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대한 짧은 생각
* 오늘은 인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분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어떤 학문을 공부함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학문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연구해 나가야 하는 학문인지를 올바른 토대 위에 정초해야 함이다. 반증 이론과 관련된 철학자 '칼 포퍼'의 철학적 과업은 과학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정초하여,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철저하게 구별 짓는 것이었다. 그러한 작업 덕택에 과학은 한층 더 견고해졌고, 발전했다. 인문학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문학을 정초 하려는 것을 토대로 인문학과 사이비 인문학을 구별 지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작업 속에서 인문학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사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과학만큼이나 그 범위가 광대하기 때문에 인문학을 정초함은 쉬운 과제가 아닐 것이고, 나 역시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철학자 칸트가 도덕 법칙을 세우려던 노력처럼,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인문학에 대한 정의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끔 잘 다듬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단어의 개념을 알고자 할 때 가장 쉽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인문학을 검색해보면 이렇게 나온다.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사실 사전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 꾸러미이다. 사전을 통해 그 문화권의 의식을 엿볼 수 있고, 얼마나 그 개념에 대하여 깊게 정의 내리고 있는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전의 인문학은 a4 한 줄 분량도 안 될 만큼 깊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음이 확실하다. 반면 과학을 검색해보면,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넓은 뜻으로는 학(學)을 이르고, 좁은 뜻으로는 자연 과학을 이른다"라고 되어있다. 다소 비약이 있겠으나 이러한 사전적 정의의 분량만 보아도 근대 이후 과학이 인문학 위에 올라섰음을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인문학을 다시 정초하고 다시금 높게 올리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을 정초함에 있어 그 시작은 문자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시작함이 부드러운 방법일 것이다. 인문이라는 것은 人文이다. 사람인에 글월 문을 사용한다.
먼저 人의 의미를 알아봄에 있어서, 내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옛 성인의 말씀을 빌리려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이 되어라" 여기에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람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은 알다시피 하나의 사람을 의미하고, 인간은 人間 사람인에 사이 간을 사용하는데, 그렇다 인간은 사람 혼자서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속에서, 그 사이에서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관계를 파악해 나가는 사람이 바로 인간일 것이다.
이제 文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文을 찾아보면 글월 문이라고 되어있는데, 사실 이 설명으로는 부족할 테니 어원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文은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을 뜻한다. 그리고 인간은 옷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기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로 文은 원래 새기다의 의미가 있다. 몸에 새기는 문신 역시 文身이다.
人과文을 조합해보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으면서 생기는 감정들, 이룩되는 문화들을 새겨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인문학이란 인간 그 자체에 새겨지는 것들에 대한 학문을 뜻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문학에 대한 최소한의 정의이다.
나는 이러한 정의에서부터 인문학과 인문학이 아닌 것을 구분 짓도록 노력한다. 과학은 인간의 외적인 것, 자연현상을 탐구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찾는 것, 또는 새로운 기술의 발견 등일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다루는 대상들에 대한 탐구이지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는 아닐 것이다. 인문학이란 바로 인간 자체에 적용되는 학문일 것이다. 철학자 '루소' 역시 이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앞 구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인간의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유용하면서도 가장 뒤떨어져 있는 것이 바로 인간에 관한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문학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루려고 하는 것이 인간에게로 향하는지, 인간의 외적인 것으로 향하는지 그 '방향성'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나의 인문학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그래서 서점에만 가보면,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책들이 굉장히 많다. 예전에 '여덟 단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된 인문학 관련 책일 것인데, 저자는 광고를 하는 사람이고, 광고에 인문학적인 것을 토대로 하여 더 좋은 광고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약간은 쓴웃음이 지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생각한 인문학의 정의에 있어서 '방향성'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결과물의 최종적인 것은 인간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이것은 인문학을 광고에 적용시켰다기보다도,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여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광고기술에 해당한다. 물론 다소 래디컬 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이다. 이 책 이외에도 인문학의 '도구적 실용성'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베스트셀러들이 굉장히 많은데, 멀리 보았을 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베스트셀러는 그만큼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히게 되는데, 그러한 가운데 인문학의 도구적 실용성이 '자리 잡히게'(이것은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명백히 자리 잡힌 것이다)되고, 이러한 분위기는 인문학을 인간에게서 떼어내어, 어떤 수단을 이루기 위한 도구 정도로 전락시키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인간에게서 인간이 떼어지게 되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나는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온 인문학을 다시 인간에게로 소급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