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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May 01. 2021

독서 : 거리를 두며 만난 선배님들


독서 : 거리를 두며 만난 선배님들


토요일 낮 2시, 담배를 입에 문 피곤해 보이는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겉보기에는 무심해 보이지만 눈빛은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빛이 서려있다. 그녀의 목소리를 읽으며 약간 몽롱하다. 여기는 우리 집 소파, 파스타와 식빵을 브런치로 먹은 후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소파에 비스듬히 다리를 뻗고 누워, 책 속 그녀를 만난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내가 아는 누군가의 실루엣을 하기도, 전혀 모르는 새로운 인물로 창조되기도 한다. 토요일 낮의 이 만남은 놓치고 싶지 않은 즐거움이다. 평일이 길었던 주에 맞는 토요일은 더욱 기대된다. 한 자 한 자 음미하는 것은 더운 날 실내로 들어가 에어컨을 맞는 것처럼 서서히 땀을 식히는 시원한 감각이다. 소설 속 인물과 나는 함께 바람을 쐰다.


책은 온전히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게도 해주고, 누군가와 만나게 해 준다. 대인관계가 서툰 나는 책 속 이상한 사람, 부족한 사람, 온전한 사람을 만나며 수없이 얘기를 나눈다. 내 마음대로 거리를 두어도 이해를 해주는 그들에게 책 속 이야기를 듣는다. 


어린 시절에 만난 친구로는 ‘안네의 일기’의 안네가 있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키티’라는 일기장에 일기를 쓰며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 안네를 따라 나도 일기장에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누군가 일기를 보지 않을까 두려움도 느끼게 되었다. 참혹한 전생의 참상에서도 조그마한 아이가 글을 썼다는 게 신기했다. 


중학교 때는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속 주인공을 만나며 에이브릴 라빈 노래를 들었다. 욕조에 파묻혀 에이브릴 라빈의 ‘스케이러 보이’를 듣고 팔을 욕조에 걸친 채 소설을 읽는 건 사춘기의 낙이었다. 엄마는 책 떨어뜨리면 젖는다며 나와서 읽으라고 혼냈다. 그럴 때마다 즐거움이 깨졌던 사춘기 소녀는 소리를 꽥 지르고는 했다. 


대학교 때는 광고 일을 꿈꾸며 박웅현, 이재석 등 광고인의 책을 읽었다. 누구보다 기억에 남는 인물은 ‘박신영’ 님이었다. 지방대 출신에 별다른 스펙이 없었음에도 광고 공모전에서 많은 수상을 한 그녀의 도전을 읽으며 용기를 얻었다. ‘삽질정신’은 나에게 인상적인 책이었고, 이후 사회인이 되며 ‘기획의 정석’ ‘보고의 정석’등도 읽었다. 대학생이던 그녀가 사회인이 되어 언니처럼 조언을 해 주는 기분이었다.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며 책 속 ‘화무십일홍’이라는 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말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니체의 책을 읽고 도덕적 가치를 떠나 ‘자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보면서 재미있는 문체에 유쾌하게 깔깔 웃기도 했고, 일에 대한 고민도 했다. 법륜스님은 ‘행복한 출근길’에서 네가 남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며 출근을 지속하게 해 주셨다. 실패가 계속된다고 생각했을 때 ‘자존감 수업’을 읽었다. ‘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 책으로 커피&북 모임을 시작했다. 


불과 몇 권으로 뽑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책들이 나와 함께 해주었다.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지만 누구보다 든든한 사람들이 조언을 해주는 것 같다. 그들은 세상은 참 넓고, 참 이상하며, 너는 할 수 있다고, 그러니 삶에서 나 자신과 남에게 친절해지라고 말해주었다. 어지러운 일들을 읽고 있다 보면 오늘의 나의 일은 하찮게 느껴지고 좀 더 포용력이 자라는 것 같다. 


한낮에 나는 책을 읽는다. 담배를 비벼 끈 그녀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 몸을 옮긴다. 내 시선도 그녀를 따라간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잠이 서서히 깬다.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지만 흥미로운 오후다. 독서를 하는 이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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