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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May 04. 2018

오선비의 철학사 탐방 11.

고대철학 편 - 8. 아름다운 것 속의 아름다움 B


* 여러분의 철학 입문을 위해, 중요한 것을 담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쓴 철학사입니다. 차분히 읽으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오선비의 철학사 탐방 10.' 아름다운 것 속의 아름다움 A에서 이어지는 편입니다. 10편을 먼저 읽으시면 좋습니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한마디로, 어떻게 하면 사람이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가? 에 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 인간이 마땅히 추구하여야 할 도덕적 목적을 말하고자 하는데, 이것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한다. 이 말은 보통 영어권에서 행복으로 번역된다(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철학적으로 엄밀한 차이를 주는 것은 아니므로, 행복으로 표기하도록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무척이나 강조했는데, 이유는 사람들의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고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 단순한 쾌락은 아니다). 인간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윤리적인 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행복을 위한 윤리적인 덕의 실천,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윤리학의 시작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다루기가 쉽지 않다. 행복이란 어떤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끊임없는 덕의 실천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한 번의 덕스러운 행동이 행복으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든다고 해서,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과연 제비란, 덕스러운 행동이고, 봄이란, 행복일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활동을 하고, 그를 통해서 스스로 만족을 느낄 때 사람들은 즐거워지고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적인 활동이란 옳고, 그름을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최대한 합리적인 결정을 기계처럼 내리는 냉철한 이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조화로움을 말한다. 조화로움이란 곧 중용이다. 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적 쾌락, 육체적 쾌락을 거부하면서 정신적인 것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과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였다.     


샤갈, <도시 위에서>


 이러한 행복은 남과 함께 할 때 더욱 빛을 낸다고 말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와의 우정을 강조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들 중에는 친구와의 우정을 논하는 것이 많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네가 행복하다면, 나 역시 행복해!"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친구와 행복 두 가지를 모두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사람의 좋은 성품이나 현명함은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교육을 통한 결과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국가가 좋은 사회적인 제도와 교육을 제공한다면 훌륭한 시민들이 많아질 것이라 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과도 직결되는데, 윤리학에서 말하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적인 체계 혹은 사회가 잡혀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말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혹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사회 안에서 충분히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하며, 사회는 반드시 이것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과 윤리학은 연관성이 크며 그것을 이렇게 일축하고 있다. "정치학의 시작은 윤리학이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인들은 윤리학을 시작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시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가졌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하나의 학문으로 체계화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고도 보이는데 바로 스승인 플라톤과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플라톤은 현실세계를 이데아 세계의 모방으로 보았고, 예술은 모방물의 모방으로 보았다. 예로, 어떤 조각가가 말을 보고 말의 모습을 조각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데아의 모방물 중 하나인 말을 다시 모방한 것이므로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 역시 하나의 철학적인 것으로 분류하기 위한 시도를 시학에서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 중에서도 연극예술에 큰 비중을 두었고, 실제로 시학에서도 좋은 연극이 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에 대해 기술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창조적으로 담아내는 미적 행위라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연극은 우리들의 삶에 가장 밀착된 모습으로 표현되는 예술이며, 자신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의 연극은 사람들의 욕망이나 희망을 표현하고, 대리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현대에서는 아름다운 일을 목격하거나, 미담을 들으면 "그것 참 영화 같다!"라고 말하거나, "그런 건 소설 속의 이야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 참 진짜 같은 예술이다!", "저건 분명 내 친구의 이야기야!"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 중에서도 비극을 중요시했는데, 비극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비극을 보며 눈물을 흘리면 우리의 정신이 맑아지고 깨끗해진다고 하였다. 그러한 눈물은 슬픔에서 나왔지만 사실은 가장 큰 쾌락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을 통한 쾌락을 카타르시스(정화)라고 하였다. 카타르시스는 본래 밖으로 내보낸다, 배설한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쌓여있는 슬픔을 눈물을 통해 내보냄으로써, 영혼이 해방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슬플 때는 속 시원하게 실컷 울어라" 이 말속에서 카타르시스가 의미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형이상학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현대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원래 말하고자 했던 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바로 본질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물리학이 물리적인 여러 자연현상을 다루는 학이라고 한다면, 형이상학은 자연현상의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묻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이 세계의 뒷면을 연구하는 것 쉽게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는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순서적으로는 개별적인 학문들 이후에 등장한 학문이지만, 논리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학문으로 인식하였다.                   

