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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Apr 06. 2018

현대 예술 감상 가이드

미술관에 가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현대 예술의 감상법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죠?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저 보고 느끼는 것 아니었나요? 그런데 갑자기 아름다움의 감상법이라니?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우리가 공부하듯이 그 방법을 배워야만 하는 건가요? 김태희가 아름다운 것, 원빈이 아름다운 것을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건가요? 설마 마케팅당한 건가!?


 어찌 됐든, 현대 예술 감상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온 만큼, 현대 예술의 감상 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텐데요. 현대 예술 감상법에 앞서, 우선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간단히 이야기해봐야겠죠?


 자, 예술이란 무엇인가요? 사실 뭐 별거 있습니까? 예술은 말 그대로 예술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아름다움, 미(美)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표현된 미(美)겠죠?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회화가 있고, 조각이 있고, 건물을 지어도 되고, 무용을 해도 되고, 사진을 찍어도 되고, 영화를 찍어도 예술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짧은 글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자면, 1년을 이야기해도 답이 안 나올지도 모르고, 이 글의 주제도 아니니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우선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표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방식이 무엇이든 표현되지 않는 것은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머릿속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상상을 한다한들 그것이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표현되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 고뇌하는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서 있어 보이는 작품명을 달면 그것이 예술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예술이란,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우리가 흔히 예술적인 작품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현대 예술을 비교해볼까요?


라파엘로, <초원의 성모>


미켈란젤로, <피에타>


 우선 딱 봐도 예술 같은 고전작품을 보면, 보자마자 감탄이 나옵니다. 과연 현대에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예술가가 몇이나 될까요? 회화의 인물들은 살아 숨 쉬는 것 같고, 조각의 섬세함은 도저히 조각으로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천의 구김을 대리석으로 표현하다니, 정말 엄청난 재주입니다. 이렇게 고전적인 작품들은 특별히 이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마치 자연의 장엄함을 보고, 감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이제, 이 글에서 다루게 될 현대 예술을 구경해볼까요? 하나는 상어를 박제해서 유리관 안에 넣어놨고, 또 하나의 작품은 붓에 먹을 찍어서 종이에 점을 찍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라서 이미 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자, 어떠세요? 과연 예술인가 싶기도 하죠?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이것이 예술이라고 귀띔해주지 않는다면 말이죠.


데미안 허스트,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이우환, <조응>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이름이 대박입니다. 위쪽의 작품명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이고, 아래쪽의 작품명은 '조응'입니다. 위쪽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래쪽은 점 하나 찍었을 뿐인데, 엄청난 예술 작품이 되었습니다. 저 작품을 본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건 나도 그리겠다. 내가 그려줄 테니 돈 좀 줘라." 진짜 나한테도 돈 좀 줘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현대 예술에 대해서 말할 때, 유령처럼 떠도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팝아트로 유명한 앤디 워홀이 한 말이라고 잘못 알려진 말인데, 들어봤을 겁니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네가 똥을 싸도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것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죠?


피에로 만조니, <예술가의 똥>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충격과 공포입니다. 이 작품은 피에로 만조니의 '예술가의 똥'입니다. 자신이 싼 똥을 깡통에 나누어 담아서 밀봉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깡통에 쓰여있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예술가의 똥, 정량 30그램, 원상태로 보존됨, 1961년 5월 생산되어 깡통에 넣어짐. 이 작품은 아니, 이 똥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거래가 되었고, 돈이 있어도 못 사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오래되어서 밀봉이 터진 나머지, 똥이 질질 새어 나와도 말이죠.


 이쯤 되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가 아니라, "아니, x발 도대체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죠?


칸딘스키, <구성 No.9>


 이처럼 난해한 현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준비사항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정신의 역사'와 '추상'에 대한 개념입니다.


 까마득한 옛날, 인간이 그 무엇도 알지 못할 때의 세계는 신화의 세계였습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것만 보아도 벌벌 떨며, 저것은 신이라고 생각했지요.


