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리포트

교통사고

by 바비줌마


결혼하던 해에 두 건의 교통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결혼하기 전 내가 쓰던 방이 현관 바로 옆이었는데 친정식구들이 드나들 때마다 늘 불이 꺼져 있는 내 방이 신경 쓰이고, 마음에 서운함이 들어 집을 옮기기로 하고 계약하러 가던 길에 횡단보도에서 친정엄마가 택시에 치이는 사고가 있었고, 또 하나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직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시아버지가 뒤에서 오는 택시에 받혀서 난 교통사고다.
졸지에 양 쪽 집에 대형 교통사고가 나서 친정과 시가를 오가며 문병을 다녀야 했다.
친정이야 올케도 있고 다른 가족들도 다 가까이 있으니 그냥 들여다 만 봐도 되었지만 시아버지의 경우는 달랐다.

큰아들인 남편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고, 둘째 아들인 큰 시동생은 군 복무 중이어서 군대에 있으니 자유롭지 못했고, 막내아들인 작은 시동생과 시어머니 나 이렇게 셋인데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있는 병원에 상주해 있고, 작은 시동생은 고등학생이어서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식이요법을 해야 하는 시아버지와 간병하는 시어머니 역시 식이요법을 해야 해서 매일 도시락을 준비해 날라야 하는데 그 일을 나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단순한 식사가 아닌 식이요법으로 준비해야 해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그때까지는 음식을 만드는 것에 많이 서툴렀기 때문에 매일 세 끼의 식사를 준비하여 병원과 집을 3번씩 오가는 일이 갓 결혼한 25살의 며느리에겐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하루는 병원에 다녀오다 골목길에 쓰러진 걸 앞 집 아주머니가 발견해 집에 데려다 뉘어준 적도 있었다.
“아이고 이러다 새댁 잡겠네. 이걸 어쩌누..” 하며 옆에서 어루만지며 안타까워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데 잠시 어지러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혼자 먹는 밥이니 제대로 먹지도 않았을 테고 더운 날씨에 하루 3번씩 병원에 오가는 길이 힘에 겨웠던 것 같다.

어떤 날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엉엉 울며 식사를 준비했던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그동안의 좋았던 일이나 즐거웠던 일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힘들고 서러웠던 일들로 인해 결혼한 것을 무척이나 후회했었다.
그렇게 힘들 때 남편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큰 힘이 되었을 텐데 늘 내가 필요할 때 남편은 내 옆에 없었다. 본인도 그런 현실이 힘들었겠지만 그런 상황을 늘 혼자 견뎌야 했던 나로서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좀 더 있다가 결혼하라던 친정어머니 말을 들을 걸, 왜 이리 일찍 결혼을 한 거야?, 장손 며느리는 무슨 장손 며느리' 하며 목 놓아 울면서도 손으로는 쌀을 씻고, 나물을 다듬고 했었다.
지금도 그 기억은 또렷하다.
그때는 참 많이도 울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힘들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상황들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스스로 너무 안타깝기도 했다.

힘들고, 아파하는 시아버지의 모습이 어떤 날은 무섭기도 하고 금방 어떻게 될까 봐 겁이 나서 병실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울다가 도시락만 전해주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마도 그런 시간들이 몇 달씩 더 길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마도 지금 이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누워 있을 형편이 못 되었다.
교통사고인 만큼 정형외과에서 약물치료도 해야 하고 이런저런 치료방법을 병행해야 하는데 간질환을 앓고 있던 지병으로 그런 치료들이 아마도 간에 무리가 생겼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병이 낫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합병원으로 옮겼는데 출혈이 심해서였는지 혈액이 부족하고, 혈액 중에서도 혈소판만 부족하여 같은 혈소판이 맞는 큰 시동생이 1주일에 한 번씩 나와 헌혈을 했다. 다행히 외출이 자유로웠지만 1주일에 한 번씩 피를 뽑는다는 것 역시 가족이고, 아들이라 하더라도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동생은 한 번도 마다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무리여서 더 이상은 피를 뽑을 수 없다고 할 때까지 뽑았다.
그러나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는 점점 병세가 심해져서 복수가 차고 지금으로 말하면 간암 말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피를 다 토하고 집에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병원에서 급하게 퇴원을 하였다. 옷이 더러우니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하고 팔이 저리니 팔을 좀 주물러 줬으면 좋겠다고 하여서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을 각각 시어머니와 큰 시동생이 주무르는 사이에 잠들 듯이 너무도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병원에서 퇴원수속을 하느라 남아 있었는데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오니 그동안의 고통은 간 데 없고,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 죽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은 노랗게 변한 얼굴빛과 식사는 고사하고 숨 쉬는 것조차 힘에 겨워했는데 이렇게 편안한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지 도리어 감사하고 싶은 마음에 시아버지 얼굴에 손을 대니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사랑만큼이나 따뜻하게 전해졌다.

