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갓집 맏며느리 되던 날
봄기운이 가장 화려했던 1986년 4월 어느 날.
이제껏 살던 친정을 등지고 결혼을 하여 다른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는 날이다.
따라서 오늘부터는 내 이름을 제외하고는 이름과 함께 같이 붙여졌던 모든 꼬리표들이 바뀌는 날이다. 어느 집 딸도, 막내도 아니고, 시부모와 아들 셋이 있는 집안의 장손 맏며느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면서 며느리, 형수라는 새로운 호칭들을 갖게 된 것이다.
대부분 결혼을 한다면 장남인지, 차남인지, 직장은 어딘지, 어떤 집안인지를 따지는 게 가장 첫걸음이겠지만 남편과 교제하면서 장손 맏아들이라는 게 결혼을 하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면 그 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최근에는 아들 하나, 딸 하나만 낳는 경우도 많아서 장남이나 차남이나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여전히 뿌리 깊게 장남에 대한 기대나 부담은 존재하는 것 같다.
어쩌면 하나라서 더 귀해지고, 더 애틋할 수도 있는데 친구들 중에서도 버젓이 아이들 이름이 있는데 "아들" "딸"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리 좋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전에는 더욱 맏며느리라는 타이틀은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마다 하고 싶은 게 추세인데 굳이 맏며느리를, 더구나 장손 맏며느리를 하겠다는 걸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이고 철도 없어라. 맏며느리는 아무나 하는 줄 아냐? 넌 시켜주지도 않는다."라고 가족들 모두가 코웃음을 쳤었는데 맏며느리도 아니고 한 집안의 장손 맏며느리가 된다는 것이니 결혼 시작부터 주변의 걱정과 염려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늘 막내로 응석과 고집만 부리던 내게 이왕 어느 집의 며느리가 될 거라면 제대로 된 맏며느리를 해야지 하는 철없는 마음인지, 갸륵한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시작은 모두의 염려 가운데 축복과 기대 속에서였다.
내가 장손 맏며느리로 들어가는 시가에는 남편과 시부모와 시동생 둘이 있고, 시골에 시조부모, 그리고 시 작은집의 5 식구까지 포함한 12명이 전부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과 둘만의 삶이 아닌 시가 사람들과의 삶으로 확대가 되는데 이전에 비해 최근에는 시가 사람들과의 접촉이 많이 줄어들었겠지만 어쨌든 수 십 년간 접촉이 없었던 새로운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되면서 새롭게 알아가고, 적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눈치가 좀 빠르고, 센스가 있다면 이런저런 접촉에서 쉽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아마도 더 많은 갈등이나 위기를 겪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시가의 가족은 워낙 단출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바로 성향들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결혼 전부터 알았던 시동생들은 처음 만나게 되는 다른 가족들보다 훨씬 수월했지만 그 대신에 서로의 편안함 때문에 어쩌면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경험들을 서로 했을 지도 모르겠다.
시부모 / 시아버지
시아버지는 공무원으로 강직한 분이다.
다만 건강에 어려움이 있어 30대부터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결혼도 서둘렀고, 당신이 살아있을 때 자녀들도 모두 출가시키고 싶어 해서 아들들에게 재수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들로 공부에 관심이 없던 작은 시동생의 책가방은 수시로 아궁이 속에 던져졌는데 공부하기 싫으면 책가방도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단다.
그리고 건강이 안 좋아 그 흔한 가족 나들이나 외식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해야 하는지 우리가 결혼을 할 때도 집값 외에
"한 50만 원만 있으면 결혼하지"라는 말로 시어머니를 당혹게 했다.
시가에 들어가는 어떤 예물도 하지 말라고 하여서 시아버지 몰래 시동생 양복을 사주고, 시가의 어른들인 시조부모나, 시 작은집에도 며느리인 내가 아닌 시어머니 보고 알아서 대신 준비하라고 하고 웬만한 살림살이는 집에 다 있으니 시어머니 것을 나누어도 된다고 하여서 나 또한 당혹스러웠다.
어찌 생각하면 굉장히 편할 것 같은데 그래도 종갓집 맏며느리를 맞는 첫 결혼인데 그리 하면 두고두고 뒷말 거리가 된다고 친정엄마는 하나라도 더 해 주려는 사이에서 슬쩍슬쩍, 몰래몰래 한 일들이 결혼을 준비하면서 무척이나 많았다.
그렇듯 반듯하다면 반듯하고, 한 번 결정이 되면 바꿀 수 없도록 또한 강직하여 아들들도 시아버지를 어려워했다.
그런데 며느리인 내게는 그지없이 자상하고, 어쩌지 못해 하는 사랑스러움과 부드러움을 갖춘 분이다.
어쩌다 보니 남편은 다른 곳에서 따로 직장엘 다니고 나는 시가에서 시부모, 시동생들과 살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마음과 그리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한복 위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에 신권으로 매일 5천 원씩 넣어주며
"오늘 이걸로 먹고 싶은 거 사 먹어라"하며 넣어주었다.
그렇게 용돈 받는 재미가 정말 좋았는데 하루, 이틀은 그러려니 하고 "네,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받았는데 매일 돌아가실 때까지 몇 달을 그리 하는 모습은 나에게도 큰 감동이었다.
