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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Dec 30. 2021

[두바퀴]12/28

내가 올해 가장 잘한 일.

1.

올해는 여러모로 실패한 한 해다. 최종면접의 벽을 넘지못해 결국 취업에 실패했고, 게으름때문에 수업에서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지 못했다. 거기다가 과외비 모아 올 연말에는 제주도, 해외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자, 했던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날 위한 작은 선물도 주지 못했다.

매달 돈을 모으기는커녕 매달 마이너스였다. 12월에는 치과치료, 해외 은행계좌 해지 등 여러 개인적인 업무로 인해 몇십만원씩 깨졌다. 나라는 사람의 유일한 일탈수단인 여행도 못했고, 돈이 부족해 보고싶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챙겨보지도 못했다.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게으르고 알뜰하지 못한 경제습관을 가진 터에 나는 여러모로 실패한 한 해를 살았다.


2.

나름의 핑계를 해보고자 한다. 낯선 공간과 시간, 특별한 활동이 꼭 여행의 전제조건이어야 할까. 결국 새로움이다. 일상을 탈출한다는 것도, 여행을 한다는 것도 결국 단조롭고 똑같은 일상을 벗어나 새로움을 주입한다는 의미 아닐까. 해외여행은 가장 큰 비용을 요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여행'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을 만나는 거였다.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 공간을 찾아가다보면 어느새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항상 말하듯 모든 사람은 하나의 작은 소우주이므로. 내가 속한 집단 밖의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는 목적으로 “어플”을 시작했다. 연애같은 감정의 에너지를 쓰는 활동은 목적이 아니었다. 위험해보이는 사람, 정보값이 너무 없는 사람은 걸렀다. 여행위험지역이나 궁금한 게 없는 여행지는 굳이 찾지 않는다. 특별히 기피한 것은 아니지만 FWB/ONS만 프로필에 써둔 사람도 걸렀다. 섹스가 목적은 아니었다. 난 사람을 통해 재밌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올해 말 9월부터 12월까지 남성분, 여성분을 포함해 10분이 넘는 사람을 만났다. 이중 절반은 두번 이상은 만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 3년의) 장기간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 예술(특히 미술)분야 전공자의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기 주관이 있으면서 배려가 깊은 분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올해 가장 잘한 일이다.


3.

이 중에서 내게 가장 특이한 경험을 하게 해준 친구가 있었다. 크로스 드레서로 활동하는 친구를 만나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이쪽 친구들 몇명을 사귀었다. 젠더나 퀴어에 대해서는 대학시절 내내 관심을 가졌던 분야였다. 강단의 이론을 넘어 현실을 피부로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여러모로 큰 배움, 짜릿함의 기회였다.


“어쩜 여자로 태어났을까”

라는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50% 확률로 여자로 태어났을 뿐”이라는 안일한 나의 생각은 “그럼 우리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남자들은 몇퍼센트의 확률로 이렇게 태어난걸까”라는 지적아닌 지적을 받기도 했다. 성별은 이분법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 나는 이론으로 배웠음에도 현실로 이끌어오지 못했던 것이다.


4.

오늘(12/28)은 크로스 드레서 친구 한명과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 바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 아이 얼굴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끌었다. 지 필요할 때만 발휘되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번호를 받고 약속을 잡았다. 만날 사람은 꽤 만나면서 소소하게 재미난 여행을 하던 중, 이 아이는 내게 지구 반대편을 여행할 수 있도록 해줄 것 같아 설레었다.

점심, 카페, 노래방, 칵테일바, 자취방 등 많이도 먹고 많이도 놀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여행하며 외람되지만 그 사람(여행지)에 대한 인상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오늘 만난 이 친구의 경우는 축축한 홍콩영화같은 느낌이었다. 아비정전 속 장국영처럼 유약하나 고집있는 사람이었다. 적적한 슬픔이 있으나 자신의 즐거움을 꾸준히 추구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도 나를 “배려하는 사람”으로 봐주어서 서로에게 좋은 친구로 남았다. 나는 그 아이에게 화장품, 클렌징 용품을 소개해 주었고, 더 좋은 화장법을 알려주었다. 단지 여성의 몸이기 때문에 귀여운 질투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를 남자라 생각하지 않는 친구와 여사친 케미를 발휘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내 여사친이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둘다 예쁜 롱부츠를 신고 도림천을 걸었다. 역 근처 카페에서 맛있는 타르트를 먹고 담배 한대를 피고 헤어졌다. 2021년 너무 즐거운 여행을 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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