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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May 04. 2018

오선비의 철학사 탐방 10.

고대철학 편 - 7. 아름다운 것 속의 아름다움  A

     

* 여러분의 철학 입문을 위해, 중요한 것을 담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쓴 철학사입니다. 차분히 읽으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 이번 챕터인 아름다운 것 속의 아름다움은, 두 편으로 나누어 연재하겠습니다.


  수경낭자는 이윤도령의 그림들을 본 뒤에, 친한 친구인 국희낭자를 만났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이윤도령의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경낭자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아 국희낭자에게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희낭자는 이윤도령과는 다른 의견을 말해주었다. 국희낭자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내 생각에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그 자체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아.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아닐까?". 수경낭자는 국희낭자의 심오한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한번 물었고, 국희낭자는 다시 이야기해주었다.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야". 그제야 수경낭자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되긴 했지만, 이윤도령의 의견과 국희낭자의 의견 중, 어떤 의견이 맞는 것인지 쉽게 분간해내기가 어려웠다. 각각의 말을 들으면 모두 옳은 것 같았는데, 동시에 들으면 서로 말이 맞지가 않았다. 이건 꼭 평소에 오선비가 나에게 하는 말장난 같기도 했다. 국희낭자와 헤어진 뒤, 수경낭자는 어떤 의견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그저 걸었고, 어느새 저잣거리로 오게 되었다.          

                            



오선비  허허 이게 누구요? 수경낭자가 아니오. 오늘은 뭘 그리 생각하고 계시오?


수경낭자  호호 오선비님이시군요? 그냥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요.


오선비  그 생각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구려, 평소에는 수경낭자에게 궁금한 것은 없지만 오늘은 내가 너무 심심하여 궁금해지는 구려.


수경낭자  흥!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건가요?


오선비  허허 말이 그렇다는 거요. 미안하오. 말씀 좀 해주시구려.


수경낭자  (못 이기는 척) 알겠어요. 정 그러시다면 말해드리죠. 전에 봤던 이윤도령의 그림들을 기억하시나요?


오선비  기억하오. 아주 멋진 그림들이었소.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소?


수경낭자  아니요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어서요.


오선비  허허 수경낭자가 이렇게 무언가를 알기 위해 고민을 하다니 이것 참 놀랍소.


수경낭자  저도 가끔은 고민을 한다고요! 전에 이윤도령이 자신의 그림에는 아름다움 자체가 들어있지 않아서 고민이라고 말했던 것 기억하시죠? 그런데 제 친구인 국희낭자는 전혀 다른 말을 해주었어요. 아름다움 자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고요.


오선비  껄껄! 그것 참 재미있는 생각이오. 그래서 수경낭자는 이윤도령과 국희낭자의 의견 중 어떤 의견이 더 마음에 드시오?


수경낭자  사실 두 가지 모두 끌리는 생각이에요. 다만 제가 궁금한 것은, 어떤 것이 진리인가에요. 진리는 중요한 것이잖아요.


오선비  껄껄 그렇소. 진리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소. 하지만 이 문제는 아주 어려운 문제 같소. 그런데 어찌 보면 진리라는 것은 그 실체를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 것 역시 중요한 일 같소. 그건 참 용기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오. 좀 더 생각을 해본 뒤에 자신의 진리를 정해 보는 것은 어떻겠소?


수경낭자  호호 그것도 맞는 말씀 같네요?


(그 순간 갑자기 오선비의 낯빛이 어두워졌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수경낭자  오선비님? 갑자기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낯빛이 어두워지셨어요.


오선비  그렇소. 아주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려 하오. 그대의 입술과 그대의 눈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진리인지 고민하고 있었소.


수경낭자  어멋!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무례하시군요! 저는 이만 아버님께 돌아가 봐야겠어요!


오선비  껄껄껄




 이번에 알아볼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철학을 알아보기 전에 그의 일생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시작으로 좋을 듯하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려서부터 무척이나 총명했기 때문에 17세가 되던 해에 아테네로 건너가(요즘의 말로 하면 유학을 간 것이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20년간 플라톤과 함께 철학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죽은 후 마케도니아로부터 초청을 받아 장차 알렉산더 대왕이 될 어린 알렉산더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알렉산더 대왕으로 이어지는 이 엄청난 스승과 제자의 행렬은 놀랍기만 하다(하지만 참고로 더 놀라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철학적 과업에 비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알렉산더 대왕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후에 알렉산더가 성장하여 정치적으로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Lykeion)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로 돌아왔을 시기에도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는 건재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적 방향과의 차이로 인해 학교를 따로 세운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토론과 철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거닐다'라는 의미의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불렀다.                                     

              