 

 플라톤도 이데아의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전개했다고 할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차이라고 한다면 플라톤은 어떤 사물의 형이상학적 개념은 현실세계에 없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물의 형이상학적 개념은 바로 그 사물의 이면에 있다고 보았다. 즉, 사물의 본질은 바로 그 사물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칸딘스키, <구성 9>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 사물을 알아가는 데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플라톤에 의하면 현실세계의 사물들은 이데아의 그림자이자 단순한 모방에 불과한데, 그렇게 되면 그 사물은 그 사물의 본질과 절대로 좁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그 자체를 다른 것으로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름다운 것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알기 위해 네 가지의 질문을 한다.     


1) 그것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2) 그것은 무엇인가? 

3) 그것은 무엇이 만들어 냈는가? 

4) 그것은 무엇에 유용한가?     

 

 그리고 이 네 가지의 질문은 보통 이렇게 변형되어 다루어진다.   

   

1) 질료, 혹은 질료인 

2) 형상, 혹은 형상인 

3) 작용, 혹은 운동인 

4) 목적, 혹은 목적인      


 이것들을 종합해서 이야기해보면 이렇다. 온갖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인데, 이것은 어떤 작용자의 활동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며, 어떤 목적에 이용된다. 이제 이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도록 하자.    

 

 먼저 질료와 형상을 이야기해보면 모든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형상은 주어진 사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름이요, 질료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다. 쉽게 말해서 집이라는 것은 형상이고, 시멘트, 돌, 모래 등은 질료인 것이다.     


* 참고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뜻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잘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플라톤의 형상은, '이데아 세계에 있는'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현실 세계에 있는' 어떤 것의 전체적으로 잘 조직화된 형태라고 보는 것이 좋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어떤 아이가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만들고 있다. 아이는 플라스틱 통에 모래를 담아서 모래 위에 탁! 하고 내려놓고는 통을 들어 올린다. 그러면 모래 위에는 모래성이 생길 것이다. 자,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래성의 형상이란, 플라스틱 통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래성의 형상이란, 모래 위에 만들어진 모래성 자체가 형상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고, 아주 복잡 미묘하지만, 우선은 이렇게 이해하고 글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세 번째로 작용, 혹은 운동인이란 생명체이든 무 생명체이든 간에 사물에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자를 말한다. 즉, 생성되는 모든 것은, 모두 어떤 것의 작용에 의해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위의 예를 이어가면, 시멘트, 돌, 모래를 이용해서 집을 짓는 목수가 바로 운동인이다.


 마지막으로 목적, 혹은 목적인이란 그 사물이 지향하는 목표를 말한다. 위의 예에서 집의 목적인은 사람이 살기 위한 것, 따뜻하게 지내기 위한 것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직접적인 예를 들면, 도토리의 목적인은 참나무인 것이다. 물론 이 목적인은 모든 것에 잠재적으로 간직되어 있지만, 그것이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생명의 나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네 가지의 물음과 자연의 변화과정을 함께 논했는데, 결론은 모든 실체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즉, 변화야말로 실체들의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이 상태를 현실태, 잠세태, 완전태 이 세 가지로 나누었다. 현실태란, 어떤 순간에 어떤 실체가 처해있는 그 순간의 상태를 말한다. 잠세태란, 그 실체가 장차 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완전태란, 각 실체가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상적으로 발전한 궁극적인 성취의 상태를 말한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아이는 현실태요, 어른은 잠세태요, 성인(聖人)은 완전태라고 할 수 있다.     


 여태껏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연구과제들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보았는데, 참으로 방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들은 이후 수 천년 동안 지속되었고, 연구되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후 수 천 년 만에야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당부하고 싶은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 차이점만큼이나 공통점 역시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소개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제자이며 고대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철학뿐 아니라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아직도 그에 대한 연구는 이어지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완성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며, 두 철학자의 상반되는 견해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많은 철학적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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