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지 못한 성격으로 사람과 사랑을 지나온 이야기
프롤로그
둔해지라는 말이 제일 힘들었다.
그 말에는 항상 같은 전제가 붙어 있었다.
지금의 나는 틀렸고,
조금만 바뀌면 괜찮아질 거라는 전제.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 사람 같았다.
남들은 다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일을
혼자서만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고치려고 했다.
예민함을 줄이려고 애썼고,
생각을 덜 하려고 했고,
마음이 먼저 움직이지 않게
나 자신을 붙잡아두려 했다.
하지만 끝내 둔해지지 못했다.
대신 늘 지쳐 있었다.
이 책은
예민함을 극복한 이야기 아니다.
예민함을 안고
여기까지 살아온 사람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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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라는 성격
오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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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오예민이 되기까지
어릴 때부터 나는
조금 유난한 아이였다.
계획이 조금만 틀어져도
감정이 먼저 올라왔고,
잠자리는 늘 불편했다.
불을 끄고 누우면
사소한 생각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내일 일정,
오늘 했던 말,
상대 표정 하나까지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됐다.
잠들기까지 오래 걸렸고,
불면은 늘 따라다녔다.
사람들의 표정에 민감했다.
웃고 있는 얼굴인지,
억지로 웃는 얼굴인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잘 알아봤다.
그래서 어른들이
“눈치 빠르다”고 말하면
칭찬인 줄 알았다.
그게 나를 피곤하게 만들 줄은
그때는 몰랐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웃으면서 별명을 붙였다.
성이 오 씨라서,
“오예민.”
그땐 그냥 귀여운 별명인 줄 알았다.
남들보다 조금 예민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설마 그 이름이 내 성격을 이렇게 정확히 설명하는 말일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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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나는 왜 항상 먼저 흔들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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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내내
나는 성격을 고치려고 애썼다.
조금만 참자.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남들처럼 흘려보내자.
이 문장들은
나를 달래는 말이 아니라
다짐에 가까웠다.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에도,
친구를 만나기 전에도
나는 늘 마음속으로 예행연습을 했다.
오늘은 예민해지지 말자.
오늘은 아무 일 없어도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자.
하지만 그런 다짐은
대부분 오래가지 않았다.
“너는 너무 예민해.”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고치려고 했다.
말 한마디에 마음 상하는 것도,
계획이 어그러지면 하루가 무너지는 것도,
괜히 혼자 피곤해지는 것도
전부 내가 유난이라서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노력했다.
둔해지려고,
강해지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웃고 넘길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속상해도 바로 말하지 않는 연습을 했다.
괜히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금 나아진 것 같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사소한 일에 크게 무너졌다.
다 괜찮은 줄 알았던 날,
집에 돌아와 혼자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더 몰아붙였다.
왜 이것도 못 넘기냐고,
왜 아직도 이러냐고.
그때는 몰랐다.
문제는 예민함이 아니라
예민함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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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성격을 고치려다 더 망가졌던 날들
예민함을 고치겠다고 마음먹은 뒤부터
나는 늘 나를 감시했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이 정도로 흔들리면 안 되지’라고 말했고,
마음이 상하면
‘또 예민하게 굴지 말자’고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 단속은 생각보다 집요했다.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눌러둔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거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척했지만
속에서는 계속 쌓였다.
참고, 넘기고, 괜찮은 척하다가
어느 날 별일 아닌 일에
혼자 크게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더 자책했다.
성격 하나 제대로 못 고친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은 다 잘만 사는데
왜 나만 이럴까.’
성격을 고치려고 했던 시간은
결국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더 지치게 만들었다.
예민함 자체보다
예민함을 숨기려는 노력이
훨씬 많은 에너지를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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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예민한 사람의 머릿속은 늘 바쁘다
예민한 사람의 하루는
사건보다 생각이 많다.
말 한마디를 들으면
그 말의 의도, 표정, 분위기를
혼자서 여러 번 되짚는다.
책임이 맡겨지면
가능한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서 미리 시뮬레이션한다.
이미 끝난 일인데도
생각은 계속 재생된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이 질문은
습관처럼 따라왔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예민한 사람은
남들보다 더 많이 느끼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처리한다는 걸.
그래서 피곤하다.
그래서 쉽게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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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이제는 이렇게 산다
지금도 나는 예민하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민해진 나를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거다.
기분이 가라앉는 날에는
원인을 억지로 찾지 않는다.
“오늘은 그런 날”이라고 정리한다.
계획이 틀어지면
하루를 통째로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 하나만 남긴다.
예민한 사람에게
완벽한 하루는 부담이다.
그래서 나는
유지되는 하루를 목표로 산다.
2부. 우리가 멀어진 방식
베스트프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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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베스트프렌드는 감정으로 이어진다
학창 시절,
여자에게 베스트프렌드는 거의 필수였다.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어도
유독 나와 한 팀이 되는 사람.