토론을 하고 있는 소요학파의 모습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마케도니아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던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와 관계를 맺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불경죄로 고발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 재미있고, 한편으로는 이런 대 철학자들을 몰아세웠던 그리스인들의 우둔함이 안타깝기도 하다. 어쨌든, 이러한 고발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고발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아테네를 탈출했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를 명백히 말하고 있다. "아테네가 철학에 대해서 또다시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나는 떠난다" 이는 스승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둔 말인데, 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이 아테네가 철학에게 저지른 첫 번째 죄였고, 이번에 나를 죽인다면 그것은 철학에게 같은 죄를 두 번 저지르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말에는 자신 역시 대 철학자로 여기고 있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는 자신의 생각처럼 대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흔히 말해지기를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과 대립되는 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두 철학자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함이지(앞에서 언급했었던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처럼), 두 철학자가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철학과 함께 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고, 자신이 플라톤 학도라고 생각하기를 즐겨하기도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흔히 플라톤과 플라톤 학파의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두 철학자 간에 공통적인 부분 역시 많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크게 세 부분의 시기로 나누어 보자면 1) 순전히 플라톤적인 시기, 2) 과도기적 시기, 3) 자신의 성숙기이다. 플라톤과의 철학적 견해의 차이라고 한다면 바로 3) 자신의 성숙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그 차이란 플라톤은 보다 이상주의적인 열망이 있었던 철학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보다 현실주의적인 분석에 일관한 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땅(현실 세계)을 가리키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제 본격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상들을 알아보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엄청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고, 그에 따른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적으로 볼 때 손에 꼽히는 폴리매스(polymath)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만물박사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참고로 대표적인 폴리매스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인물들이 있다). 그가 연구한 분야들 중에서도 이번 챕터에서는 심리학,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시학, 형이상학의 6가지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다. 물론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방대하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다. 각 분야에 대해서 간단한 이미지를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심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에 관련된 연구는 일반적으로 '영혼에 관하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요즘의 시대에서 흔히 말해지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심리학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영어로 번역이 되었을 때 '영혼에 관하여'라고 불리는 것이지 본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던 영혼이란 프시케(psyche)라는 말이었으며, 이것은 영혼보다는 오히려 '생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여러 종류의 실체들이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실체들의 종류를 계열, 즉 등급 순으로 배열하려 했다. 그것이 그의 심리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등급의 분류에 대한 원리는 어떤 실체를 이루고 있는 조직의 복잡성의 정도였다.      


프시케


 조직이 복잡해지면 그 실체가 발휘할 수 있는 기능 또한 복잡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크게 3가지 등급으로 나누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식물적 생명, 그다음 단계는 동물적 생명, 마지막 단계는 이성적인 생명이었다.     

 

 우선 길가의 돌멩이와 길가의 꽃을 살펴보면 꽃은 돌멩이가 가지지 못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조직화되어 어떤 생명활동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꽃에 비해서 동물들은 단순한 생명활동 외에도 감각적인 활동(보고, 듣고, 냄새 맡고) 그리고 욕망하고, 운동하는 것 등의 활동 등을 할 수 있다. 확실히 돌멩이보다는 꽃이, 꽃보다는 동물의 복잡성이 증가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인 이성적인 생명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인 생명은 생각이니 믿음이니 앎이니 하는 활동들, 그 밖의 다양한 인식활동과 합리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생명인 것이다. 물론 각 생명의 단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기는 힘들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의 생명은 전 단계의 생명이 가지는 특질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를 매우 중요시 여겼다. 지금이야 논리라는 것이 중요함을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그 당시에 논리를 하나의 학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논리학을 하나의 학으로 연구한 최초의 철학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위에서 본 생명의 단계에서도 다음 단계의 생명은 그 전 단계의 특질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역시 논리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논리학에서의 큰 두 가지 방법은 연역법과 귀납법이다.     


 먼저 연역법에 대해서 알아볼 것인데, 연역법 자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유명한 연역법의 예를 보는 것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에 좋을 듯하다. 이 예는 정말로 유명한 것인데, 삼단논법이라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a) 모든 인간은 죽는다 

b)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c)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 예시 덕분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인간에게 영원히 회상될 것이다. 어쨌든, 연역법은 보는 것처럼 시작부터 결론까지 모두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전제에 담겨 있는 모든 내용이 각 단계에 모두 내포되어 있으며, 결론은 전제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연역법을 따르는 가장 대표적인 학문은 수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역법은 전제에 없는 새로움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 그 방법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참고로 중요한 것이 있는데, 삼단논법은 논리적인 흐름이지, 그것이 진리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인간은 로봇이다, 로봇은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지 않는다. 이 삼단논법은 논리적인 흐름에는 문제가 없으나, 각각의 명제들도 참임을 말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어떤 체계 내에서는 참일 수 있으나, 체계의 밖에서 볼 때는, 그 체계 전체가 거짓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귀납법이다. 귀납법도 바로 설명을 하기보다는 예시를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귀납법에도 유명한 예시가 있다. 백조 1은 희다, 백조 2는 희다, 백조 3은 희다, 백조 4는 희다,..., 백조 n은 희다. 그러므로 모든 백조는 희다. 이처럼 귀납법은 여러 가지 경험적 사례를 통해서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이다. 귀납법을 따르는 가장 대표적인 학문은 과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귀납법 역시 방법적인 한계가 있는데, 모든 백조를 조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검은색의 백조가 한 마리라도 발견된다면, 그 결론은 무너지게 된다(블랙스완이라는 말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과학에서 말하는 것은 진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과학에서 진리라고 여겨지는 진리는, 현재 시점까지는 진리다.    

 

블랙스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논리학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논리적인 최초의 원리를 두 가지 말했는데 하나는 모순율이요, 하나는 동일률이다. 이 두 원리는 다른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학의 제1원리인데, 이 원리는 왜 그런지 증명할 수 없는 원리이다. 일종의 약속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모순율은 상반되는 것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로 같은 물건을 두고서 "이것은 검은색이다", "이것은 흰색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두 의견은 모순되기에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A=-A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순된다. 동일률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것인데 예로, "사과는 사과다", "검은색은 검은색이다", "나는 나다" 등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A=A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모순율과 동일률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므로 증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며, 이 원칙들을 종합하면 이렇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이 논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있다,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이성적 판단을 하여 용기 있게, 있는 것은 있다, 없는 것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 아름다운 것 속의 아름다움 B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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