매일 신권으로 준비된 5천 원이 그 당시는 제법 큰돈인데 그걸 매일 며느리에게 주면서 아마도 당신이 주고 싶은 마음 모두를 거기에 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번은 바나나가 지금은 너무 흔한 과일이지만 80년대엔 그리 흔하지 않았고, 가격도 상당해서 귀한 과일이었는데 시아버지가 퇴근하면서 서류봉투에 바나나를 담아서 타고 다니던 자전거 뒷자리에 묶어서 가져왔다. 당연히 그것이 바나나인 줄은 아무도 모른 채 "따르릉따르릉" 자전거 소리를 내어 대문을 열어주려고 나서는데 웬 일로 작은 시동생이 먼저 나갔다. 시아버지는 당연히 내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자전거에서 바나나가 든 서류봉투를 들었는데 시동생이 나오니 갑자기 그 봉투를 정원에 휙 던지고 들어오면서 내 귀에
"저거 봉투 얼른 가져다 혼자 먹어라"라고 한다.
"봉투요?" 하며 정원에 들어가 열어보니 바나나라서
"어, 이거 바나나인데?"라고 묻자 듣고 있던 시어머니가
"야야 넌 눈치가 없노? 니 혼자 묵으라고 그리 안 던졌나?" 하며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바나나라는 소리에 내가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시동생이 낚아채어 꺼내어 먹는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가
"넌 하나만 먹어라"며 눈을 부릅떴다.
막상 당신이 그러고 싶어서 신혼인 아들 내외를 갈라놓고 며느리를 데리고 살면서 좋기는 했지만 내심 미안했던 마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들 대신 용돈으로, 바나나 같은 과일로 보상을 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시아버지의 지병으로 늘 밥상을 따로 차려서 먹었는데 그렇게 밥상엘 각자 앉으면
"돌이라도 씹힐 나이니 팍팍 퍼 묵으라"며 내 밥상에 온 신경을 쓰고, 저녁마다 안방에 같이 앉아 텔레비전 보는 것을 좋아해서 늦은 시간까지 함께 안방에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며느리인 내게는 불편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그저 함께 하고픈 마음에 어떨 때는 너무 배려를 하고, 어떨 때는 며느리와 함께하고픈 당신의 욕심 때문에 며느리의 고단함이나 불편함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살아서 함께 했던 짧은 7개월 남짓한 시간동안 평생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며느리에게 다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부모 / 시어머니
반면 시어머니는 특유의 경상도 억양에 아들 셋을 키우다 보니 자연 목소리가 엄청 커진 듯하다.
순간순간 아들들의 이름을 부를 때는 옆에 있다가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는데 주변의 다른 집 사람들도 각자의 집에서 시어머니가 아들들을 부르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또 아들들만 키워서 그런지 유난히 딸에 대한 로망도 있었던 것 같다.
시가에 갈 때마다 시어머니는 날 위해 늘 옷이나 양말 같은 것을 사놓는데 내 나이에 비해 초등학생들이나 좋아할 만한 디자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꽃 자수가 화려한 레이스 양말이라던 지, 알록달록 스웨터라던 지, 캉캉 스타일의 스커트라던 지 단순한 디자인의 옷이 아니라 늘 뭔가가 주렁주렁 달리거나 무늬가 그려진 옷들을 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시아버지의 단호한 모습으로 쇼핑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같이 시장에 가서 과도라도 하나 사면 눈썰미가 좋은 시아버지가
"못 보던 과도네" 라며 금방 알아채고
"전에 산 건데 당신이 못 봤나 보네" 하며 늘 전에 샀다는 말로 대꾸를 하였다.
필요해서 새로 샀다고 해도 될 텐데 공무원인 시아버지를 굉장히 의식하는 듯 느껴졌고, 항상 시아버지의 말에 별로 말대답을 하지 않고 순종적이었는데 지병이 있는 시아버지를 생각해서 되도록이면 부딪히지 않으려는 시어머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아버지와 함께 살 때는 시간도 없었지만 그런 저런 이유들로 사주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늘 시가에 가면 선물보따리가 기다리고 있어 가는 길이 늘 기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시어머니로서 권유적이거나 명령적이 아닌 늘 청유형의 어투가 순간순간 헷갈려서 한참을 고민한 후에 대답을 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주방의 바가지에 미역이 물에 담가 있길래 저녁에는 미역국을 끓이느냐고 묻자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걸 해도 된다며 뭐 먹고 싶은 것 있냐고 묻길래 이미 미역을 담가 놓았으니 그냥 미역국 먹자고 하면 "그럼 그럴래?"라고 도리어 질문을 하여서 늘 당황했다. 그냥 '미역을 담가놓았으니 저녁에 미역국 끓여먹자'라고 하면 편할 텐데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가에서 분가해 살았을 때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하여 남편이 받으면 인사도 없이 나를 바꾸라고 하고 내게 인사부터 남편의 일이나 아이에 대해 묻고 난 후 용건을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는다. 아들에게 이야기해도 내가 서운하다 안 할 텐데 늘 내게만 이야기를 해서 전화를 끊고 나면 도리어 남편이 내게
"왜 무슨 일 있으시대?"라고 물었다.
이런 사소한 일뿐만 아니라 큰 일도 늘 나와 상의를 하고, 심지어 첫째 동서가 들어왔을 때도
"나는 모르겠으니 네가 좀 잘 가르쳐라"라고 내게 동서를 부탁하는 일도 그렇고, 남편의 회사에는 평생에 전화를 건 적이 없다.
