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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May 03. 2018

물놀이


 눈을 떴을 때 나는 숲이었다. 이유 모를 익숙한 숲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걷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정신이 깨었을 때, 나는 폐허가 된 고성(古城) 앞이었다.


 "까드득 까드득 노래를 들으러 왔는가?"


 한 노파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 소리가 노파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구시오?"


 "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소리요?"


 "나를 본 사람은 노래를 들어야 하지"


 노파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원히 수레바퀴를 굴려라! 아니, 수레바퀴를 짊어지고 기어라. 내가 어두운 물가로 데려가 주마. 엄마! 아직 물놀이는 끝나지 않았어요. 끝이 없는 물놀이. 물가의 달팽이. 끝이 없는 물놀이. 짊어지고 걷는 것은 다리가 아파. 그래서 다리가 없지. 물속의 눈(眼)은 항상 나를 노려본다. 멀리서부터 노려본다. 물가에 오는 것은 오래 걸리지가 않아. 물을 맛봐라. 물은 달다. 물은 쓰다. 아니지. 물은 아무 맛이 안나. 물을 마시는 건 순간. 끝이 없는 물놀이. 어서 이쪽으로 걸어와라! 아니지 수레바퀴를 짊어지고 있는 너는, 기어 온다. 이쪽으로 기어 와라. 갈증은 없다. 뱃속 가득히 마셔보아라. 또다시 마셔보아라. 그리고 또다시 마셔보아라. 다른 달팽이들은 없다. 이 물가의 달팽이는 딱 한 마리다. 끝이 없는 물놀이."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숲이었다. 이유 모를 익숙한 숲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걷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정신이 깨었을 때, 나는 폐허가 된 고성(古城) 앞이었다.


 "까드득 까드득 노래를 들으러 왔는가?"




* 자기 자신만의 죽음, 죽음의 시선, 인생의 수레바퀴를 짊어진 달팽이, 영원한 삶의 고리, 그리고 인생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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