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물건들을 사고파는 ♡♡마켓을 둘러보다 삼천원하는 버건디 털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뭉치 정도는 부담스럽지 않기도 하고 마음도, 일도 한가하니 잠시 뜨개질 놀이를 해도 되겠다 싶었다. 털실 판매자는 직장을 다니는지 저녁 열시나 돼야 시간이 난다고 했다. 털실을 파는 이가 사는 곳은 차로 15분쯤 가야 한다. 그깟 삼천 원짜리 중고 물건을 사러 가느니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는 게 합리적 생각이겠으나 가끔은 아날로그 감성이 더 사람사는 맛을 나게 한다. 눈을 맞추고 몇 장의 지폐를 건네고 물건을 받으며 서로 감사의 인사를 하는 즐거움! 마음 밑바닥의 아련한 아날로그에 대한 그리움이 불쑥 고개 드는 그런 날이 있다. 자칭 보디가드라 불리고 싶은 한가한 남편을 태우고 털실을 받으러 간다. FM에서 Elton John의 goodbye yellow bric road가 나온다. 우와!!! 순간 차 안은 로맨틱 공간으로 변했다. 운전을 하니 뽀뽀는 할 수 없고 대신 손을 잡았다. 버건디 털실이 주는 보너스다.
약속을 지켜 열 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궁시렁댄다. 예전 같으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때문에 나도 짜증이 났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분명히 아주 알뜰한 새댁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살뜰한 그들을 이뻐해 줘도 시원찮다고 애써 남편을 다독인다. 삼천 원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마음이 어딘가! 십여분 후에 늦어서 죄송하다는 톡이 오고 그로부터 삼 분 후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내 생각대로 젊은 새댁이다. 서로 웃으며 천 원짜리 세장을 건네고 털실을 받았다.
오십 년 만에 기억을 더듬어 뜨개질을 한다. 코바늘을 집어 들자 교본도 없이 어머니께 배운 어릴 적 손놀림이 소환된다. 한 땀 한 땀 살아나는 기억이 신기하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연보랏빛 귀마개를 뜰 생각이다. 이미 성인이 된 딸들은 이런 걸 어떻게 쓰고 다니냐고 핀잔을 할지 모르지만, 뜨개질하는 내내 난 행복할 듯싶다.
딴생각에 줄이, 모양이 삐뚤거린다. 코도 빼먹어 가장자리가 매끄럽지 않다. 한뼘이나 뜬것을 미련 없이 다시 풀었다. 자정이 지나도록 뜨개질 대회의 참가자처럼 씨름을 했다. 애쓴 노력의 잔재는 꼬불거림으로만 수북이 남는다. 공부하는 옆에서 밤늦게까지 뜨개질을 하셨던 엄마는 저녁 아홉 시면 하품을 하는 얼리버드! 자식을 위해 졸린 눈을 부릅뜨다가 나처럼 풀어버린 꼬부라진 실이 얼마나 많았을까! 자기 혼자 잘났다 하고 떠들어대지만 세상은 절대로 혼자 살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어머니 손에는 늘 실과 바늘이 있었다. 코끝 매운 어느 겨울날, 어머니는 연보랏빛 털실로 무언가를 뜨고 계셨다. 뒹글 거리는 나와 부지런한 엄마, 기억 속의 그 시간! 세상 이런 평화가 없다. 열 살 아이의 눈엔 고요한 방안이 신기하게 보였다. 거무티티해진 따끈한 아랫목에 발을 넣는다. 어머니는 무릎에 닿은 차가운 내 발을 조물조물 데워주시고는 다시 뜨개질을 하셨다. 하릴없는 나는 신기한 어머니의 실뜨기를 보다가 몽롱하게 잠이 들곤 했었다.
보랏빛 털실은 봉긋봉긋 꽃 모양을 만들며 예쁜 귀마개가 되어 있었다. 반짝이는 흰 실은 녹지 않은 눈빛과 닮았다. 반나절 걸려 어머니는 내 귀마개를 완성하셨다. 완성되자마자 머리에 두르고 겨울 얼음판으로 나갔다. 썰매를 타며 노는 아이들에게 고개를 쭉 빼고 자랑을 했다. 겨울바람에 코끝은 빨개졌지만 내 귀는 따듯했다. 잘 때도 벗지 않고 귀마개를 하고 잤다.
어머니는 초등학생 딸이 울퉁불퉁하게 떠 내려간 손뜨개를 보시고는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신이 나서 장갑도 뜨고, 모자도 떴다. 찬찬히 무늬를 만드는 법, 벙어리장갑의 엄지 손가락을 나누는 법, 꽈배기 모양을 만드는 것까지 일러 주셨다. 어머니의 칭찬 세례에 나는 진심으로 내 솜씨가 좋은 줄로 만 알았다. 커가면서도 그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칭찬 덕분에 나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다.
지금까지도 칭찬의 힘으로 살고 있다.
털실 한 뭉치로 번건디 귀마개 한 개를 완성했다. 모자랄까 봐 마지막 한 오라기까지 알뜰이 썼다. 큰 아가씨는 좋아라 머리에도 써보고 턱스크처럼 써보기도 한다. 인터넷 주문으로 산 털실로 작은 아가씨것도 만들었다. 두번째 귀마개는 익숙해진 덕분에 좀 더 세련되고 상품가치가 있어 보인다. 요 며칠 동안 딸들이 코기 찬열을 데리고 운동하러 나갈 때 귀마개는 찬바람 막는 필수품이 되었다
오랜만에 저녁 먹으러 집근처 짬뽕집에 갔다. 칼바람 부는 영하의 날씨는 해가 지자 더 춥다. 아가씨 둘이 내가 뜬 귀마개를 하고 나왔다. 엄마가 기분 좋아할 것 같아 쓰고 나왔다고 했다. 내 기분을 맞춰 주려 애쓰는 아가씨들의 마음씀씀이가 따듯하다.
이번엔 버건디색 남편 벙거지를 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