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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꽃과 함께 춤을

어설픈 전원생활

by 김옥진

본잎은 떡잎을 비껴 자란다. 뿌려진 모든 씨앗이 발아했는지 숲속 길처럼 빽빽하다. 아침이슬도 먹고 초여름 비도 만난 데이지 잎은 길쭉한 모양으로 무럭무럭 자랐다. 이제는 제각각 살 터전을 정해 이사를 가야 할 시기가 왔다. 꽃밭은 이미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꽃들로 가득해서 데이지가 차지할 땅을 찾아야 했다. 메리골드가 피어났던 꽃밭 한편에, 오가피나무 아래,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데이지를 심었다. 땅이 바뀌어 몸살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옮겨간 이후 며칠 동안 열심히 물을 주었다.


여름 내내 데이지들은 잘 자랐다. 너무 풍성한 것들은 다시 나눠 심기를 했고 슬쩍 영양제 몇 알도 뿌렸다. 어디서나 꿋꿋이 퍼지는 쑥처럼 데이지도 짙은 초록색을 띠었다. 한여름엔 뱀이 숨어 있어도 모를 만큼 무성하게 자랐지만 꽃대는 올라오지 않았다. 여름 땡볕에 앉아 무성한 데이지 숲을 뒤지길 수십 번 하며

실망했다.


화살나무에 단풍이 앉고 논의 벼들도 누렇게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포천서 얻어온 구절초가 폈다. 하늘거리는 흰색 구절초 꽃은 가을바람에 흩날리며 3주가 넘도록 꽃밭을 지켰다. 데이지는 더 이쁠 텐데. 다른 꽃들의 향연은 성에 차지 않았다. 벼를 베는 소리가 들렸다. 초록의 논은 갈색으로 변했고 가을이 깊자 서리가 왔다. 서리맞은 고구마 순과 호박잎은 하룻밤 사이에 할머니 뱃가죽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내 사랑 데이지만 계절이 가는 것에 아랑곳 않고 여전히 이파리만 무성했다. 서리에도 꿋꿋했지만 어느 날 계속되는 찬서리에 폭삭 주저앉았다. 봄부터 시작된 데이지 바라기는 결국 흰 눈이 오는 날로 종지부를 찍었다.


데이지는 왜 꽃봉오리가 올라오지 않았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거름을 너무 많이 준 탓에 그저 잎만 무성히 자랐던 것일까. 눈 내린 겨울 꽃밭을 서성이다 눈 속에 파묻힌 바랜 데이지 꽃씨 봉투를 발견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설명서를 다시 읽었다. 띠리리! '첫해에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월동을 하는 식물입니다' 바보가 따로 없다. 나는 다시 올 봄을 기다리기로 했다.


봄맞이로 겨우내 지폈던 난로에 재를 치운다. 다시 올겨울을 위해 난로에 기름도 먹였다.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서리가 내리지만 힘센 풀들은 양지에 드문드문 고개를 든다. 상사화 싹과 며느리밥풀은 추운 날씨에도 봄의 첫 전령사 노릇을 한다. 친구가 분양해 준 할미꽃도 털을 소복이 입고서 땅을 뚫고 나왔다.


누렇게 말라버린 데이지 잎사귀 사이로 아기 데이지 싹이 올라왔다. 하루가 다르게 초록의 잎사귀 군단이 솟아났다. 4월 말, 드디어 아주 조그많게 꽃대가 올라왔다. 물론 꽃망울도 맺혔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새싹 군단을 헤집었다. 여기도, 저기도,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들이 줄기 끝에 맺혔다. 드디어 오매불망했던 데이지 꽃을 볼 수 있다니! 꽃망울이 천지에 터질 날은 언제일까. 팥알만 한 봉우리가 콩알만큼 커지는데 일주일, 콩알 크기의 봉우리가 엄지손톱만큼 크기까지도 일주일이나 걸렸다. 꽃잎을 감싸 안은 꽃받침은 도대체 얼마나 힘이 세길래 꽃잎을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때가 되지 않은 아기는 예정일과는 상관없이 태어날 날을 잘 안다고 말하던 나를 떠올린다. 암, 기다려야지, 제때를.


꽃이 피는 것을 소리로 표현한다면 빵파르일것이다.

빵! 빵! 빵! 며칠 사이에 구석구석에 솟아난 데이지들이 오케스트라 향연을 펼친다. 피아니시모 바람은 산들거리고 포르테 바람은 절정을 연주한다. 해가지고 바람이 잦아들면 어슴푸레 빛을 내며 잠든다. 하루 종일 엉덩이가 들썩 거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자꾸만 보고 싶어 툭하면 꽃밭으로 간다.


데이지 꽃을 만나기까지 햇수로 삼 년이 걸렸다. 순백의 데이지를 이제 해마다 볼 수 있다니! 게다가 기특하게도 월동을 한다니 손 갈 일도 없다. 해마다 꽃밭에는 하얀 데이지가 필 것이다. 해마다 주름은 늘어가겠지만 그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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