대부분 시어머니들이 아들이 며느리와 사는 집으로 전화를 안 하고 회사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보통이던데 시어머니는 늘 달랐다.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지혜'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항상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솔로몬'이 생각나는데 솔로몬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아는 인물로 다윗 왕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의 3번째 왕이다.
특별히 솔로몬에게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왕이 된 후에 무엇을 받기 원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물질이나 어떤 권력, 힘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받기 원한다고 하였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에게 지혜를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 가운데 잠언을 비롯하여 시편 등 많은 글을 솔로몬이 지었는데 성경에 대해 잘 모른다 하더라도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다투는 두 여인에게 현명한 판결을 내린 솔로몬의 재판'은 솔로몬의 지혜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일화로 아주 유명하다.
'창기 두 여자가 각각 한 집에서 해산을 하였는데 그중 한 여자가 자기 아이 위에 눕는 바람에 아이가 질식해 죽었고 그로 인해 한 아이만 남자 두 여자가 서로 자기의 아이라고 우기며 싸우는 중에 재판을 받기 위해 그 당시 왕이었던 솔로몬의 앞에까지 오게 되었다.
솔로몬은 각각의 말을 들어본 후에 칼을 뽑아 들며 서로 자기 아이라고 하니 달리 방법이 없어 아이를 둘로 나눠 똑같이 나누어주겠다고 하였다. 당연히 아이의 친엄마는 자기가 양보할 터이니 아이를 살려달라 하고 가짜 엄마는 그러라고 대답을 하여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지혜는 순간에 빛을 발하여 억울한 사람 없이 모두를 공평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은데 시어머니가 그랬다.
또 한 번은 결혼 후 아래로 첫 동서를 맞으면서 하루는 시어머니가 나와 아직 결혼식을 하지 않은 예비 동서를 시가로 불렀다.
그리고 나와 예비동서 둘을 앉혀 놓고 앞으로 들어올 막내 동서까지 세 명의 며느리들에게 패물을 똑같이 해 줄 것이나 특히 큰 형인 나에게는 조금 더 줄 것이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큰 형이 아버지의 빈자리도 채워야 하고 또 혹시라도 당신도 죽게 되면 엄마 몫까지 해야 하는데 셋 다 똑같으면 형이 억울하지 않겠냐며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형은 부모 대신이니 그만큼 책임이 주어지는 만큼 당신이 있을 때 좀 더 챙겨주려고 한다며 그 부분에 대해 동서에게 서운해 하지 말라며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앞으로 살아가면서 형이라도 부족한 것이 있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또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절대로 앞에서 형에게 대들거나 얼굴을 붉히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나중에 막내동서가 들어오면 둘째인 네가 잘 일러주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예비동서는 잘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사실 굉장히 무안했다.
그런 이야기라면 동서만 불러놓고 해도 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괜히 동서가 서운해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염려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동서가 결혼하고 그다음 해에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나니 그때의 그 말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물론 나이 차이가 있어 함부로 대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동서만 앉혀 놓고 그 말을 했더라면 아무도 모르는 내용이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인데 같이 들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증인이 된 셈이라 서로 잘 지키려고 노력하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동서가 결혼하고 1년 정도 지났을까 싶은데 동서의 첫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다.
갑자기 시부모가 모두 없는 상태에서 서로 맞추고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때인데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시가의 모임이 많다 보니 동서도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남편과 나도 아직 어린데 어느 날 부모의 자리에 있게 되니 어떻게든 자주 만나서 얼굴 보고 친해지는 시간을 많이 만들자는 목적에서 명절과 시부모 기일, 시 작은집 부모의 생일과 우리 형제들의 생일까지 모이자고 남편과 시동생들이 미리 약속했던 터라 그날도 시아버지 추모예배로 모인 날이었다.
모두가 모인 가운데 식사도 잘 마치고, 빙 둘러앉아 과일과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갑자기 동서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하여 웃고, 떠들던 중에 조용해지고 모두 동서를 쳐다보았다.
“저는 결혼하고 시댁의 일이 너무 많아서 제 사생활이 힘들어요. 남편과 제 생활이 없어요. 그리고 너무 간섭이 많아서 불편해요.”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런 말은커녕 생각조차도 해 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동서의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상태로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불과 1분도 되지 않았을 텐데 피부에 와 닿던 시간은 몇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었는데 동서가 또 뭐라 말을 하려고 하니 시동생이 급히 말을 막았다.
“그만해.”
정적을 깬 그 말 한마디에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또 우리는 다 같이 시동생을 쳐다보았는데 갑자기 볼펜 하나가 시동생을 향해 날아갔다. 정말 순간의 일이고, 찰나였는데 그 모습은 충격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자신들과 나이 차이가 적고 부족해도 부모 대신하는 형이고, 남편은 시아주버니로 어렵다면 시부모보다 더 어렵다는 사이인데 더구나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 사촌 시동생들까지 있는 곳에서 이렇게 대놓고 항의 아닌 항의를 하니 사실 뭐라 해야 할지, 아무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반란’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사회나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규모의 집단적인 행동’, 혹은 ‘정부 또는 지배자 등에 대항하여 저항활동을 일으키다’는 두 가지의 뜻으로 해석이 된다고 하는데 후자의 의미가 그때 내가 느꼈던 생각과 비슷하지만 그 당시는 ‘반란’이라는 단어만이 불쑥 떠올랐을 정도로 정말 놀랐다.
