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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May 12. 2021

버닝

하루키 시대가 은폐하는 것.


"하루키로 시작해 포크너로 끝난다."

영화 <버닝>을 본 사람들의 주된 감상이다. 그럴만도 하다. 영화 <버닝>은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태우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 태우기>를 원천 텍스트로 삼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이 애초에 절대 쉬운 작품이 아니다. 하루키는 언제나 그렇듯 난해하고, 포크너는 그보다는 명확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여기에다 이창동은 하루키의 <헛간 태우기>를 기본 셋팅으로 하되, 포크너의 원작, 한국사회의 메타포를 섞은 변주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그러나 단순히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적 재미를 위해 그랬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1. 하루키와 포크너의 세계 & 헛간태우기

모든 각색에는 의도가 있다. 포크너의 원작을 각색한 하루키가 그랬을 것이고, 하루키와 포크너를 각색한 이창동이 그만의 의도가 있었다. 먼저 포크너와 하루키 원작의 가장 큰 차이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다. 포크너 <헛간 태우기>의 세계는 남북전쟁 이후 경제계급 간의 경계가 명확하고, 착취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소작농인 스놉스는 지주 착취 시스템 내에서 돌발행동을 하는 폭력적인 가부장이다. 그는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지주의 헛간을 태우는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지주 중심의 사회에서 스놉스는 계급적 타자일 뿐이다. "헛간 태우기"는 계급적 타자의 분노표출 나아가 저항의 일환이다.


하루키 <헛간태우기>의 세계에는 포크너처럼 명확한 계급 착취가 보이지 않는다.  세 인물이 등장한다. 두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두 남자는 중산층이나 그 이상, 비슷한 경제수준이다. 그에 비해 여성은 다소 취약한 수준이지만, 이들 사이에 경계는 희미하다. 포크너의 소작농, 지주와 달리 이들은 서로 잘 어울려 지낸다.(젊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호기심도 있겠지만.) 인물들은 세상 쿨하다. 분노, 슬픔, 지나친 기쁨도 없는 세계. 하루키의 '공허함'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녀'는 팬터마임을 하며, "없다는 것을 잊는다". 과거의 계급질서와 실체가 부재한 이 세계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인 것이다. 부재의 세계에서 "헛간 태우기"에도 분노, 저항이 없다. 일단 소작농에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남자'로 주체가 바뀌기도 했다. 그 '남자'는 아마 포크너의 소설 속에 "헛간 태우기"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 '남자'가 태우는 헛간은 호기심, 혹은 얕은 권태감에서 비롯한 "유희"의 행위다. "유희"에는 분노나 저항이 없다. 유희는 얇다. 유희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한 "헛간태우기"의 공허함. 하루키는 모든 것이 비어버린 현대사회에 포크너를 이렇게 적용했다.


영화 <버닝>에는 두 세계가 하루키의 세계, 포크너의 세계가 중첩되어 있다. 그 변주는 인물을 통해 일어난다. 기본적인 인물 구도나 스토리라인은 하루키의 원작을 따른다. 해미는 의문의 여성이고, 두 남자가 등장한다. 세 사람은 어울린다. 경계가 없는 듯이. 그러나 이창동은 종수, 벤 두 남자 간의 경제계급 차이를 벌린다. 벤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그대로 데려왔다. 미스테리하다. 그러나 종수는 한국 관객에게 익숙하다. 취업, 미래가 불확실하며,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종수는 하루키의 '나'와 다르다. 계급의 차이가 드러나는 하루키의 세계가 <버닝>의 세계다. 그리고 종수와 종수 아버지의 관계는 포크너의 스놉스 부자의 모습과 유사하다. 종수 아버지도 아버지 스놉스처럼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재판을 받는 중이다. 제 역할을 못하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종수의 현재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한국 계급사회의 현실은 곧 포크너의 <헛간 태우기>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관계성뿐만이 아니다. 종수 아버지가 살던 국가중심주의적인 모더니즘의 시대는 과연 현대시대와 같은 다원화된 포스트모던 사회가 아니었다. 종수가 파주 아버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의 사진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중동 건설노동자, 군인 등 종수의 아버지는 가족을, 국가를 위해 성실히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행정직원을 폭행해 재판에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억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성실한 노동의 댓가가 결국 불합리한 간섭이었다면 그 타겟은 당연히 공무원이 된다. 이것이 포크너의 "헛간 태우기"행위와 가지는 상징적 유사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포크너 스놉스의 헛간 태우기에 소작농의 분노가 응축된 것이라면, 종수 아버지의 헛간 태우기에는 배신감, 분노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결과는 "쪽박"이다.


