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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May 09. 2021

나의 빈 박스, 그의 충만한 마음

나는 예전부터 ‘예의는 있는데 예절이 없는’ 사람을 불편해했다.


나의 빈 박스, 그의 충만한 마음


“지금 너무 늦었잖아요..” 


또 마감시간을 지나 기사를 준 그녀에게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 이제 그냥 이 업체와는 관계를 접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늦게 온 기사를 확인하다 또 화가 났다. 오탈자가 많았다. '오탈자 수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벌써 몇번째인가요?' 딱딱하면서도 성난 내 기분을 표현한 메일을 보냈다. 이제 피드백이 오려면 또 한참 걸릴 것이다. 괜히 야근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늦게까지 기다렸는데 일이 엉망으로 되어 더 화가 난다. 메일을 보내고 짐을 싸 퇴근했다.


팀장님은 어제 늦게까지 야근했냐고 물어봤다. 그녀에 대한 불만이 목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내뱉으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팀장님이 말했다.


“그 대리님, 이번 달에 그만둬”


네? 저 때문에요?라고 말할뻔했다. 갑작스레 어제 너무 짜증을 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나 때문에 그만두겠나 라고 짧은 시간에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팀장이 말을 이어갔다.


“많이 아프데.. 휴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하냐 너도 건강 잘 챙기고. 그분께 내색하진 말고.”


어디가 아픈지 구체적으로 듣지는 못했지만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동안 화만 낸 것 같은데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그녀의 병과 나의 짜증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달 말로 그만두었다. 이후 바쁘게 살다가 나는 그녀를 잊어버렸다.


그일 때문만은 아니라도, 이후에는 좀 더 다정하게 말하자고 다짐한다. 시간이 지나 무뎌질 다짐이고, 화가 나면 금세 사라지는 마음이라도 그래도 다정하려고 마음은 먹는다. 하지만 그 ‘다정함의 형태’에 대해 또 고민해 볼만한 일이 생겼다.


아는 사람 중 정말 터프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를 만나도 자신보다 위아래에 상관없이 반말을 섞어서 하고,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밝은 머리색과, 화려한 옷차림, 경중 없는 말투는 내게 낯설었다. 낯설기에 그 행동들이 때로 불편하게 여겨졌다. 


어느 날 아침 갑작스러운 대표의 지시가 떨어졌다. 중요한 VIP가 와서 급하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의 전두지휘 아래 모든 일을 급하게 처리했다. 그는 반말과 손짓으로 일을 빠르게 지시했고 아래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명확하고 리더십 있는 그 덕분에 일은 잘 마무리 되었다. 일이 끝난 후 우리는 식사를 하러 갔다. 그는 식사 후 음식 3인분을 포장해달라고 했다. 아침에 고생한 직원들을 위해서였다. 


"걔네 밥도 못 먹었잖아요." 


나와 비슷한 직급임에도 먼저 직원들을 챙기는 모습이 멋있었다. 빠른 일 처리를 위해 박력있게 일을 하되, 주변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더욱 감동받았던 모습은 직원들의 고충사항을 대표에게 농담처럼 쿨하게 말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반말은 카리스마로, 막무가내적인 모습은 추진력으로 느껴졌다. 


나는 예전부터 ‘예의는 있는데 예절이 없는’ 사람을 불편해했다. 마음은 착하나 표현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내 기준에서 예의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예절은 그러한 마음을 나타내는 행동방식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돈된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 아니면 좀 더 친절하고 살갑게 구는 것, 그것이 회사와 일상생활에서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점점 느낀다. 네모 반듯한 선물상자라도 그 안에 아무것도 없으면 빈 박스에 불과하다. 반대로 얼기설기 신문지로 싸놨더라도, 뜯으면 충만한 정성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그동안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에게 ‘빈 박스’만 건넨 게 아닌가 고민이 된다. 물론 겉면도 내용물도 충실한 게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 위해서는 많이 노력해야 할 듯하다.


이 글을 쓰며 그만두었다던 그녀가 떠올랐다. 급하게 카톡을 뒤져보았지만, 친구에도 뜨지 않고 소식을 알 길이 없다. 함께 일했을 때 차갑게 대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미안하다. 그녀를 만난 이후 나는 빈 박스라도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리더십 있던 동료를 보며 태도가 전부가 아니라, 같이 가는 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먼저임을 알게되었다. 


스쳐 지나는 이와 모두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그래도, 메일을 열어 한자한자 적는다.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로 글을 시작해 본다. 전화를 하며 목소리 톤을 높인다. 내가 오늘 건내는 박스에 안부인사라도 담는다. 비록 작더라도, 비어있지는 않기를 바라며 마음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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