남편은 다소 권위적이라 자기에게 직접 던진 것은 아니나 동생인 자신의 남편을 향해 던진 동서의 모습을 마치 자신에게 던진 것이라 여길 정도로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에 남편을 슬쩍 쳐다보니 남편 역시 많은 충격을 받았던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동생들에게서도 형인 자신에게 그렇게 대드는 모습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기억이 없을 텐데 제수인 동서에게서 그런 모습을 눈앞에서 직접 봤으니 충격도 충격이고,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충격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잠시 침묵이 무섭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서로의 머릿속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아님 가만히 있어야 되나 등등의 여러 가지 생각들로 무척이나 복잡했을 것이다.
그런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음 정리가 된 듯 차분한 남편의 목소리가 시동생을 향해 던져졌다.
“넌 이 시간 이후로 처갓집에 가지 마라. 만약에 갔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넌 나와 끝이다.”
칼을 갈고 나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차분하고 전혀 화가 났다거나 흥분된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아무도 그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서에게가 아닌 동생에게 한 말이어서 그런지 더 단호하게 들렸다.
그러자 동서가 또 말대답을 하였다.
“제가 작은댁에 가면 아이를 내가 업던, 남편이 업든 무슨 상관이냐고 그런 것까지 형님이 간섭을 해요.”라며 이번에는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너무 놀라서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려는 순간 기억이 났는데 동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말을 하는 순간 눈물부터 쏟아질 것 같아 일단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히고 남편 역시 ‘그런 말을 왜 했느냐’는 듯이 추궁하는 눈빛이어서 바로 설명을 했다.
‘조카가 커서 동서가 안기 힘든 거 나도 경험해 봐서 알지만 처음부터 아이를 동서 보고 안고 오라는 게 아니라 시어른들이 있을 때는 현관 앞에서 동서가 아이를 안고, 시동생이 가방을 들고 들어가면 좋겠다’고 슬쩍 그것도 아직까지는 동서가 그리 편하지 않아서 눈치를 보며 말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게 된 날도 그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시 작은아버지 생일이어서 주말에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시 작은 집에 가서 시 작은어머니와 음식을 준비하고, 퇴근하고 오는 다른 가족들은 늘 그렇듯이 시 작은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큰 시동생 내외가 들어오자 부엌에서도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아이구, 야 니는 그게 뭐꼬? 얼라에, 가방은 또 왜 그리 크냐?”라고 말하는 시 작은아버지의 인사 소리였다.
결혼 초에 동서는 늘 높은 굽의 구두에 짧은 미니스커트 정장을 입고 다녔다. 직장에 다녀서이기도 했지만 시가에 일이 있는 날에도 늘 정장을 입고 왔고, 갈아입을 옷도 준비하지 않아서 ‘옷 버리겠으니 저리 가있어’라는 말을 늘 했었다.
더구나 아이가 어리다 보면 기저귀에, 젖병에 사실 아무리 추리고 추려도 짐이 많을 수밖에 없어 늘 아이와 함께 갖고 다니는 가방은 클 수밖에 없는데 아이를 안고, 큰 가방까지 혼자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는 조카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리 말했을 것 같다.
나 역시도 시동생의 결혼 초에는 아무래도 시동생에게 더 마음이 갔다.
집안의 일로 만나게 되면 얼굴색을 먼저 살피고, 살이 빠졌는지, 붙었는지 이리저리 둘러본 다음에 살이 빠진 듯하면 ‘살이 빠졌네’라고 말했었는데 아마도 그 말에는 ‘동서가 좀 잘 챙기지’ 하는 다소 서운한 마음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시 작은아버지야 당연히 조카가 그런 모습에 땀을 뻘뻘 흘리고 들어오는 모습이 절대 반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 작은아버지가 한 번이 아닌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하는 걸 듣다 보니 나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시동생, 내 동서에게 더 이상 그런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안 듣게 해 주려고 했던 말이었는데 동서가 그렇게 생각을 했다니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이나 서운했다.
내가 동서나 시동생을 흉보는 건 괜찮으면서 다른 사람이 흉을 보는 건 안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간사한 사람 마음의 순리이면서도 억지이지만, 같은 의미로 내가 아이들을 혼내는 건 괜찮고, 남편이 어쩌다가 싫은 소리 한마디라도 하면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하고, 무조건 아이들 편을 들어주는 것과 어쩌면 같은 맥락이지 싶다.
그렇게 오가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이번에는 동서에게
“제수씨, 내가 눈썰미가 좋지 않아 뭘 봐도 그것에 대해 잘 모르고, 또 어디 가서 뭘 먹고 왔냐고 물으면 그것 또한 대답을 잘 못해요. 그런데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제수씨가 형과 함께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한 적이 있는지, 한 번이라도 일찍 와서 형이 준비할 때 도운 적이 있나요? 내가 아무리 눈썰미가 없어도 그것은 확실하게 없는 것 같은데 틀립니까?”