그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주변이 시끌벅적해도
혼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같이 웃었고,
같이 욕했고,
같이 미래를 얘기했다.
시험이 끝난 날,
별 의미 없는 약속에도
우리는 늘 함께였다.
그땐 몰랐다.
친하다는 건
서로를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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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감정을 원하는 사람, 현실을 보는 사람
그 친구는 늘 감정부터 꺼냈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나에게 그대로 가져왔다.
나는 듣는 편이었지만
위로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럴 땐 네가 잘못한 것도 있잖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어.”
나는 감정에 공감하면서도
현실을 같이 보려고 했다.
그 친구는 그걸
차갑다고 느꼈다.
“그럴 땐 그냥 내 편 들어주면 되는 거야.”
그 말이
우리의 차이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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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예민하다는 말이 쌓일 때
“너 너무 예민해.”
그 말은
항상 같은 순간에 나왔다.
내가 현실적인 얘기를 할 때,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 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나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멈추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수록
나는 한 발짝씩 물러났다.
말을 줄였고,
생각을 숨겼고,
괜히 미안해졌다.
그 친구는 상처를 받았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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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상처를 주고받는 방식이 달랐다
그 친구는
상처를 받으면 바로 표현했다.
울었고,
서운함을 쏟아냈고,
나에게 감정을 요구했다.
지금 당장 이해해 달라고,
지금 이 마음을 받아달라고 말했다.
나는
상처를 받으면 조용해졌다.
거리를 두었고,
혼자 생각했고,
말을 아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그 친구는
내 침묵을 무관심으로 느꼈고,
나는 그 친구의 감정을
부담으로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친구는
“왜 이렇게 냉정하냐”고 했고,
나는
“왜 이렇게 감정적이냐”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만 공유한 채
상처를 다루는 방식은
끝내 맞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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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친하다는 이유로 계속 버텼다
이미 많이 달라졌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대화는 자주 어긋났고,
만나고 나면 피곤했고,
집에 돌아오면 자주 후회했다.
그런데도 놓지 못했다.
너무 오래 함께했고,
너무 많은 기억이 있었고,
‘베스트프렌드’라는 이름이
우리를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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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결정적인 사건은 없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어?”
결정적인 사건은 없었다.
싸우다 크게 터진 날도 없었고,
누가 먼저 선을 넘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작은 불편함들이 쌓였고,
같은 말이 반복됐고,
기대하는 방식이 계속 달랐다.
만나고 나면
괜히 더 피곤했고,
돌아오는 길에
자주 혼자 후회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게
누구를 위한 걸까.
우리는 여전히 친했지만
더 이상 편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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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손절은 선택이 아니라 한계였다
손절이라는 말은 차갑지만
그건 도망이 아니었다.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이해하려는 내가
이미 많이 닳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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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베스트프렌드는 끝나도, 나는 틀리지 않았다
관계를 끝내고
미안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왔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
예민하다는 말을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 선택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3부. 사랑 안에서의 예민함
불같은 여자와 물 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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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불같은 여자였다
나는 감정을 늦게 처리하지 못했다.
느끼는 순간 말이 먼저 나왔고,
화가 나면 바로 티가 났다.
연애를 하면
감정의 폭이 더 커졌다.
사랑을 하면서
나는 늘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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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물 같은 사람을 만났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고,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불처럼 타올랐고
그는 물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 차이는
설렘이었고,
곧 갈등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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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우리는 자주 싸웠다
싸움의 패턴은 늘 같았다.
나는 터졌고,
그는 침묵했다.
나는 감정을 바로 꺼냈고,
그는 말을 고르느라 시간을 가졌다.
그 침묵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얼굴을 보며
나는 혼자 결론을 냈다.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라고,
이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는 거라고.
하지만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늦게 꺼내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 사실을 알기까지
우리는 꽤 많이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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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그는 나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성격 좀 고쳐.”
“너 왜 그렇게 예민해.”
대신 이렇게 말했다.
“지금 감정이 많이 올라온 것 같아.”
“조금만 지나고 이야기하자.”
그 말들이
나를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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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참는다는 건 지는 게 아니었다
참는다는 건
나를 없애는 게 아니었다.
화를 늦게 내는 연습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정리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말하지 않아도
감정은 없어지지 않았고,
조금 기다린다고 해서
지는 것도 아니었다.
연애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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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우리는 서로를 삼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불같고
그는 여전히 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끄지 않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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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에필로그
예민한 채로 여기까지 왔다
나는 끝내 둔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예민한 채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정리하고,
사랑을 배웠다.
예민함은
고쳐야 할 성격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감각이었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안도의 문장이 되었으면 한다.
예민한 채로도
우리는
충분히 여기까지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