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덕분에 살아졌어요!

살아가기

by 김옥진

2020년, 마지막 아기가 태어나고서야 오랜만에 전화기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내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전화기는 이번 12월, 나처럼 휴가다. 쉬고 있는 요 며칠은 정년 후 전화기 없는 생활을 그려보게 한다. 밥 해 먹일 아이들도, 제시간에 회사를 출근할 일도, 밤낮으로 아기 받으러 나가야 할 일도 없다. 보고 싶거나 혹 보기 싫은 사람조차도 전화기처럼 내려놓았다. 늦잠을 자도 되고 가끔 불면증이 생길라 치면 초침 소리 들으며 밤을 새웠다가 오전 내내 잘 수도 있다. 살다가 이런 날도 있구나 하며 감탄하는 하루하루다. 이렇게 편안해도 되는 건가! 우리 집 개와 고양이가 서로 잡아먹을 듯 짖거나 털을 세우는 것을 보면 스트레스는 살아가게 하는 자극처럼 보이는데.....

자극이 없는 삶이 낯설다 못해 무료하여 또다시 자극을 찾아 나설지도 모르겠다. 하나 아무리 자극을 찾아 나선들 모두 다 때가 있다는 것을 몸이 안다. 필라테스 하다가 무릎에 무리가 가서 6개월 동안 절뚝거렸다. 영어를 배우러 가서는 젊은이들과 내 삶의 차이를 여실히 느꼈다. 그 날의 주제는 신발이었다. 내게 살아온 만큼의 신발 이야기는 무궁무진한데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부모님과 신발을 사러 가고 사달라고 조르는 이야기뿐이었다. 심지어 젊은 코쟁이 외국인 선생 조차도 그랬다. 어디엔가 속해 있고, 배우러 다니는 것조차 전화기처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순리일까?

두 달 전 브런치를 만났다. 글을 쓰는 가상의 플랫폼이다. 아주 많은 대한민국의 젊은 글쟁이들이 모여 있는 곳! 단 한 번도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내가 그들의 언저리에 있다. 글 쓰는 행위에 문외한인 것을 인정하며 정신없이 살았던 내 삶과는 달리 똘똘하게 자신을 써 내려가는 청년들에게 감동한다. 젊은 내가 그들의 글 안에 있기도 하고, 앞이 보이지 않아 깜깜했던 어느 날도 있고, 아이들이 주는 벅찬 행복, 가슴 먹먹한 사건도 있다. 다른 이들의 글을 보면 모두가 내 이야기 같은 것이 나이마다 겪어내는 삶은 비슷해 보인다.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밝음과 어둠이 나누어지는데 이왕이면 밝은 것이 좋다. '바쁘지 않고 밝게' 쓰기로 한다.

이야기를 쓰려고 살아온 날들을 기억하고 꺼낸다. 위로도 되고, 잊고 잊었던 고마운 사람들도 떠오른다. 혼자 산 것이 아니라 어우렁 더우렁 살게 한 그들이 있어 지금이 있다. 고맙다는 말조차 버거웠던 그날들, "고맙다!"를 꺼내어 쓴다.

내 나이 서른셋, 남편은 해외근무 중이라 독박 육아 중이다. 놀이방에서 감기를 옮겨 왔는지 둘째 아이가 이틀 연속 고열이 난다. 이틀간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약 봉투와 함께 놀이방에 맡겼다. 돌아서는 발걸음에 눈물이 흐른다. 일은 딸을 잊게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짬짬이 아이가 걱정된다. 삼일 째 밤도 열이 계속되었다. 하는 수 없이 다니는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어 근무지와 입원실을 종일 왔다 갔다 했다. 애쓰는 나를 눈 질끈 감고 봐 주신 간호부장님의 마음에 감사하지만 왜 휴가도 못 내고 그리 일을 했을까 하는 후회도 든다. 돌아보면 뭐가 중요한 지 모르는 멍청이 엄마였던 거다.

나의 근무지인 분만실로 돌아오니 옆 방 중앙공급실 선배가 슬그머니 차 한잔 마시자고 손을 끌었다. 커피를 타 주며 "이거 먹어! 아침도 못 먹었지? 아들 도시락 싸면서 한 개 더 만들었어! 맛이 있을지 모르겠네!" 꼭두에 일어나 오이를 채 썰어 절이고, 헹구고, 볶아서 만든 오이 김밥이었다. 아들이 다른 속재료는 싫어해서 오이반, 밥 반으로만 김밥을 만든다고 했다. 갑자기 목이 메어 연신 커피만 들이켰다. 공급실 창가의 화분과 바깥 풍경, 스팀 뿜어내는 소독기계들, 길게 들어오는 햇살, 눈물 글썽이며 오이 김밥을 삼키는 나, 커피 향,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녀,,, 바빴지만 밝으려고 노력한 그 날의 모든 것에 감사하다. 마음 따듯한 그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다. 변함없는 그녀는 일 년 전 간호사 일을 놓았다고 했다. 허허롭고 가라앉은 분위기에 '오이 김밥 이야기'추억을 꺼내왔다. "내가 그랬니?" 빙긋 웃는다. 베푼 선배는 잊었어도 받은 나는 눈물의 오이김밥을 잊을 수 없다. 둘 다 얼굴이 환해졌다. 한가하고 밝다.
"선배 덕분에 살아졌어요. 고마워요~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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