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교대

우리는 말없이 자리를 바꿨다

by 정공


프롤로그


엄마는 늘 앞에 있었다


어릴 때 나는

누군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본 적이 없다.


너무 당연했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챙기는 사람,

학교에서 문제 생기면 먼저 전화를 받는 사람,

내가 울기 전에 이미 상황을 정리해둔 사람.


항상 같은 얼굴로

항상 같은 자리에

엄마는 늘 앞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뒤에 서 있는 게 얼마나 편한 자리인지

그때는 몰랐다.



1. 엄마가 만들어준 자존감의 모양


나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이 말은

갖고 싶은 걸 다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실수해도

나라는 사람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게 자랐다는 뜻이다.


엄마는 늘 내 편이었다.

세상보다 먼저

나를 이해하려고 했고,

나를 변명해줬다.


누가 뭐라고 하면

엄마는 먼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애는 그럴 애가 아니야.”


그 말 한마디가

내 등을 얼마나 오래 받쳐줬는지

그땐 몰랐다.



나는 예민한 아이였다.

사람들 표정을 먼저 읽었고,

말 한마디에 하루가 흔들렸다.


그런데 엄마는

그 예민함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만큼 잘 느끼는 거야.”

“아무나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야.”


고쳐야 할 성격이 아니라

가지고 가도 되는 성격이라고

엄마는 처음으로 말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미워하는 법 대신

나를 이해하는 법부터 배웠다.



2. 실패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해준 사람


실패했을 때

엄마는 조용했다.


괜찮다는 말도,

괜히 괜찮은 척하라는 말도

급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너는

여기까지 왔잖아.”


실패를 줄이는 법이 아니라

실패해도

나를 버리지 않는 법을

엄마는 알려줬다.


그래서 나는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실패해도

내 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3. 안내장을 내가 읽는 쪽이 된 순간


어릴 때 나는

학교에서 받아온 안내장을

아무 생각 없이 엄마에게 줬다.


나는 읽지 않아도 됐고

엄마는 늘 다 알고 있었다.


그게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안내장을

내 쪽으로 밀어놓는다.


“이거 뭐라고 써 있는 거야?”

“이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사소한 장면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종이보다 마음이 먼저 흔들렸다.


엄마가 어려워진 게 아니라

내가 커버린 거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4. 아직 젊지만, 예전 같지는 않은 마음


엄마는 아직 50대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제 늙었다’는 나이와는 거리가 있다.


여전히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많고

여전히 하루를 살아낸다.


그런데도

예전과 다른 게 있다.


예전엔 당연했던 말 앞에서

요즘은 한 번 더 멈춘다.

확신에 찬 목소리 대신

조심스러운 질문이 늘었다.


“이렇게 해도 될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아,

이 사람도

늘 강할 수만은 없었구나.


5. 그날, 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온 것뿐이었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큰 사건도 없었다.


엄마가 뭔가를 물었고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엄마 대신 전화를 한 통 더 했고

엄마 대신 한 번 더 확인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그날 밤

괜히 마음이 오래 남았다.


아,

이제는 내가

조금 더 앞에 서 있구나.


엄마는 여전히 엄마였고

나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자리만 살짝 바뀌어 있었다.



엄마가 나를 지켜보던 거리에서

이제는 내가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 있던 시선이

앞으로 옮겨온 느낌.


겁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괜히 짜증이 날 때도 있었고

왜 내가 이런 걸 해야 하나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그래도

그 자리를 다시 엄마에게 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에필로그


엄마가 내 자존감을 키워줬다면

이제는 내가

엄마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싶다.


엄마도 충분히 잘 살아왔고

여전히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는 말해줘야 하니까.


요즘 나는

엄마에게 종종 묻는다.


“이건 내가 할까?”

“엄마는 그냥 쉬어.”


엄마는 가끔

괜찮다며 손을 내젓지만

그래도 잠시

내 쪽으로 물러난다.


그때 나는 안다.

아직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서 있어도 괜찮다는 걸.


엄마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앞에 서 있는 연습을

나는 오늘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