그 말에 동서는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할 수가 없었다’고 하자
“그 직장 누굴 위해 다닙니까? 절 위해 다니나요? 아님 형을 위해 다니나요? 직장은 제수씨를 위해 다니면서 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형이 안아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제수씨, 앞으로는 일찍 오세요, 일찍 와서 같이 음식 준비도 하고, 형을 도우세요. 그리고 내 아무 얘기 안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먼저 이야기를 하셨으니 저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시가의 일로 사생활에 문제가 많다고 했는데 결혼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10년이 됐습니까? 고작 1년이 되었고, 그동안 시가의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고, 또 제수씨가 그 시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서운하겠지만 전 별로 기억이 없는데 앞으로는 시가에 일이 있으면 일찍 오세요, 그리고 일찍 와서 형을 도와 함께 준비하세요.”
그러더니 시동생에게 “너 기억해라. 내 말이 무슨 말인지.”라고 확실하게 못까지 박았다.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엄청난 고요 속에 던져진 남편의 말은 무척이나 크게 울림이 되어 들렸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남편이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고, 심지어 손해를 보는데도 가만히 있어 늘 답답했었는데 처음으로 남편이 내 편이 되어 대신해 준 탄산수 같은 말에 속이 다 뻥 뚫리는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동서도 아직 시행착오를 겪는 중일 텐데 시부모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서로 겪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지만 늘 동서 입장을 우선시하는 시동생이 있으니 잘 다독여줄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남편이 늘 내가 아닌 나와 관련된 상대방을 옹호하고 이해를 하는 입장이었다면 큰 시동생은 항상 동서 편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동서를 먼저 챙기는 모습을 늘 봐 왔기에 그런 부분에서 늘 동서가 부러웠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잘 이해시키고, 잘 다독여줄 거라 믿으며 내 동서여서 챙기고 싶었는데 앞, 뒤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탓에 그런 오해가 생긴 듯하여 무척 안타까웠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명절이 되어 다 같이 시할아버지 집에 가야 하는데 걱정이 앞섰다. 그 사이 동서와 서로 전화 한 통도 없었는데 괜찮을지, 오기는 할지 여러 가지 명절을 보낼 걱정이 아닌 동서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시가의 사람들은 서로 사는 곳이 다르지만 제각각 다니지 않고,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에 한 곳에 모여 아침을 먹고 다 같이 출발하는 것이 원칙 아닌 원칙이 되어있다. 그래서 늘 각자의 차로 출발하여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 하면 시간에 맞추어 약속 장소에 도착을 한다.
그날도 시할아버지 집에 가기 위해 다들 새벽에 나와 곤지암에서 아침을 먹고 가기로 했는데 먼저 도착한 우리는 밖에 나가 모두가 오길 기다렸다. 역시나 성격이 급한 큰 시동생인지라 일찍 도착을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동서를 쳐다봤는데 환히 웃는 얼굴로
“형님, 잘 지내셨어요? 새벽인데 그새 길이 엄청 막혀서 늦는 줄 알았는데 일찍 왔네요.” 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영부영 눈치를 보다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그 마음에 덥석 안고 싶었다.
남편의 형제들이야 좀 전에 싸움을 하고 난리를 폈어도 금방 화해하고 잊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라 걱정을 안 하지만 여자들은 사실 그렇게 쉽게 풀리지도 않고, 또 처음으로 생각하기도 싫은 엄청난 일을 겪은지라 매일매일 그 날의 일을 곱씹으며 이리 할 걸, 저리 할 걸 하고 후회를 했었는데 이렇게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대해주니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껏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비슷하게도 없었다. 시원한 성격의 동서 때문에 난 부족해도 부모로서의 자리에 있었고, 동서들은 그런 나를 잘 따라주어 모두가 편안하게 지낸다.
아마도 시어머니가 결혼 전에 나와 동서를 불러놓고 부탁했던 말들이 이런 날들을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작은동서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순둥이다.
별로 말도 없고, 또 누군가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맞장구도 잘 쳐주고, 서운하다거나 속상한 일도 잘 표현하지 않아 막내동서가 친정의 일로, 시동생으로 속앓이를 할 때도 잘 몰랐다.
친정에서는 맏딸이어서 그런지 나보다 더 듬직하고, 믿음이 가는 동서인데 시부모가 처음부터 없던 시가에 시집을 와서 큰동서인 나를 잘 따라주고, 무슨 말을 하면 “네”라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해 줘서 늘 예뻤다.
가끔은 알아듣고 대답을 하나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이전의 내 모습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던 적도 있다.
나 역시 시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대답은 정말 시원시원하게 했다. 가끔은 ‘네’라고 대답한 일을 잊어버려서 난감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늘 “네, 네”라고 후다닥 대답을 하면
“니 내 말을 듣긴 들엇노?”라고 의심이 되는지 시어머니가 되물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을 하고, 안 하고도 중요하겠지만 그렇게라도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니 늘 맘이 편하고 든든했는데 아마도 이제는 내 편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입장이 되어 서로를 이해해 주고, 함께 하는 것이 늘 우선이라 생각을 하기에 그런 동서들의 태도는 항상 힘이 되었다.
큰동서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기억한다면 무슨 그런 게 반란이냐고 서운해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은 내게 반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만큼 시어머니를 대신할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마침 함께 하게 된 큰동서가 너무 든든해서 시어머니가 내게 보내준 지원군이라 생각해 늘 내 편이 되어줄 거라고 믿었기에 더 크게 느껴졌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흔히 자식사랑에 대해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쓰는데 난 부모도 아니면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에 큰 공감이 갔다.
