수 있어요?” 여름 일정에서 한 번 밀린 결혼때문에, 엄마는 꼼꼼히 보고 고쳐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부모님은 동선이 어떻게 되는지, 사진을 어디서 찍는지 등을 꼼꼼히 물어보았다. 심지어 마이크가 유선인지 무선인지, 아니면 마이크 거치대가 있는지도 확인했다. 부모님이 중간에 편지를 읽어주셔야 하는 대목이 있기 때문에 자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신 거였다. 그런 섬세한 안목 덕분에 디테일하게 놓친 부분들을 점검할 수 있었다. 스몰 웨딩에 부모님의 연륜과 시선이 더해지니 더욱 정갈해졌다.


친구와 주변인의 도움도 많이 필요했다. 절친한 친구에게, 사회를 부탁했다. 그녀는 사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나를 생각해 흔쾌히 수락했고, 사회비를 준다는 말은 재차 거절했다. 그 외에도 축가, 도우미 등을 동생과 가족들로 섭외했다.


결혼 당일 아침 일찍, 메이크업 샵에 도착했다. 신경 쓰이는 입 주변 여드름 자국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식당에서 하는 것임도 얘기하자 헤어와 메이크업을 돋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해주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셀프나 스몰일 경우 자신에게 말한 뒤 조언을 구하면 더욱 적극적으로 말해줄 수 있다고 했다. 


화장을 마치고 결혼을 하기로 한 식당에 도착했다. 다행히 날이 참 좋았다. 시어머니가 싫다고 했던 병풍도 예쁘게 흰 천으로 잘 가려졌고, 사진을 찍기 좋은 공간도 이곳저곳에 있었다. 사회를 봐주기로 한 친구도 와서 장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계속 고민하던 부분은 <가족 및 친인척 사진>을 식당 내에서 찍을 것인가, 밖에서 찍을 것인가였다. 안에서 찍게 되면, 예식장이 아니기 때문에 배경이 예쁘지 않을 것을 걱정했고, 밖에서 찍을 경우 친척분들이 다 바깥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식사를 위해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런 부분이 고민되었지만. 사진 작가는 심플하게 정리했다. “오늘 날씨도 좋으니 친척들 다 모시고 밖에서 찍는 게 훨씬 예쁠 거예요.” 계속 고민하던 부분들은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더욱 돋보이게 변할 수 있었다. 


12시가 되어 본격적으로 예식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결혼 영상을 틀었다. 나름 신나는 영상이었는데 하객 측은 조용했다. 신랑과 신부는 함께 입장했다. 서로 마주어 인사를 하고 하객 측을 보니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식당이라 공간이 협소해, 모든 이의 얼굴이 보였다. 50명의 인원, 그와 그녀를 빼고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마치 ‘오페라의 유령’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시위 현장에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기쁜지, 슬픈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식장과 같이 엄숙한 공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많이 떨리지는 않았다. 연극배우가 되었다는 자기 세뇌를 하며 최대한 방긋방긋 웃었다. 그들은 시위대 앞에서 혼인 서약서와 성혼선언문을 읽었다. 이제 부부가 된 것이다. 


위기는 아버지가 딸에게 쓴 편지를 읽어줄 때였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미안하다’ 이런 표현이 편지 속에 있었다.  늘 넘치도록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속상해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편지와 어머니의 시를 듣고 우리는 눈물이 났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때도 울보가 되었다. 자주 보는 광경이었지만, 주인공이 되니 드라마틱 했다. 하객들을 보니 눈 밖에 안 보이지만 많은 분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오랜 단짝 친구도 사회를 봐주면서 코를 훔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그 모든 순간을 파파라치처럼 열심히 찍었다. 마지막 행진으로 결혼식을 마쳤다. 야외로 나가 사진을 찍는데, 다들 단체 사진을 찍고 나간 후에도 연신 구경을 하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하객들이 번거로워 할까 걱정을 했었는데. 모두들 귀찮아 하기보다는 햇살을 즐겼다. 그날만큼은 아이돌이 된 기분이었다. 날씨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한정식집은 간단한 코스요리가 제공되었다. 회, 갈비찜, 국, 전등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모자람 있지도 않은 음식이었다.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겨우 자리에 앉았다. 다들 밥을 먹으라고 떠밀어주었으나 막상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가시는 분들께 인사를 하고, 또 부르는 자리에 가서 인사를 하다 보니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정신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식사가 종료되고 인사도 마쳤다. 식당에 함께 있는 카페에서 하객들은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가진 자리기 때문에 다들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따뜻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분들께도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결혼식 당일 많은 이들은 정신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적은 인원이였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사회를 봐준 친구는 "나도 너처럼 결혼하고 싶더라. 사람들도 서로 집중하는 느낌이었고, 정감 있고 좋았어" 라고 했다. 큰 장소와 많은 인원 대신에 '소박하고 정감 있었던 결혼'이었다. 그리고 이를 만들어 준 것은 주변의 배려였다. 결혼은 남편과 내가 한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의 경험과 연륜, 전문가들의 의견과 시각, 하객들의 배려 이 모두의 힘으로 한 일이었다. 적은 인원으로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고 축하해주었던 다정했던 나의 결혼식. 그 다정하고 따뜻한 날을 평생 잊지 못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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