서울서 뒤늦은 연락을 받고 남편이 돌아오고, 금요일에 돌아가셔서 4일장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아무런 세상 물정도,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른 체 장례를 준비하고, 4일 밤낮을 꼬박 밤을 새워가며 장례를 치렀다.
지금은 장례식장도 있고, 상조회라는 것도 있지만 그 당시는 모두 집에서 장례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주변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교회와 주변의 도움으로 무사히 모든 일정을 잘 마쳤다.
그렇게 시아버지의 병간호와 장례를 치르는 사이 병원에 있던 친정어머니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퇴원을 하였다.

결혼하던 해에 그런 안 좋은 일이 연이어 생기다 보니 내심 속으로 겁이 났다.
결혼하여 새 사람이 들어왔는데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새 사람이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세상의 말들이 드라마에서 수 없이 보았기에 남 얘기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의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내 노파심과는 다르게 그런 비슷한 말은 고사하고 표정 하나도 비치지 않았고, 도리어 어린 나이에 장례 치르느라 애썼다며 위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루는 병원으로 식사를 가지고 들락거리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막 도착하여서 병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그냥 병원에서도 식이요법을 해 주니 여기서 주는 걸 먹으면 어떻겠냐고 시아버지에게 묻자 시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들 건강하고 나만 아파서 그러는데 그까짓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힘드냐고.." 역정을 내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그 말이 어찌나 서운하던지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사실 시아버지 못지않게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서운한 마음은 속으로 욱여넣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환히 웃으며 병실로 들어갔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시아버지는 정말로 별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며느리를 한 번 더 보고 싶고,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늘 도시락을 들고 가면 "밥은 잘 먹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어머니에게 사달라고 해라" 하며 병원에 있는 과일이며 문병객들이 가져온 것들을 전부 챙겨 들고 가기 무거울 정도로 두 손에 가득 들려주었다.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지만 시아버지가 챙겨주는 것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프면서도 병원에 있는 걸 주는 게 되려 미안하기라도 하듯 한시라도 속히 들고 가 먹게 하려던 그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아버지는 그렇게 정말 허무하게 단 7개월 정도를 며느리와 함께 살다가 하루아침에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러나 30여 년이 넘도록 무를 깎아 '맛나다' 하며 같이 먹자던 모습, 수사반장을 켜 놓고 같이 보자고 해 놓고선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등으로 가려주던 모습, 바나나가 귀하던 시절 서류봉투에 바나나를 사 가지고 와서 혹여 시동생에게 하나라도 뺏길까 싶어 화단에 던져 놓고 몰래 방에 가져가 혼자 먹으라던 모습, 아침마다 출근하면서 며느리 앞치마에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하루도 빠짐없이 5천 원씩을 넣어주던 손, 서울에 우리가 살 집을 하나 봐 두고, "언제 이사 갈래" 하며 서운한 마음은 접고 더 기뻐하였던 모습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앞치마에 돈을 넣어 줄 때마다 " 아버님, 많이 넣어주세요. 제가 열심히 모아서 자동차 사 드릴게요." 하면 "차 사려면 부지런히 더 많이 넣어야겠구나" 하며 늘 환히 웃으며 출근했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발인이 있던 날부터 매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추모일마다 하루 종일 날이 흐리던지, 아니면 비가 왔었는데 몇 년 전부턴 날이 좋아졌다.
그래서 형제들과 같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늘 마음이 안 좋았는데 날이 좋아지면서 이제는 3형제가 다 자리를 잡아 마음을 좀 놓은 건지 아니면 너무 일찍 자식들 곁을 떠나서 미안했던 마음을 이젠 좀 접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날이 흐리던, 맑던 며느리에게 주었던 한 없는 그 마음은 매년 내게 따뜻한 봄날처럼 여전히 전해진다.

그렇게 빨리 떠나려고 한꺼번에 많은 사랑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이제껏 잘 살고 있다.
“아버님, 이젠 그곳에서 편안히 계세요. 저희들 착하고 씩씩하게 아버님이 보여준 그 사랑처럼 서로 사랑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