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산사 이야기
진로를 정해야 하는 고 3이 되었다. 그 당시 여자의 직업으로는 교사, 간호사, 보육교사가 대두되는 시기였다. 학비, 거리, 취업이 잘 되는가가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청년들에게 고민거리다. 우리 학교에는 씩씩하고 당당한 양호교사 선생님이 계셨다. 간호사가 되면 선생님처럼 양호교사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물론 간호사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간호사가 되기로 했다.
내가 정한 학교는 집에서 가깝고 공립학교라서 학비까지 저렴했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벌이로는 그래도 빡빡한 형편이었다. 다행인 것은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나는 80학번 간호학생이 되었다.
2주는 학교에서 학과공부를, 2주는 타지 병원으로 실습을 나갔다. 아침 번 근무를 하려면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다. 안개 낀 어스름한 새벽길의 냄새는 사십년이 지나도 기억난다. 오후 근무인 경우엔 한밤중에 끝나서 막차를 타야만 했다. 간호학생에게 밤 근무는 열외였으니 참 다행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실습을 나간 곳은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분만실이었다. 새벽 다섯 시, 어둑한 거리를 걸어 내려와 전철을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 긴 거리였다. 실습 첫날에는 간호복과 신발, 간호사 캡 등을 들고 가야해서 누가 보면 가출한 청소년 같아 보였을 것이다.
분만실은 병원을 들어가서도 또다시 벨을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특수 파트다.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벨을 눌렀다. 탈의실을 안내 받은 후 새 가운을 입고 간호사 켑을 썼다. 머리는 단정하게 보이도록 물을 묻혔다. 탈의실 문을 열고 나가면 아기를 낳는 곳이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연차가 있어 보이는 조산사의 오리엔테이션을 들었다. 이 곳 저 곳을 안내 받는 동안 어디선가 산모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기를 낳고 있는 산모가 있었다. 실습 첫날부터 출산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흥분이 되던지. 처음 보는 분만실은 조용한 듯 하면서 부산스러워 보였다.
한 산모의 출산이 임박했는지 침대 째 분만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간간히 들리는 신음과 한숨 소리는 그녀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기에 충분했다. 우리도 분만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소독포가 오염되지 않도록 멀찌감치 서서 출산을 지켜보았다. 산모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학생 신분으로는 가당치 않았다.
산모의 몸이 초록 색깔의 소독포로 덮혔다. 아기가 나오는 곳만 환하게 무영등이 비춰지고 있다. 간간히 산모의 신음 소리만 들린다. 누군가가 산모의 다리 앞에 섰다. 아마 의사 선생님인 듯 했다. 산모와 똑같은 초록 까운을 입고 간호사가 건네주는 소독장갑을 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산모의 다리 사이에 까만 것이 보였다. 아! 아기의 머리다! 고요해지면 다시 들어갔다가 힘주는 소리가 들리면 까만 것이 또 보였다. 분만실의 모두는 구령을 부치기 시작했다.
숨 들이쉬고! 숨 참고! 하나, 둘, 셋, 넷! 좀 더! 좀 더!
아주 잠깐 사이, 의사의 손에 아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신비한 순간을 무엇이라 표현할까! 사람의 몸에서 조그만 사람이 나왔다.
신비를 느끼는 사이 출산에 충격을 받은 우리 조의 한 명이 쓰러져 버렸다. 에잇! 친구를 의자에 옮겨 눕히고 얼른 분만실로 다시 들어갔다.
주치의가 회음을 봉합하고 있는 동안 아기는 신생아 테이블에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숙련된 조산사는 빠르고 정확하게 손목과 발목에 이름표를 달았다. 탯줄을 적당한 길이로 자른 후 소독도 하였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얀 면포에 싸인 아기는 그때서야 엄마와 처음 만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기는 바로 신생아실로 가버렸다.
출산을 보는 내내 흐르던 붉은 피는 무섭다거나 더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숭고한 어머니의 피를 보고 부정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여자가 대단해 보였다. 분만실에 근무하는 조산사 선배들도 자랑스러웠다. 문득 간호사 면허를 받으면 바로 조산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1983년 간호사 국가 고시에 합격한 나는 48033번째 대한민국 간호사가 되었다. 신규 간호사가 된 대부분의 친구들은 병원에 취업을 하였지만 나는 내내 벼르던 조산사 수련에 도전했다.
“그렇게 체구가 작아서 어디 조산사 노릇을 할 수 있겠나?”무섭게 보이는 덩치 좋은 여자 원장님이 준 질문에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당찬 대답에 면접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두셨다. 며칠 후 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밤 낮 없이 고된 조산사 수련이 시작되었다. 산부인과 병원 삼교대를 하며 오후 세 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야간 근무를 하고도 수업에 참여했다. 하품이 절로 나오고 눈꺼풀은 자동으로 내려왔다. 제일 좋았던 것은 오후 근무 중에 수업을 듣는 것이었다.
의사의 지시 없이 독립적인 출산을 돕는 조산사가 된 것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힘든 교육 과정은 충분히 보상되었다.
조산사 수련 중이던 1983년 난생처음 아기를 받았다. 조산사 수련의 꽃인 first case! 의사와 분만실의 모든 스테프와 나와 함께 수련을 받고 있는 수련생 서 너 명이 분만대를 둘러싸고 나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보고 있다. 의사가 회음 마취를 하고 이어서 회음 절개를 한 후 내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내가 아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긴장한 나의 심장 소리가 벌떡거린다. 숨이 막힐 것 같아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그 사이 아기의 머리는 진통에 따라 몇 번을 들락날락 했다. 내 심장이 더 난리를 쳤다. 아기의 머리가 나왔다. 침을 한번 꿀떡 삼키고 아기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head down' 아기의 위쪽 어깨가 나온 후 ‘head up' 아기의 아래 쪽 어깨가 나오자 미끄덩하고 몸통이 나왔다. 왼 손으로는 아기의 두 다리를 꽉 잡고 오른손으로는 아기의 머리를 받쳐주었다. 머리를 받친 오른 손을 살며시 놓아야 겸자로 탯줄을 잡을 수 있다. 두 개의 겸자를 왼손 새끼손가락에 걸고 오른손으로는 재빠르게 가위를 잡아 탯줄을 잘랐다. 그저 아기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꽉 잡는 것에 온 정신을 쏟았다. 아기가 버둥거려서 산모의 상태를 살피는 일은 생각 할 수 없었다.
조산사는 도와주는 이가 없을 때 홀로 아기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아기를 받을 수 있도록 혼자 아기를 받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예야 아기 떨어뜨리지 말고 정신 차리고 아기 받거라 ‘어머니는 근무를 하러 나가는 내게 늘 이 말씀을 하시곤 했다.
첫 출산을 마친 나는 함께한 산부인과 의사와 분만실 스테프, 수련생들과 함께 피티를 했다 모두들 나의 첫 아기 받은 일을 축하해주었다. 봄의 분만실, 여름의 신생아실, 가을의 병실 ,겨울의 외래근무를 마쳤다. 수련 1 년이 꿈같이 흘러갔다.
1984년5월, 대한민국 조산사 면허번호 5862, 김옥진은 대한민국 조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