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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Apr 10. 2021

지나 온 자취집에 보내는 편지

아무래도 저괴상망측한동그라미가 박힌 벽지 때문이다.


지나 온 자취집에게 보내는 편지


아무래도 저 괴상망측한 동그라미가 박힌 벽지 때문이다. 4개월째 월세가 나가지 않는 걸 보며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집주인 아주머니와는 몇 번 논쟁을 했다. 나는 이미 이사를 나가 있는 상황이니 몇 개월치를 드리고 계약 종료를 하면 안 되냐. 아니면 도배라도 해주시면 안 되냐.. 어떤 것도 그녀는 용납하지 않았다. 살지 않는 집에 4개월째 월세를 내고 있으니 마음이 답답했다. 괴상망측한 동그라미 크기만큼 가슴이 갑갑했다.


친구와 통화 중 집이 나가지 않아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통화 말미에 친구는 그래도 우리 거기에 추억이 많았는데 라고 얘기했다. 그 말은 흘려듣고 새로 이사한 집의 짐을 정리하는데 집중했다.


결국 만기가 1개월 남은 상황에서 집이 빠졌다. 아주머니가 본인이 급하니 도배를 한 결과였다. 도배를 하니 금세 집이 빠졌다고 했다. 처음에는 1개월치 월세를 안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막상 복비와 1개월치 월세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지난주 내가 직접 손님을 찾아 계약 직전까지 갔던 일이 생각났다. 아니면 차라리 그냥 내가 몇 개월 전에 도배비를 내고 도배를 빨리 해볼걸 이라는 후회도 들었다. 보증금에서 월세와 복비가 빠지고 들어오니 월급에서 세금을 많이 제하고 받는 듯해 아까웠다. 


사촌이 땅 산 것 같은 마음에 끙끙 앓는데, 문득 남자 친구와 결혼반지를 보러 갔던 날이 생각이 났다. 예약을 하고 가지 않아서 우리는 3시간 동안 가게에서 대기해야 했다. 살짝 보고 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심에 휩싸였다.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이어서 택시까지 타고 왔는데 남자 친구에게도 미안했다.


그러다 네이버 지도에 검색하여 근방에 다른 곳을 찾아서 반지를 보러 갔는데, 예상외로 처음 생각한 곳보다 가격도 괜찮았고 반지의 퀄리티도 좋았다. 결국 우연으로 들어간 그곳에서 계약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아마 첫 번째 곳을 예약을 하고 갔다면 만나지 못할 곳이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후회가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대비와 준비 없었던 날에 행운이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좀 더 집을 잘 내놓아 볼 걸 자책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만은 않는다. 쌍란이 나오는 날도 있고, 내가 깨닫지 못했던 우연한 행운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친구가 말한 ‘우리 거기서 추억이 많았는데.’라는 말이 기억났다. 이전 집은 역을 나와 5분 정도면 도착하는 곳이었고 오는 길에 홈플러스에서 장을 볼 수 있었다. 걸어와 냉장고에 짐을 넣고 밥을 차려서 먹고 문화센터로 10분 정도 걸어갔다. 책을 보다가 운동을 하고, 집에 걸어서 돌아왔다. 평일의 그런 소소한 즐거웠던 날들이 떠올랐다. 


주말이면 유튜브나 영화를 보거나, 글이나 그림을 지었다. 작은 방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했다. 혼자서도, 여럿이도 함께했다. 그런 시간들을 가능하게 해 준 고마운 곳이었다. 그 공간도 나에게 정이 들었을 텐데, 방이 안 빠져서, 돈 때문에 순전히 ‘지긋지긋’하다고 표현한 것이 미안했다.


노력과 결과는 비례하지만은 않으니 후회하지 말자는 생각과, 지나온 나의 추억이 많았던 집을 ‘만기와 돈’으로만 기억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따스하고 다정한 일들이 많았다. 나는 괴상망측한 동그라미 벽지도 예쁜 고래 포스터로 가리고 즐겁게 보냈었다. 그런데 나가고 나서는 그 동그라미를 증오했다. 결국 그 친구는 새로운 벽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사라질 줄 알았다면 좀 더 소중히 여겨줄 걸. 그 집에 새로 온 주인은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랬듯 좋은 추억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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