시어머니가 있을 때 결혼한 큰 시동생보다는 아무도 없을 때 결혼한 작은 시동생에게 더 마음이 갔고, 같은 처지로 큰 동서보다는 또 작은 동서에게 더 마음이 쓰여서 큰 동서 몰래 작은 동서를 챙기기도 하고, 또 음식을 싸줄 때도 나도 모르게 작은 동서에게 하나라도 더 담게 되는 모습을 수시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가에 일이 있을 때만 왔던 큰 시동생 내외와는 다르게 작은 시동생과 작은동서는 수시로 들렸기 때문에 아마도 더 편했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큰동서가 비타민을 보내왔다. 코로나로 집에만 있으면 면역도 떨어지고, 건강도 해칠 수 있으니 챙겨 먹으란다. 그런 동서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한편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 챙김도 받을 수 없고,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작은동서가 동시에 떠오르는 것 역시 부모의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단 한 번이기는 하지만 그런 충돌이 있었기에 그로 인해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고, 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지내게 되어 이제는 동서가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서를 의지하게 된다.
오래전 시 작은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꼼짝도 할 수가 없어 누워 있어야 하는데 시 작은집의 시동생이나 동서들은 직장이 있어 저녁시간에나 시간을 낼 수가 있어, 낮 시간에 작은 동서와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방금 수술을 마치고 나와 의식도 흐릿한 가운데 허리로 인해 꼼짝을 할 수가 없어 기저귀를 채워놨으니 갈아주라'고 하는 간호사의 말을 들었던지 다른 사람은 불편하니 나보고 해 달라고 하고는 아직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이 아니라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말에 동서를 내 보내고, 이불을 들치는 순간 여러 가지가 섞인 냄새로 인해 비위가 약한 난 헛구역질을 하고 결국 병실 문을 열고 나가서 한참을 진정시켰다. 그때 작은동서가 가까이 오더니 귓속말로 자신이 할 테니 나가 있으라고 한다.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밀어 병실 밖으로 내 보낸 후 작은동서가 모든 걸 마치고는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며 나보고 얼른 들어오라고 했는데 난 그때의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시할아버지가 있는 시골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언제나 맏손부가 왔다고 반겨주는데 작은동서가 들어온 후로는 늘 작은동서에게 먼저 가서 아는 척을 해서 작은동서가
“형님은 제가 아니고, 저쪽에 계세요.”라고 말하며 늘 당황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볼 때마다 그랬던 걸 보면 어른들이 보기에도 작은동서가 더 듬직한 맏손부로 보였던 것 같다.
이런 동서들이 내게 힘을 주고, 의지가 되게 하였다면 전국에 있는 친구들 역시 가족 못지않은 지원군이며 친정엄마 같고, 언니 같은 사람들이다.
매년 철 따라 전국에서 친구들이 보내오는 물건들이 정말 많아서 아이들이 ‘엄마는 참 복이 많아.’라고 하는데 철 따라 내가 좋아하는 거라고 보내오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특산물이라고 보내오고, 김치를 담갔는데 너무 맛있게 담가서 생각나서 보냈다고 하고, 자신은 떡을 좋아하지 않아 누가 주면 안 받는데 내가 좋아하는 걸 알기에 받아서 두었다가 다양한 떡을 챙겨주는 친구들이 정말 많다. 그러나 그렇게 보내주는 것도 고맙지만 더 고마운 건 나의 그런 취향까지 기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던 만날 사람이 있어 늘 든든하고, 흥분되게 하는데 친구들이라고 해서 나와 나이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동갑부터 아래로, 혹은 위로 10살 이상까지도 많은 친구들도 있지만 그들이 있어 하소연도 하고, 함께 웃고, 울기도 하고, 힘들다는 한 마디에 친정보다 더 든든하게 위로를 해 주어 가족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있어 이제껏 잘 버텼던 것 같다.
5년 전쯤인가 교통이 좋지 않은 곳이라 부득이 패키지로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만난 부부인데 나보다 10살? 12살 정도 많은 부부였다.
여행을 하는 기간에도 우리 부부가 그 팀에서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살뜰하게 가져온 밑반찬이며 간식이며 열심히 챙겨주어 편안하고, 즐겁게 여행을 했는데 마치고 돌아와서도 그 인연이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을 여행을 해서 안 가본 곳이 평소 들어보지도 못한 이상한 도시가 전부였을 정도로 여행 마니아 부부였는데 요즘은 해외여행을 할 수가 없어 답답해서 주말농장을 하고 있다며 배추를 300포기 심었으니 놀러 오란다. 그리고 아직 여물지 않아 모양은 허술하지만 김치를 담아 보낼 테니 잘 받아먹으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런 일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또 결코 흔한 일 역시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기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고, 친구, 회사 동료, 동업자, 상사 등 수많은 인연으로 만나야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인연이 되고, 특별한 관계까지 이어지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게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갈등이나 불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좋을 수만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순간이라도 싫어지고, 맘에 안 들고, 상대방 모르게 혼자서라도 잠시 거리를 두게 되고, 또 어느 순간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게 되는 많은 시간과 일들 속에서 인연이 되고, 특별한 관계로 발전된다고 생각한다.
가족 역시 남편으로부터 시작되어 만들어진 시가의 시조부모, 시부모, 시동생이나 시누이, 동서들까지 오직 남편이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남편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평생 함께해야 할 사람들이고, 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로 엮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진 듯하다.
