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퇴근길에 FM에서 흘러나온 ' 보헤미안 랩소디!' 단조의 쓸쓸한 느낌의 초반음과 격한 하드락으로 변하는 후반부는 당시 마음 바닥에 눌려 있던 뭔가를 폭발시켰다. 가는 내내 귀가 찢어지게 크게 볼륨을 올리고 펑펑 울며 운전을 했다. 그냥 마구 눈물이 나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쯤, 눈물 콧물 젖은 휴지가 조수석 바닥에 그득했다. 놀이방의 딸들을 만날 때쯤 정신을 차렸다.
내 나이 33살, 딸들의 나이는 7살, 4살, 남편은 외국에 근무 중이다. 혼자 아이들을 살피며 직장을 다니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을 할 여지도, 그렇다고 여유롭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출근하며 놀이방에 아이들을 맡기고 일하는 동안은 잊었다. 퇴근시간이 되면 다시 생각나는 아이들, 뭐 대단한 것을 할 것도 아니면서 빨리 가려고 액셀을 밟았었다. 유일하게 혼자의 시간을 갖는 출퇴근 시간의 FM 라디오 노래 듣기는 그때 유일한 낙이었다.
퀸이라는 그룹만 기억했다. 그 후 찾아낸 그들이 부른 몇 곡은 참 달콤했다. 마니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음악성에 흥분했다. 우연히 같이 근무하던 후배에게 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대단한 것 같다고, 그들의 노래에 위로받는다고 말했다. 며칠 후 후배는 불쑥, 퀸이 부른 노래만을 녹음한 테이프를 내밀었다. 음악을 고르고, 온 오프를 하며 녹음해 온 테이프는 어떤 선물보다 값지고 따듯했다. 출퇴근하면서 약 2년간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노래를 듣고 다녔다. 퀸의 행적을 쫓는다던지 가수의 이름을 알 겨를은 없었지만 내 귀는 그들을 기억했다.
직장을 사퇴하고 남편이 근무하는 마닐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난생처음 주부 노릇을 했다. 밤엔 볼링도 치며 밤새 놀기도 하고, 하루 건너 아이들이랑 백화점 쇼핑을 하는 것은 그동안의 삶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밤, 작은 비어펍에서 다시 퀸을 만났다. 라이브 바의 여가수가 피를 토하듯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르고 있었다. 필리핀 아가씨의 작고 가는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듣는 순간, 지난 몇 년이 파노라마처럼 다시 꺼내졌다.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비어팝의 퀸은 또다시 나를 울렸다. 나의 반응에 남편은 황당해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는 1991년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내가 그의 노래를 처음 접했을 1993년엔 벌써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명곡들을 부른 가수들이 사망한 경우도 많아서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 사실에 아쉬운 마음은 들었다. 하고 많은 병 중에 에이즈라니!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의 노래를 안 지 25년 만인 2018년 그의 자서전적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되었다. 퀸을 좋아했던 열정의 한국인들이 난리가 났다. 나도 빨리보고 싶은 마음에 내심 안달이 났었으니까. 거의 1000만 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았고 현장감을 느낄 수 있게 영화관을 야외 콘서트장처럼 꾸며놓은 곳은 젊은이들로 꽉꽉 들어찼다. 떼창의 대가들인 한국인만이 할 수 있는 창의력의 발현이다. 그렇게 영화관에서 25년 만에 퀸을 다시 만났다. 그가 그런 삶을 살았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퀀과 도플갱어처럼 닮은 영화배우 라미 말렉의 연기는 프레디 머큐리를 그리는 펜들, 내게도 진한 감동을 주었다. 간간히 영화 안에서 나오는 명곡을 들으며 작은 한숨이 쉬어졌다. 그리움이었을까? 앤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무슨 눈물인지는 몰라도 그놈의 찝찌름한 눈물이 또다시 나왔다. 한참을 일어날 수 없었다. 깜깜한 영화관 안은 참 편안했다. 예는 도대체 왜 울까? 변치 않은 남편의 반응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가난한 공무원의 자식이었던 나는 노래를 하고 싶었다. 노래를 배우는 비용은 입이 벌어지게 비쌌고 몇 달치의 용돈을 모아 만든 렛슨비는 결국 두어 달이 지나자 바닥이 났다. 살면서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궁여지책으로 선배 언니들이 레슨 받는 곳에 따라다녔다. 이태리 가곡, 독일 가곡을 부르는 언니들이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지만 지성을 드려 하늘을 감동시킬 끈질김을 갖기엔 부족했던 나를 고백한다. 차선 진로로 간호대학에 갔고 지금까지도 인기 직업인 간호 조산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게 간호 조산사는 진로를 위한 차선책이었지만 아기를 받아내며 아주 많이 행복했고 퀸 노래를 들을 때처럼 가슴 벅찬 눈물을 많이도 흘렸으니 족하지 않은가! 적당한 선에서, 최소한의 갈등으로 맞닥드린 일들을 해결하고 살았다. 자족하는 것이 나의 살아내는 무기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살아낼 삶 중에 음악은 이제 내게 감초이며 비타민이다. 여전히 음악은 나를 위로하고 단단한 것을 말랑하게 하는 촉매제다. 감동의 노래는 여전히 내게 눈물을 선사한다.
사진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