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옥 화백
옛날엔 그림 그리기를 배우는 걸 보고, 용 잡는 기술을 배운다고 했지. 무찌를 도(屠)에 용 용(龍) 도룡(屠龍). 커다란 뱀에 날개가 있고, 그것이 하늘을 날지. 용을 잡겠다고? 용 잡는 기술을 배워서 어디다 쓰나?
가상적인 동물을 잡겠다고 일생을 걸어? 허허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우리가 파리를 보고, 파리채를 들어서 "잡았다!" 하면서 파리를 내려치면, 파리는 그곳에 있지. 그런데 이 미(美)라는 놈은 말이야, "이것이 미(美)다!" 하면서 내려치면 내가 봤던 미(美)는 온데간데없고 엉뚱한 곳에 떠억 하니 앉아서 날 비웃고 있단 말이지.
이게 예술가의 업(業)이야.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서 떠돌았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새롭다고 생각한 것들은 그저 지나온 길에 불과해. 시작은 끝이 되고, 끝은 또 시작이 되지. 시작도 끝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어. 그저 무극(無極)의 세계에서 출발해서 무극으로 나아갈 뿐. 절대 에너지의 공간 속에서 영원히 돌고 도는 거야.
동양에서는, 그림이라는 말이 그림자에서 나왔지. 우리 예술가들은 그저 연극 무대를 볼뿐인데, 관객들처럼 관객석에서 무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연극 무대의 뒤편에 앉아서 그림자를 볼뿐이야. 그 그림자를 그리는 거야. 평생을 그리는 거야. 예술가는 그림자에 얽매여 허덕이지. 명예라는 그림자가 나를 덮쳐와. 황금이라는, 돈이라는 그림자가 나를 덮쳐와.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도 어느새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거야. 이 그림자라는 놈을 떼어내야 진정한 나를 볼 수 있을 텐데! 그래야만 본질을 볼 수 있을 텐데!
방법은 하나야.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려. 그곳에 더 이상 그림자는 없어. 이제야 진정한 나를 마주하게 되지.
무찌를 도(屠)에 용 용(龍) 도룡(屠龍).
용 잡는 기술을 왜 배우느냐고? 그걸 몰라서 묻나? 용을 잡으려고 배우지.
* 예전 서세옥 화백의 전시와 인터뷰 영상을 보고 너무 감동을 해서, 두고두고 보려고 남겨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