기질도 다르고, 식성도 다르고, 체질도 달라서 어느 하나 맞는 것도 없고, 맘에 드는 것이 없어도 과거 며느리에게 ‘귀 막고, 눈 가리고, 입 닫고’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미덕이었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일지도 모른다.
즉, 모든 것을 품을 수 없다면 그렇게 외면한 채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큰동서처럼 정면돌파를 해서 해결을 하는 방법도 좋은 것 같다.
그래야만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진심을 통해 굳이 화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던 듯이 휴게소에서 반갑게 인사를 했던 것처럼 그렇게 씻어내고,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면서 이제는 명절에 오지 말라고 해도 지나는 길에 들렸다며 태연하게 들락거리는 허물없는 사이가 된 것 같다.
반란이라는 것이 반항하여 저항활동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의미 외에 추가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고, 풀어내어 가지고 있던 반감이나 불편함을 털어내기 위한 행동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반란으로 인해 서로의 처지와 생각을 더 알게 되었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리 예측이라도 했던 것처럼 나와 동서를 앉혀놓고 당부했던 시어머니의 당부가 서로 다른 우리 모두를 짧은 시간 안에 ‘가족’이라는 이름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평소에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내게 무엇을 시킬 때도 "이거 해라"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콩나물을 사다 놓고도 "저녁에 뭐 해 먹을까?"라고 물었고, 미역을 담가 놓고도 "무슨 국 끓여 먹을까?"라고 늘 물어보았다. 이미 내 눈 앞에 콩나물도 있고, 미역은 물에 담가 놓은 지 한참 되어 다 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무엇을 내게 주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고 "니 이거 좋아하나" "이거 먹어볼래"라고 늘 물었지, 당신이 주고 싶다고 해서 이거 가지라거나 이거 먹으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게 뭘 달라고 요구한 적은 더더욱 없는 듯하다.
나뿐만 아니라 아들인 남편에게도 무엇이 필요하다거나, 어딜 가자거나, 무얼 먹자고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었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였고, 우리가 사고 싶은 것을 일방적으로 산 것 같다.
당뇨와 혈압의 지병이 있어서 여러모로 까다롭게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늘 당신이 알아서 스스로 했다. 심지어 밥을 먹다가 물을 가지러 가는 것도 당신이 먼저 움직였고, 아니면 미리 가져다 놓아 내가 나설 일이 없었다.
지금은 좀 빨라졌는데 유난히 천천히 밥을 먹는 바람에 게눈 감추듯 후다닥 먹는 시가식구들과는 늘 차이가 많아서 먹다 보면 이미 반찬이 다 없어지는 경우도 많았는데 어느 순간 내 밥 위에 시어머니가 미리 가져다 놓은 반찬들이 올려있는 것을 수 없이 보았다.
늘 김장과 고추장, 된장을 보내주어 먹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죽고 동서가 들어와 첫겨울을 맞으며 김장을 해야 하는데 그동안 옆에서 시중만 들다가 하려니 어찌해야 하는지 양도 모르겠고, 방법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늘 김장을 해 주었던 시어머니가 생각나서 동서에게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해 주려고 김장을 한 적이 있다.
배추 20포기를 사다가 김장을 하는데 꼬박 2박 3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20포기 갖고 3일씩이나 하냐고 웃을 일이지만 그때는 아이 둘을 데리고 비좁은 집에서 하는 김장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모른다.
동서에게 줄 김장독까지 새로 사서 고추는 하나하나 면장갑 낀 손으로 닦고 다듬어서 고춧가루로 만들고, 하루 종일 마늘까지 까서 찧고 집안의 모든 곳에 배추를 가져다 다듬고, 절이고, 버무리며 준비를 하여 김장독에 담다 보니 너무 큰 것을 사서 15포기가 들어가는 바람에 작은 시동생까지 식구가 더 많던 우리는 겨우 5포기만 남긴 채 그걸 차에 싣고 가서 전해 주었던 일이 있다. 무척이나 힘들게 했는데 전해 주고 돌아오는 길은 또 얼마나 뿌듯하던지. 그 마음속에 시어머니도 이랬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막내동서가 들어왔을 때도 첫 해만 해 주었는데 매년 김장을 해 주는 것이 너무 벅차고, 한번 해 보니 엄두도 안 나고, 또 잘하지도 못해서 단 한 번으로 모두 마쳤는데 그때 김장을 해 주던 내 맘은 시어머니가 내게 해 주던 그 마음이었다.
매년 고춧가루며, 마늘까지 다 찧어다 주고, 올 때마다 들고 왔던 기름이며, 나물들, 농사도 짓지 않는데 고추는 사서 다듬어 빻고, 마늘도 직접 까서 찧고, 기름도 깨를 사서 직접 짜서 가져왔던 것들이니 그 정성이 정말 대단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어떤 과정을 거쳐 가져왔는지 생색은커녕 한 번도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기에 그저 막연하게 샀으려니 했던 것이다.
하루 종일 혼자 쪼그리고 앉아 누구에게 말 한마디 걸 수 있는 사람도 없이 일주일 내내 그렇게 준비해서 가져왔던 시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그걸 몰랐다.