하루키 '남자'의 헛간 태우기가 알맹이를 상실한 유희에 지나지않는 것처럼 벤의 헛간 태우기도 그렇다.


2. 벤을 향한 종수의 칼날


종수는 아버지를 싫어한다. 벤과 대마초를 피운 후 몽롱해진 상태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다.


종수: “저는요 아버지를 미워해요. 아버지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어요... 한 번 터지면 모든 게 부서져요. 엄마가 나랑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엄마가 집을 나간 날, 내가 엄마의 옷을 태웠어요. 저 마당에 불을 지펴놓고, 아버지가 시켰어요. 내손으로 직접 태우라고. 난 지금도 그때 꿈을 꿔요.”


종수는 아들 스놉스와 유사하다. 아들 스놉스는 마지막에 아버지가 또 지주의 헛간을 태우려 하자 지주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동시에 그는 재판에서 아버지를 고발하는 지주를 "적"이라 여긴다. 아들 스놉스는 거리를 두는 인물이다. 종수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수수께끼 같"다고 느끼고, 어딘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만, 또 아버지처럼 사는 것은 싫은 것이다.


그런 종수가 마지막에 벤에게 칼을 꽂는다. 영화의 미스터리 플롯이 종수가 벤을 의심하는 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확증이 없으면서도 종수는 벤을 의심한다. 결국 종수는 벤에게 칼을 꽂는데, 형태적으로 이 폭력적인 형태는 아버지 스놉스의 헛간 태우기와 유사하다. 경계를 넘어, 상대방을 공격하는 형태. 이를 두고 사람들이 "하루키로 시작해 포크너로 끝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알 만하다.


그러나 형태적 유사성이 그 행위의 상징적 유사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종수 아버지와 스놉스의 분노와 그 대상은 명확하다. 지주중심, 국가중심의 사회에서 이들은 착취를 당했다. 종수는 이러한 시대를 살지 않는다. (벤과 계급적 차이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하더라도 이것이 살해동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이다.)  벤은 종수나 해미를 착취하는 인물이 아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기는 하더라도 그는 종수와 해미와 어렵지않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종수의 분노는 그래서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분노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창동이 하루키의 '나'를 종수로 대체할 때, 계급적 차이를 도입한 것은 설정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두 작품의 상반된 결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3. 하루키의 시대가 은폐하는 것 & 해미.


포크너의 원작과 달리 하루키와 이창동은 여자 주인공을 전면에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인물이 포크너의 소설에 부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머니로, 누이로 등장한다. 존재의 취약함과 함께. 아버지 스놉스가 지주의 저택의 양탄자를 더럽힌 후 말을 탄 사내가 아버지의 집에 찾아와 옥수수 20부셸을 징벌로서 부과한다. 그때 그는 “이곳에 여자들 있나, 당신여자들 말이야”라 언급하며,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징벌은 여성에게 옮겨갈 것이라고 협박한다. 옥수수를 벌금처럼 부과하는 것처럼 여성도 인간적 대우를 받기보다 성적대상화된다. 당대 여성의 취약한 지위를 암시하게 하는 대목이다. 전쟁 같은 소작농-지주의 착취체제 속에 소작농의 여성은 경제적인 취약성은 물론 존재론적으로도 취약하다.


하루키의 소설과 영화 <버닝>에서 경제적, 존재적으로 취약한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는 ‘그녀’와 해미는 사토리스의 어머니와 유사성을 가진다. ‘그녀’는 “광고 모델”로 활동하는 것으로 소설에서 묘사되고, 영화 <버닝>은 이를 해미가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일용직 “광고 모델”로 시각화하며, 포크너 속 여성인물의 취약성, 이들을 향한 사회의 성적대상화 양상을 공유한다.


포크너의 세계, 하루키의 세계, <버닝>의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여성캐릭터가 취약성을 공유한다는 것은 특정한 사실을 암시한다. 공허함, 부재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결코 누군가의 소외, 불평등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주가 없고, 국가의 폭력이 부재한 이 세계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취약함의 영역에 놓여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그에 기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장 한국사회만 봐도 그렇다. 비대면 경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무너지고, 딜리버리맨 등 다양한 직업이 생겨난다. 그러나 '긱 노동자'는 안전, 고용불안의 위험에 놓여있다. 해미도 어지럽게 팽창하는 이 신자유주의의 세계 어딘가에 '숨어 있는' 약자이다. 이 공허함, 부재의 세계가 대놓고 차별, 불평등이 드러나는 과거의 세계보다 위험한 것은 그들은 마법주문처럼 잔재하는 소외, 취약성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라진 뒤, 해미가 사라진 뒤 '남자', 벤은 그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생활을 지속한다.


하루키도, 이창동도 현대사회의 은폐라는 속성을 '공허함'이라는 감성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주인공은 은폐의 증상을 느낀다.


