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산 지 35년, 오 년 전부터 그는 수입이 없다. 그래서 거의 집 밖으로 나갈 일도 없다. 사업을 했으니 퇴직금도 없었다. 나는 그가 미안해할까 봐 연신 괜찮다고 했다. 돈을 못버는 남자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지만 그는 다행이도 미안한 기색이 없다. 가끔은 그의 당당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살림 비용만 아내에게 주는 외벌이 남편들과는 달리 이이는 적건 많건 평생 돈을 버는 동안 모두를 내게 주었다. (사업을 할 때는 주자마자 더 보태서 가져가기도 했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뻐해 주기로 했다.
무역 오퍼를 하던 그가 자신의 일을 하면서 남자들만의 거래를 위한 밑밥 까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했었다. 지겨워하는 그에게 오십이 넘어서자 나는 쿨하게 일을 그만두라고 했다. 남자가 못 벌면 여자가 벌면 되니 걱정 말라고도 했다. 그 말에 그는 내심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함께 일을 할 때도 그는 내게 전공을 살려 평생 동안 일을 하는 당신이 참 멋지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내 덕분에 다른 외벌이 남자들보다 여유롭게 살 수 있었다고 고마워 했다.
수리와 컴퓨터에 능한 남자는 하루 종일 알아먹지 못하는 이상한 그림과 숫자놀이를 한다. 책상에 앉지 않고 바닥에 엎드리거나 아일랜드 식탁 구석에서 다리까지 꼬고 거북목으로 컴퓨터를 본다. 가끔은 마련된 책상에 앉기도 하지만 주 무대는 거실이다. 답답해서 하루 종일 도대체 뭘 하냐고 물으면 대답을 하긴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나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거다. 그런 것이 재미있단다. 그는 눈이 열두 개가 달렸는지 모니터만 여섯 개다. 집중력이 끝내주는 그이는 큰 소리가 나거나 말을 시켜도 묵묵부답이다. 평생 그렇게 살았지만 요즘같이 24시간을 한 공간에 있으니 숨이 막힌다. 자는 아기처럼 흔들어 깨워 한참을 정신을 차리게 한 후 천천히 이야기를 해야 알아듣는다. 백세시대라는데 이제 환갑이 지났으니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난감 지경이다.
몸도 말썽이다. 환갑이 지나기도 전에 그의 모든 치아는 이미 말썽을 부렸고 거의 빠진 치아를 2년에 걸쳐 재건하기로 했다. 임플란트 수술을 하고 나면 며칠 잘 씹지를 못하니 당연히 체중과 근육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서너 개의 임플란트를 식립 하는데 수술 후 이주 정도는 제대로 먹을 수 없다. 게다가 운동도 안 하니 다리도 휘청거리고 비틀거리기까지 한다. 그래도 왕년에 농구를 해서 괜찮다고 우겨대지만 그건 35년 전 일인 것을 왜 모를까! 수학은 잘하지만 이럴 땐 내 수학 실력이 더 낫지 않나 싶다. 2년 전엔 백내장 수술도 했다. 백내장 수술이 잘못되어 아직도 두 개로 보이니, 구불거리게 보이니, 말이 많다. 두 눈 모두 수술을 하려 했는 그나마 한 개를 안 한 것이 다행이다.
답답한 것은,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이롭다는 생각은 하고 살지 않는다는 거다. 이젠 고치며 살아야 할 나인데도 여전히 그 면에서는 불통이다.
폐경이되어 여기저기 아픈 나도 청소나 부엌 일등을 나누어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시키면 다 하긴 하는데 일머리가 없어 사고치기를 밥 먹듯 하는것이 문제다. 설명하는 것이 잔소리로 변하기가 일쑤이고 맘에 들지 않아 같은 일을 두 번 하기도 한다. 부엌칼에 손가락을 베이기도 하고 찬찬 치 못해 그릇을 깨고 부수는 선수다. 내가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기도 한다. 어제는 목욕탕에서 넘어졌다. 우당탕 소리가 나고 조용하길래 가봤더니 등짝 두 군데가 벌겋게 상처가 나 있다. 이젠 목욕하는 것도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해야 하나! 어디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지 않았나! 아프지 않냐고 쫓아다니며 묻는 나는 우렁각시 언니뻘이다. 다행히도 뼈는 멀쩡했다.
젊은 시절, 당당하게 "내가 당신을 간택했으니 남은 삶 동안 당신의 인생을 책임지겠소"라고 말했던 치기가 현실이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아기를 받는 일이 직업인 나는 정년이 없어서,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에게 자주 잔소리와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늘 언저리에서 내편으로 서 있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똥을 싸서 벽에 묻혀도 데리고 살 거니 걱정일랑 접어두오~" 누가 누구를 돌보게 될지 몰라도 그런 기간은 짧기를 기도한다. 천천히 가고, 조금씩 줄이며 낯선 노년을 둘이서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