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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Oct 08. 2023

백일동안 꽃을 피우는 백일홍

일상

담장에 백일홍이 지천이다. 백일홍은 더위가 지쳐갈 때쯤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늦가을까지 끄떡없이 피고 진다. 꽃잎도 튼튼해서 가을 태풍에도 꿋꿋하다.

작년에 시장에서 백일홍 꽃씨를 천오백 원을 주고 샀다. 겉봉투에는 50 립의 꽃씨가 들어있다고 했다. 상토를 꽃밭에 뿌리고 씨앗을 심었다. 씨앗 크기의 세배 정도 흙을 덮어준 후 싹이 나길 기다렸다. 어느 날, 꽃샘추위를 이기고서 동그란 떡잎이 나왔다. 한두 개가 싹을 틔우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내기하듯 떡잎들이 솟아났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기 잎사귀가 두 번째 잎을 내밀었다. 비슷해 보이는 식물들의 떡잎은 두 번째 잎을 틔우며 고유의 모습을 나타낸다. 맞다. 이렇게 생겼었지.

어릴 적 우리 집 꽃밭이 떠올랐다. 봄이 오면 동생과 나는 아버지와 함께 여러 가지 꽃씨들을 뿌렸다. 우리는 서로 꽃씨를 뿌려보겠다고 티격태격했다. 아버지는 사이좋게 한 가지씩 돌아가며 뿌리자고 타이르셨다. 작은 소란들은 매번 그렇게 정리되었다. 삐뚤빼뚤 글씨로 씨앗들에게의 이름표도 써 붙였다. 턱을 괴고 날마다 꽃밭을 쳐다보던 나날들이 있었다. 싹이 틔워지는 감격을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이지 싶다.


작은 꽃씨봉투가 주는 기적 같은 선물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노랑, 주홍, 꽃분홍색의 꽃들 덕분에 꽃밭이 풍성하다. 특히나 아침이슬이 사라지기 전 꽃밭 사이를 걷는 것은 어떤 명상보다 황홀하다.


서리가 내리기 전 빛바랜 꽃들을 거두었다. 꽃 하나에서 수십 개의 씨앗이 여물었다. 채 거두지 못해 땅으로 떨어진 꽃송이는 계절을 잊고 또 다른 떡잎을 내어 놓기도 했다. 겨울이 오지 않으면 또다시 꽃을 피울 텐데... 화분에 옮겨 심어 집안에서 꽃을 피워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가 금세 마음을 접었다.

역시 백일홍 꽃은 뜨거운 여름의 햇살 아래 있어야 제맛이다. 쏟아지는 여름비를 맞아야 빛이 난다. 알곡 익는 따가운 가을빛에 여물어야 단단하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백일홍을 그 계절, 그 자리에 두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두어진 백일홍 씨앗은 박스에 한가득 모아졌다. 축축하면 썩어버리므로 겨우내 짧은 겨울 햇빛을 만나게 했다. 사실 너무 많아서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설레는 봄이 오고 드디어 눈이 녹았다. 뒷밭 20미터 되는 담장 아래 씨앗을 심었다. 뽀글거리고 땅을 헤집은 떡잎이 햇살을 만나고 또다시 잎을 키워냈다. 줄기가 생기고 삼십 센티 정도 키가 크니 꽃봉오리를 창조했다. 제일 처음 핀 백일홍은 미색이다.


차고 넘치는 백일홍 꽃밭은 가을이 와도 여전히 만발하다. 이번엔 씨앗을 받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제자리 보존하고, 겨울바람을 이긴 후 싹을 틔울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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