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아이들이 뛰며 시끌했던 설날, 톤 올라간 엄마의 목소리는 평상시 듣던 소리가 아니다. 또다시 부릉부릉 차 한 대가 들어오면 먼저 도착한 집안의 모든 사람이 마당으로 뛰어나가서 오랜만에 얼싸안는다. 부엌 한편엔 과일 상자들이 쌓이고 엄마는 더 바빠진다. 상위에 명절 음식이 하나둘씩 채워지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이 즐거운 어린것들에게 아쉬운 어른들은 덕담을 건넨다. 어린것들은 세배가 끝나기 무섭게 용돈 봉투에 얼마가 들어있을까 하고 구석으로 가서 세뱃돈을 세었다. 형보다 적은 세뱃돈에 삐지기도 하고 눈치 없는 형은 동생보다 많은 세뱃돈에 뿌듯해한다. 형의 존재는 명절 때 빛을 발한다.
세뱃돈을 세어보았던 어린 시절, 복잡한 릴래이를 해야 하는 신혼시절, 정신없는 삼십 대, 조산원을 열었던 사십 대가 지나니 조금 한가해진 오십 대가 왔다.
예전대로라면 딸들이 시집을 가서 아기들이 있어야 할 시절이지만 이 아이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을뿐더러 나 또한 이런 세상에서 굳이 결혼 운운하고 싶지 않다. 돌아보니 혼인 후의 인생은 전쟁이었던 것 같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쓸데없는 전쟁은 이제 하고 싶지 않고, 하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어느 중년의 여자가 자신은 독거노인이 꿈이라고 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아기들은 명절과 상관없이 태어난다. 병원 근무 시절, 선임들은 중요한 날에 오프를 받고 경력 순으로 명절 연휴를 쉴 수 있었다. 겨우 돌아가며 오프를 받을 수 있어서 딸 노릇, 며느리 노릇은 그림에 떡이었다.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드는 것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해내었다. 다행인지 시댁 어른들도 그러려니 하셨다. 세월은 나이를 먹게 하고 명절을 쉴 수 있는 나이가 될 즈음엔 조산원을 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인 다역을 하는 조산원을 열고부터는 사실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날이 명절이고 휴일이었다. 계획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주일 전, 명절을 어떻게 보내면 좋겠냐고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코로나로 5인 이상 집합 금지다. 가족들이 모이는 것도 안 되는 세상에서 명절모임을 상의하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했다. 뭔가 섭섭하다. 궁여지책으로 동생 부부와 광장시장서 녹두 빈대떡과 육회를 먹는 것으로 명절 모임을 대신했다. 종로와 동대문의 기억은 발 디딜 틈 없이 늘 북적였어서 썰렁해진 그곳이 낯설게 느껴졌다. 동대문에서 한양성곽을 끼고 낙산공원을 지나 대학로로 내려와 뒷골목 커피도 마셨다. 동생들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다시 동대문으로 돌아와 동묘 풍물시장에서 오랜만에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여자화장실이 텅텅 비어 있는 걸 보면 그곳은 남자들의 놀이터, 나이 든 남자들의 놀이터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어우러진 내 모습에 나도 이젠 남자도, 여자도 아닌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대수랴!
명절 음식을 먹겠다고 장을 봤다. 올 사람도 갈 곳도 없지만 흉내라도 내야 할 듯하다. 수정과도 먹고 싶고 식혜도 먹고 싶다. 거나하게 둘러앉아 지진 녹두전도 돼지고기에 갖은 야채를 넣어 동그랗게 지진 동그랑 땡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가래떡도 죽죽 늘여가며 조청에 찍어 먹고 싶다. 하. 지. 만
쉬운 것만, 명절 분위기를 낼 것만,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만 샀다. 동그랑땡과 잡채, 떡국이 우리 네 식구 2021년 설날 음식이다.
아침에 둘째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식사 함께할까? 애써 만든 몇 가지를 함께 먹자 했더니 누나 힘들다고 밖에서 먹자고 한다. 나를 위해주는 것도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허전한 마음이 든다. 밤샘 작업을 하는 딸들은 아직 기침 전이다. 아침에 동트면 일어나고 해지면 잠드는 농경의 시대가 아님에도 그 모습을 보려니 가슴이 답답했었다. 사람이 밤에 잠을 자야지, 그래야 건강하지, 제 때에 밥을 먹어야 해!
이런 것은 이제 잔소리다. 얼리버드였던 나도 이젠 새벽 두세 시까지 바스락거리다가 한낮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을 오후 한 시에 먹고 점심은 오후 일곱 시, 밤 열한 시에 저녁을 밤참처럼 주어 먹는다.
자다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니 둘째 동생이 웃는다. 까치까치설날에 열 시까지 잠을 자다니 어메이징이란다. 평생을 새벽 출근 한 그 애들이 보기엔 정말 기상천외할 일인 거다. 괜찮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떡국 국물보다 뭇국이 먹고 싶어서 들통 한가득 끓여 놓았다. 뭇국에 떡 몇 조각, 사온 만두 두어 개 넣어 먹어야지. 한낮 12시가 넘으니 슬슬 배가 고프다.
꼭 떡국이 아니면 어떠랴!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시장이 반찬이고 밥맛 없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라고 하신 엄마가 생각나는 설날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