앵그르, <제우스와 테티스>


 그리고 점점 인간의 정신은 발달하여, 저런 현상들을 인간 스스로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소위 철학자라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번개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자연현상이고, 자연현상을 이해하려 하고, 그 의미를 끝까지 알아내려고 합니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하지만 그 후 이 자연을 해석하면 해석할수록, 그러니까 더 근원적으로 들어갈수록, 다시 신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도저히 설명이 안되거든요. 이제 유명한 중세시대의 시작입니다. 말만 들어도 거룩하고 신성 해지죠? 인간들은 다시 신이라는 이름 하에, 비슷한 정신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미히엘 파허, <네 교부 제단화>


 그리고 중세 이후 과학의 획기적인 발전과 함께 근대가 시작됐습니다.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중력을 알아낸 뉴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데카르트가 근대를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신이란 다시 비합리적인 것이 되었고, 모든 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젠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믿게 되었습니다. 중세에서는 신을 통해 인간이 하나가 되었는데, 이제는 인간 각자가 스스로를 믿기 시작해서, 신적인 의미에서의 정신 통일이 깨지기 시작한 겁니다.


타로카드의 '타워' 카드


 그리고 탈근대시대, 이는 쉽게 말해서 근대에서 더 벗어나는 시기라고 보면 됩니다. 이제 인간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떨어지게 됩니다. 사회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들의 감정이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교의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가 있죠? 기고만장해진 인간은 하늘로 가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고, 화가 난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원래는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를 모두 쪼개버려서 서로 대화할 수 없게끔 만들어 버렸다. 그렇습니다. 탈근대시대는 이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감정, 각자의 정신을 갖게 된 겁니다. 오죽하면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과 개의 차이보다도, 한 인간과 한 인간의 차이가 훨씬 크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 왔습니다. 모두가 분열되어버린 현대, 혹은 아직도 분열되고 있는 현대에 와 있는 겁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화되는 현상도 이와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방금 말한 내용들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한마디만 기억해도 됩니다. 원래 인간들은 공동의 가치관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으나, 현대로 오면 올 수록 개개인의 가치관들이 모두 독특해져 갔다.


 자, 이제 두 번째로 알고 가야 할 것, 추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여러분, 추상이라는 것이 무엇이죠? 많이 들어는 봤죠? 쉽게 말해서 추상은, 곧 어떤 것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본질은 무엇이죠? 어떤 것이 어떤 것일 수밖에 없게 끔 만드는 핵심적인 것입니다. 말로는 어려울 수 있으니 그림을 볼까요?


오선비, <우리의 무의식속에 잠재된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형상>


 우리가 어릴 때 많이 그리던 사람이죠?(제가 방금 그림판으로 갈겼습니다. 작품명은 무시하세요) 머리는 동그라미로, 팔다리는 대충 쭉쭉 그어놨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누구나 이것이 사람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로 저렇게 생겼나요? 여러분이 저따위로 생겼나요? 아니죠? 하지만 우리는 저것이 사람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람이 무엇이고, 사람의 본질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저 정도만으로도 사람인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예술로 보기는 좀 힘들 테니(저것이 예술로 인정받는 시대가 혹시 온다면, 정말로 갈 때까지 간 겁니다), 유명한 피카소의 그림을 한 번 볼까요?


피카소, <황소 연작>


 유명한 피카소가 그린 '황소 연작'이라는 작품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황소의 그림에서부터 점점 황소의 본질로 나아가는 추상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추상작업의 마지막 결과물인 이 황소를 보면, 황소는 아니지만, 딱 봐도 황소인 것을 알겠죠? 이것이 추상입니다. 사물의 본질만을 남기려는 생각의 과정인 겁니다. 어떤 결과물을 뜻한다기보다는, 본질을 캐내려는 그 과정을 추상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추상은 정지된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자 우리가 현대미술의 감상법에 앞서서 두 가지를 알아봤죠? 고생 많았습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제 시작입니다. 앞에서 읽은 내용을 벌써 까먹었을 수도 있으니, 정리 한 번 할까요? 인간은 원래 비슷한 생각을 갖고 살았으나,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갖게 되는 과정을 걸어왔고, 추상이라는 것은 본질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요.


