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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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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Apr 20. 2024

꽃길 따라 태어난 야호

산파일기

서른여덟 살인 산모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난생처음 진통이라는 것을 느낀 산모는 몇 시간이 채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궁금증이 폭발해져서 조산원으로 왔다. "이 정도면 언제 아기를 만날 수 있을까요? 혹시 며칠 동안 진통을 하면 어떡하죠? 뭔가 분비물이 나왔어요. 이건 뭘까요? " 끝없는 궁금증은 간단하고 짧은 진찰로 조용해졌다.


 "에고, 간신히 1cm가 열렸네요." 산모는 진득이 견디지 못했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기를 자연스럽게 만나려면 기다려야 한다는 만고 불변의 이야기를 또다시 건넸다. 지금은 새벽 두 시, 정신이 맑아져서 잠을 잘 수나 있을까? 이것저것 다시 아기 받을 준비물들을 확인하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아침이 밝아온다. 밤새 뒤척였던 산모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조산원으로 왔다. 보나 마나 뻔할 것이지만 또다시 진찰을 했다. 빡빡하게 손가락 하나가 들어갔던 새벽 두 시보다는 자궁경부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이젠 넉넉히 한 손가락이 들어간다.


밤새 겪은 진통은 진진통이 아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산모는 솔직이 느긋한 진행속도가 야속하다.

  "아침 맛있게 드시고요. 잘 먹는 사람이 아기를 잘 낳아요. 오전엔 좀 더 주무시고 진통이 세지면 자연히 깰 테니 그때까지 간간히 휴식을 취하세요. 사실 푹 주무실 수는 없을 거예요. 끝이 없을 것 같지만 아기를 만나는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러면 '끝'이 나지요.

그리고, 진통으로 죽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으니 걱정일랑 꼭 붙들어 매세요"

"아! 이제 조금 알겠어요. 진통이 어떻게 오는지를요. 정말 죽을 것 같다고 느껴지면 올게요. 아자! 힘내자!"  스스로에게 용기를 준다.

나보다 큰 그녀를 가슴에 안아주었다. 허리를 굽히고 내게 안기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뱃속 아기에게도 용기를 건넸다.


'그저 순리데로 애쓰거라.'


나이 많은 노산의 출산의 답은 정해져 있다.


'기다리는 것!'


열 달을 기다렸다. 며칠을 못 기다릴까.


처음 출산 상담을 하러 왔던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꼭 선생님이랑 아기를 낳겠어요. 다른 곳은 갈 생각 없습니다. 제 아기 꼭 받아주셔야 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잘 견디고 아기를 만날 테니 꼭 저의 조산사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입술에 힘을 주어 말하는 그녀의 말에 나 스스로도 뭔가 모를 각오를 다지게 했다. 내가 뭐라고 그런 약속을 할까. 수많은 경우의 수를 모두 버리고 한 말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응급상황으로 후송을 해야 하는 상황을 단 하나도 생각지 않는 그녀의 주장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었다.


저녁노을이 질 때쯤에도 아침과 같았다. 우리 모두는 다시 각오를 다졌다. 평생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지만 서서히 걱정이 올라온다.

왜 진통이 지지부진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답은 정해져 있다.

"노산은 가늘고 길게 진통이 온다."

아기를 빨리 만나려 서두르는 출산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두 생명 모두는 안전하다. 조산원을 열고 이십 년 넘는 경험에서 터득한 지혜다. 교과서엔 노산에 대한 데이터가 많지 않다.

진통이 오고 간 지 3일 차인 오늘, 출산을 향한 변화가 없다면 병원으로 가야 할까를 고민했다. 부부에게 경우의 수를 설명했다.


산모는 견디겠다고 했다. 또다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오고 가는 진통과 함께  나도 함께 견딘다. 비를 맞은 벚꽃이 내려앉듯 시간이 흐르면 태어날 아기, 서둘러서도 느긋해서도 안 되는 지금 이 시간. 그저 산모의 곁에 머물며 용기를 내도록 돕는다.


다행히도  이른 오후부터 지금껏 겪어보지 않은 진통이 오고 있다. 오후 네시, 자궁문이  5cm나 열려 있다. 아기는 결심하듯 세상을 향하고 있다. 조금씩 보이는 변화는 이제 막 봄을 지나 여름으로 향하는 연둣빛 새싹이다. 아! 고비를 넘었다.


산모의 남편은 이틀간 아내 곁을 지키며 함께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얼굴에 피곤이 가득해진 남편에게 밖에 나가 꽃구경으로 기분전환도 하고 식사도 하시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 세상 어느 꽃이 멋져보이며 목으로 밥이 넘어갈까마는 더 애를 쓸 내일을 준비하게 돕는 것도 중요했다. 서너 시간 후 들어온  남편의 손엔 아내가 좋아하는 프리지어 두 다발이 들려 있었다. 멋진 남편!!!

진통이 사라진 아내가 함박 웃는다. 웃음 끝에 또다시 진통이 온다. 꽃향기 속에서 우리는 걷고, 앉고, 춤추고 흔들면서 아기를 기다렸다.


남편은 자자연스레 안과 밖을 들락거렸다. 그의 표정은 평화롭게 바뀌었다. 남편이 자리를 뜨면 산모는 더욱 진통에 집중했다. 막바지에는 들어오시라 할 때까지 봄을 구경하시라고 권했다.

벚꽃을 보며 남편은 나와 똑같은 기도를 했을 거다.

'건강히 잘 만나자, 고마워, 사랑해...'


저녁 8시, 자궁문은 8cm가 열렸다. 진통실에서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진통 사이사이 부르는 허밍 노래는 산모의 긴장을 멀리 보내버린다. 들라 선생님도 함께 부른다. 이중창은 그 어떤 소리보다 달콤하다. 힘내라 아가야, 힘내세요 그대여!


힘을 줘야 할 시기가 왔다. 밖의 남편을 부르자 뛰어 들어온 남편! 아내의 근처에 머문 그의 따듯한 마음이 느껴졌다.


출산방의 다섯 사람 모두가 힘을 쓴다. 아기 낳는 이, 아기 받는 이, 최고의 남편, 전문적인 들라. 그리고 최고로 애쓰고 있는 아기야호!!!


10시 13분, 3.6킬로의 건강한 야호가 세상으로 나왔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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