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무의식 중에 전화를 받았다. 12월 출산을 엊그제 마쳤는데 무슨 전화일까? 창밖은 환하다. 자다 깬 내 목소리에 당황한 여자는 "어머 주무셨나 봐요! 죄송해요!" 시계를 보니 아침 여덟 시 사십오 분이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유주. 유상이 엄마예요"
아이들 이름을 말하지만 내가 아이들의 이름을 알 턱이 없다. 하지만 오래전 산모들은 늘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한다. 그녀의 이름은 노희영, 2009년과 2011년에 아들과 딸을 낳았단다. 강산이 변한 10여 년의 시간은 기억을 희미하게 한다.
파견근무를 하게 된 남편을 따라 4년간 외국에 나갈 예정이고, 비자 때문에 아이들 출생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민을 가거나 해외근무로 가족 모두가 나가는 경우 출생증명서를 만들어서 우편으로 부쳐 달라는 사람도 종종 있다. 바쁠 테니 기쁜 마음으로 서류를 보내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녀는 굳이 오늘 만나러 오겠단다. 남편을 혼자 보내지 않고 가족 모두가 함께 외국으로 가는 것은 슬기로운 일이다. 그들의 외국생활은 특히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 소식에 왜 내가 흥분되고 기쁠까?
맞벌이를 하며 종종대던 그녀가 갖게 될 그녀만의 시간을 응원한다.
지난날 남편의 외국 근무로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살았던 삼십 대가 기억났다. 삼사 개월 만에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나왔던 그는 우리 가족의 짧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한참만에 만난 아빠를 보고 작은아이는 내 등 뒤로 숨었었다. 아! 아빠를 잊었구나! 또다시 일주일 후 그는 우리에게서 사라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은 계속되었고 아이들을 이리저리 맡기며 나도 직장을 다녔다. 아이들이 아플 때가 제일 힘들었다. 열이 나는 아이를 약봉지와 함께 놀이방에 데려다주고 출근 시간을 맞추며 달려가고 달려왔다. 어느 날 나는 밤새 배앓이를 했다. 출근해서 검사를 하니 맹장염이었다. 이곳저곳 전화를 했는데 가족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혼자 수술대로 향하며 본 천장의 하얀색이 처량해 보였다. 보호자 없이 수술을 했고 수술을 끝내고 나와서 조차 아무도 없었다. 나를 옮겨다 준 수술방 남자 간호사는 아무 보호자 없는 내게 주스 한 박스를 사다 놓았다. 수술 이틀 만에 운전하여 집으로 왔다. 그 시절은 다 그렇게 살았다고 위안하며 다녔다. 어느 날, 이렇게 사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결론을 냈고, 미련 없이 퇴사하고, 짐을 쌌고, 비행기를 탔다. 네 식구는 더운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십여 년 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반이 가려졌어도 알 수 있었다. 오래된 출생기록부를 찾아 내가 기록해놓은 아이들의 출생 일시를 찾았다. 3.7킬로의 아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해가 중천일 때 태어났고 둘째 역시 새벽 다섯 시경에 태어났으니 역시나 날을 샜을 거다. 많은 이들의 기다림과 노고가 빚어낸 아이들은 11살, 9살이다. 미리 출생증명서를 각각 세장씩 뽑아 두었다. 두근거리는 맘에 주차할 곳이 있나 밖에도 나가보고 시계를 연신 들여다본다.
아! 아이들이 함께 들어왔다. 사춘기가 코앞일 아이들은 엄마를 따라나서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둘 다 왔다. 꾸벅 인사를 한다. 한번 안아보자고 팔을 벌렸더니 커다란 아이들이 덥석덥석 내게 안긴다. "내가 처음으로 너희를 안았던 사람이란다"
한참 동안 핸드폰 속 사진첩을 뒤적이던 그녀가 9년 전 둘째 딸을 낳은 날 사진을 찾아냈다. 유상이는 네 살, 신생아 유주는 엄마품에 있다. 아이들은 신기하다고 난리를 친다. 아기 낳는라 핼쑥해진 그녀와 초록 가운의 까만 머리를 한 초췌녀도 함께다. 모두들 웃고 있다. 그 사진 바로 옆엔 아이들 탄생의 증인을 기억하려고 방송에 나온 내 사진도 한 장 켑춰되어 있다. 십여 년이 지나도록 기억을 지키는 별난 그녀가 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와! 나는 탄생의 증표이다. 그래! 너희들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단다! 내가 바로 증인이란다.
아랍어,영어, 중국어 3개국 언어를 배우고 올 아이들과 브런치 작가의 끼를 살려 외국에서 살아낸 글모음,책 한권을 가지고 올 그녀를 기대한다.
'여기 오는 산모들은 대부분 너랑 대동소이한 여자들이야!' 남편은 늘 그렇게 말한다. '나랑 비슷하다?'를 생각하다가 '나'라는 사람은 어떤 여자일까를 생각한다. 그들과 같은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독립적인 여자!
할 말 하고 사는 여자!
가부장에 맞서는 여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자!
자기 일을 하는 여자!
주도적인 출산을 하는 여자!
그냥... 징징대지 않는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