 자, 우리는 이제 현대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쥐게 되었습니다. 현대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인간 각자가 모두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현대 예술의 대부분은 추상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피카소의 황소는 아무리 추상되어도 황소인 것을 바로 알 수 있는데, 아니, 현대 예술도 추상작업이라면 도대체 왜 현대의 추상작업은 알아볼 수가 없는 걸까요? 그것은 무엇을 추상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우선 황소는 우리 눈에 보이는 동물을 추상한 겁니다. 우리는 황소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현대 예술은?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간의 감정을 추상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마크 로스코, <무제, 회색 위에 검정>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우선 볼 수도 없거니와 그것은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기에, 그리고 개인의 감정은 개인만이 느낄 수 있기에, 그래서 예술가가 자기 자신도 확실히 본 적이 없고, 느낄 수만 있는 그 감정을, 추상하여 표현하려 했으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추상하여, 눈에 보이게끔 한 겁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상했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상하여 보이게 끔 하려 했는가? 이것이 현대 예술이 갖는 특징입니다. 


 그래서 현대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현대 예술의 감상법이라는 물음은, 인간을 어떤 식으로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결국은 같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죠? 딱 그겁니다.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현대 예술을 우리가 한 번만 보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작품을 이해하고 싶다면, 아니 엄밀히 말해서 그 작품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게 끔 하려면, 보고 또 봐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차츰 생각지도 못한 의미가 나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의미라는 것이 작품과 감상자 간의, 그러니까 둘만의 만들어진 의미이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 예술은 같은 작품을 두고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것이지요. 물론 그 해석이 내 마음에 들 수도, 안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이제 이 글이 드디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겨우셨나요? 열심히 썼는데...


 우리가 앞에서 현대 예술의 감상은 곧,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했죠? 자, 여러분이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분명 여러분도, 맘에 드는 친구가 있고, 맘에 안 드는 친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현대 예술은 이와 같은 겁니다. 어떤 작품은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어서 내 맘에 들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아무리 봐도 내 맘에 안 들고, 심지어 예술 같지도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실은 현대 예술에 대한 감상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이 글의 제목 자체가 웃긴 것이지요, 현대 예술은 감상법이 따로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계속 보다가(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의미가 생기면, 나에게 의미 있는 예술인 것이고,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든다면, 내게 의미가 없는 예술인 겁니다. 그러니 작품을 보고 감흥이 없다고 해서, 내가 예술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라고 위축되어 다른 해석을 찾아보거나, 현대 예술 감상법 같은,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글 따위는 사실 읽으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하하 허무하신가요? 그러니 보고 그냥 느끼고, 의미를 찾는 것이 현대 예술을 감상하는 방법인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나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재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가 참 많으셨습니다. 유명한 시의 일부를 보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유명하죠? 만약에 처음 보시는 분이 계신다면, 국어시간에 잠만 잤던 사람일 겁니다. 농담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 시를 읽냐고요? 이걸 제가 좀 바꿔보려고요. 그리고 여기에 이 글의 핵심을 담아보려고요. 이렇게 바꿨습니다.


 "내가 그것의 의미를 찾게 되었을 때, 그것은 나에게로 와서 예술 작품이 되었다."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 혹시나 해서 말을 해두는데, 저는 예술을 무척 사랑합니다. 모든 예술가들을 응원하고요. 그런데 이 글은 어찌 보면, 굉장히 간단하게 말하고 있고, 중간중간 장난도 많이 쳤습니다. 하지만, 현대 예술을 감상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시는 분들의 긴장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렇게 쓴 것이니, 혹시나 언짢았던 분이 계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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