하루키와 이창동의 남자 주인공은 여성 캐릭터에게 부채의식을 드러낸다. ‘나’의 집에 ‘남자’와 ‘그녀’가 찾아온 날, ‘그녀’가 잠이 들어 ‘나’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다시 거실로 내려온다. 스트라우스의 왈츠가 아직 틀어져 있을 때, ‘나’는 갑자기 초등학교 때 했던 연극을 떠올린다. 그때 ‘나’는 장갑 장수 역을 맡았다. 돈이 모자란 새끼 여우가 어머니가 죽을 지경이라고 애원해도 장갑 장수는 매몰차게 여우를 내쫓는다. 애원하는 여우는 취약성을 지닌 ‘그녀’와 유사하고, 매몰찬 장갑장수가 ‘나’라는 점에서 유사한 관계의 도식이 성립한다.


 종수는 해미의 발화를 통해 부채의식을 느낀다. “중학교 때 너가 나 못생겼다고 했잖아, 기억 못하지?”라고 말한다. 더불어, 해미는 벤과 함께 종수의 파주 집에 들러 노을을 바라보며 우물에 빠진 날 이야기를 한다. “아무도 날 못 보면 죽는구나 싶었지. 그런데 종수가 날 발견해서 구출해줬지. 그런데 기억도 못하네?”라고 언급한다. 두 사건을 해미는 기억하고, 종수는 망각하며 살았다. 이는 그 전까지는 종수 또한 하루키의 ‘나’처럼 해미의 취약성을 은폐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과거 은폐의 일원이었던 종수의 '나'보다 부채의식은 더 크다. 그를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다는 종수의 부채의식은 종수에게 영향을 미쳤다. 종수는 사라진 해미를 찾아다니며, 해미의 가족에게, 자신의 어머니에게 해미가 우물 빠진 날에 대해 두 번씩이나 묻는다.


  해미의 취약함에 대한 종수의 부채의식은 ‘나’의 것보다 더욱 강도가 강하며, 종수로 하여금 해미를 찾아다니도록 한다. 해미라는 존재의 부재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벤의 은폐 행위를 더욱 민감하게 인지한다. 그 또한 해미처럼 계급적 타자, 취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판단하지 않는 벤에게는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종수에게는 그 경계가 보인다.


 계급적 타자로 존재하는 종수는 벤이 그냥 던지는 말에도 의심을 증폭한다. 종수는 벤이 언급한 “쓸모없는 비닐하우스”가 해미가 아닐지 의심한다.


종수: 비닐하우스는 어떻게 됐어요?

벤: 물론 태웠죠. 깨끗하게 태웠죠. 태운다고 했잖아.

...

종수: (카페를 나서며) 혹시 해미하고 연락 되세요? 저는 연락이 안돼서요.

그의 의심은 결국 벤의 집에서 발견한 해미의 손목시계와 고양이 한 마리를 통해 비로소 확신이 된다. 물론 충분한 증거는 아니다. 각별한 관계였으니 해미가 떠나기 전 벤에게 선물로 손목시계를 준 것일수도 있고, 해미가 애초에 고양이를 키웠는지 진위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종수는 다시금 벤과 재회하면서 벤과 자신의 경계를 본다. 경계의 세계에서 해미나 자신은 벤과 같은 사람에게 쓸모없는 존재일 것이라는 심증이 불안한 물증을 만나 확신의 칼날이 된다.


 해미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벤은 과거의 해미를 은폐했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며, 곧 해미같은 이들의 취약함을 은폐하는 이 시대다. 은폐의 시대를 사는 종수의 부채의식이라는 증상은 이러한 의심과 합일되며 복수심으로 발현된다. 종수의 칼날이 향하는 곳은 결국 공허함이라는 포장지 아래서 약자를 은폐하는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종수의 분노는 다분히 포크너의 헛간 태우기가 가진 반발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수가 사는 이 시대는 아버지처럼 그 반발의 대상을 개인으로 특정할 수 없는 시대다. 벤은 그 시대를 구성하는 사람 중 한명일 뿐, 이러한 시대를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적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시대가 지금의 우리 시대다. "요즘 시대 젊은이들은 분노를 하지만, 과거와 달리 그 대상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창동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한 말이다. 칼날은 벤을 향했으나 여전히 종수가 불안함에 놓여있는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같은 이유에서 칼날이 "벤"을 향했다는 것은 여전히 개연성이 부족하다. 개인을 향한 종수의 칼날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그런데 무서운 일은 그 개연성 없는 분노가 점점 개연성을 얻어가는 듯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박사장에게 꽂은 칼의 개연성이 엄밀히 말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개연적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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