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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Oct 20. 2023

시인과 가을햇살

홍천 텃밭일기

누가 가을 아니랄까 봐 바람이 분다. 여름의 열기는 더 이상 머물 곳이 없다. 대추 나뭇가지는 가벼워졌고 초록 물결은 서서히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다. 보름 만에 들어온 시골은 구석구석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집 데크는 길가와 마주하고 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우리 집을 훤히 들여다본다. 지어놓은 집을 샀으니 방향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지만 늘 신경이 쓰인다. 뭔가 가릴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고민을 했다.


삼 년 전에 데크에 온실을 만들었다. 없을 때 보다 훨씬 아늑해졌다. 데크 안은 사계절이 오고 간다.


겨울, 머리맡에 눈이 내린다. 사뿐히 내려앉는 눈이 어느새 장작불 온기에  물방울이 된다. 수만 개의 눈은 그렇게 쌓이고 녹는다.

타닥타닥 장작이 몸을 불사르면 고구마를 구워 먹을 차례다. 군고구마 냄새에 침이 고인다. 하릴없는 나른한 겨울데크다.


봄,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은 여전히 매섭다. 데크의 창들이 겨울바람처럼 덜컹거린다. 속살까지 파고드는 봄바람을 맞으며 어디 새싹난 곳이 없을까 하고 언 땅을 살핀다. 온실의 식물들은  한동안 더 이곳에 머물러야만 한다. 어설픈 식물 지기의 조급함에 많은 화초들이 세상을 하직하곤 했다. 바람 잦은 봄날의 온실은 새싹을 기다리며 두근두근하다.


여름, 한 여름의  쏟아지는 소낙비를 본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합창소리처럼 웅장하다.

구름을 보며 얼마나 비가 올지 가늠하는 내기를 걸기도 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한다.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 주신 호박 부추 부침 냄새에 깨어나고 싶어 진다. 여름 땡볕은 밭에 심어놓은 야채들과 심지 않아도 씩씩하게 자라는 풀들이 키 크기 내기를 한다.

데크온실엔 해진 후에나 들어갈 수 있다.

여름 온실에는 개구리도 들어오고 동네 고양이의 별장이 되기도 한다.

온실 벽을 타고 오른 넝쿨식물 덕분에 여름의 온실은 초록으로 덮인다. 동네 사람들은 덩굴로 덮인 데크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술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꼭꼭 숨어 있는 두근거리면서도 포근한 마음이 여름데크의 절정이다.

밖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오이와 호박, 작은 미니 수박들은 온실 안에서 쉽게 발견한다.

꽃을 피우며 담을 타고 오르는 아기 넝쿨은 시계방향으로 돈다. 꽃이 진 끝에는 손톱만 한 오이가 얼굴을 내민다. 삼일만 지나면 따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란다. 도대체 식물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가을, 하나씩 거두어 데크에 널어놓는다. 차곡차곡 먹을거리를 모으며 부자가 되는 가을. 오이에 이어 강낭콩이 북새통으로 자라났다. 창문 틈새로 기어들어온 녀석은 개구쟁이임에 틀림없다. 누렇게 익은 것도 있고 늦둥이처럼 이제 꽃을 피우는 것도 있다. 얼른 따서 보관을 해야 하는데... 고구마 한 줄은 나를 좋아하는 초등 친구를 위해 남겨두었다. 다음 주말이 기다려진다.


나는 지금 가을 햇살에 혼이 빠져 있다.

시인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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