살림을 하면서 하나하나 준비하다 보면 나물 한 가지를 만들면서도 다듬어 데쳐서 무치는 과정까지가 귀찮고, 마늘 찧을 생각을 하면 머리부터 지끈 아파 와 되도록 깐 마늘을 사서 찧는 데도 손이 많이 가고, 고춧가루는 이제껏 늘 여기저기서 얻어먹느라 빻아본 적이 없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꾀도 나고, 귀찮기도 하고, 엄두도 나질 않는다.
가끔 친구들이 밥해 먹기 싫어 미치겠다는 말을 하는데 이제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도 너무 잘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침, 저녁으로 밥을 해서 남편과 아이들이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있다. 가끔은 귀찮기도 하고, 혼자 괜한 짜증에 오늘은 외식이라고 먼저 떠들기도 하지만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것 또한 편하지가 않다.
이제 아이들이 자라 결혼을 하게 되면 배우자들이 생기고 아이들의 배우자들과 다시 새롭게 섞이면서 잘 살아가려면 안살림을 하는 엄마로서, 주부로서 지혜가 필요할 터인데 고집부리지 않고 먼저 배려하며, 생색내지 않고, 하나라도 더 나누어주려던 시어머니의 삶의 자세와 지혜가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30여 년의 삶을 걸어오면서 힘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또는 그들의 배우자에게 지혜로운 엄마로 아이들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해 주고 싶고 나 역시 그로 인해 마음으로부터 더 여유로운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이런 시어머니의 모습이 말 그대로 경험이 없다 보니 모든 시어머니들이 이렇게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주변의 사람들이나 결혼한 친구들을 통해 너무 다른 시어머니의 모습에 사실 놀라기도 하고, 그런 분이 시어머니여서 고맙기도 하여 친정에서는 올케의 시어머니가 되는 친정엄마에게 늘
"엄마, 언니에게는 이렇게 말해, 이렇게 하는 게 좋아."라며 시어머니가 내게 하던 행동이나 말의 스타일을 알려주곤 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보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물어보는 형식의 대화법이나 집안의 모든 일들을 아들이 아닌 며느리와 상의하고 늘 며느리를 먼저 챙기는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며느리를 통해 집안의 대소사가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며느리들은 스스로 정말 잘할 것 같다. 그만큼 책임감도 느끼고, 또 믿고 맡긴 시부모에게 믿어준 만큼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시어머니는 '배려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되는데 그건 이 일을 통해 큰 깨달음을 주었는데 그런 모습들이 계속적으로 겹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그런 모습들을 많이 배우게 된다.
내 기질상 누구 하고든지 어색함이나 불편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 보니 친밀감이 높다, 붙임성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물론 그런 기질도 있지만 이젠 한 가족이니 굳이 선을 그을 필요도 없고, 또 무언가를 들고 다니는 것을 귀찮아하는 성향이 있어 시가에 갈 때 내 짐은 없이 늘 빈 손으로 갔다.
그 당시 화장도 별로 안 하고 기초만 바르던 젊을 때였고, 또 너무 말라서 허리에 맞는 스커트를 고르기 어려워 늘 멜빵 스커트나 벨트로 고정하는 스커트나 고무줄 스커트를 입었었기에 비록 시어머니가 나보다 뚱뚱하여 맞는 걸 찾기가 어렵기는 하나 벨트로 고정하면 되려니 하고 옷장에서 시어머니 옷들을 꺼내어 둘둘 접어 입고, 화장대에 놓여 있던 시어머니 화장품을 바르고 했는데 그런 모습을 처음 대할 때 살짝 당황했었는지 그다음에 갔을 때는 여기저기 정돈이 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저곳을 스스럼없이 뒤져서 꺼내 입고, 꺼내어 쓰는 내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나 보다.
처음 시어머니 화장품을 바르고 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다 뒤집어져서 며칠 고생을 한 적이 있는데 평소 화장을 안 하던 얼굴이라 아마도 시어머니 또래의 화장품이 좀 독했던 듯하다. 그 모습을 보고 계속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했는데 그렇게 며칠 보내고 서울에 돌아왔다가 그다음 주에 다시 시가에 가니 전에 쓰던 시어머니 화장품 대신 내가 쓰고 있는 화장품과 똑같은 것이 화장대에 올려 있어서 새로 산 거냐고 했더니 전에 쓰던 것을 다 써서 새로 샀다고 한다. 그러려니 하고 내 거랑 동일한 브랜드라서 잘됐다 생각하고 사용한 후에 양말을 찾으려고 화장대 안쪽 속을 뒤지다 지난번에 시어머니가 썼던 화장품이 그대로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꺼내어 보니 여전히 가득 담긴 용량을 느낄 수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날 위해 일부러 지방도 적게 들어 중년이 쓰기에는 다소 건조한 화장품을 쓴다고 사놓고 혹여 내가 미안해할까 봐 당신 것은 깊숙이 숨긴 채 새로 산 화장품만 꺼내어 놓은 것이다.
굳이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지난번에 네가 내 것을 쓰고 얼굴이 뒤집어져서 새로 샀다" 해도 될 것이고, 아님
"네 것을 좀 덜어서 갖고 다녀라" 해도 서운하다거나 불편해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 말 없이 당신이 쓰던 것은 숨기고, 내가 쓸 만한 것을 일부러 산 것도 아니고 다 써서 새로 샀다는 말로 내 무안함이나 게으름, 철없음을 덮어준 것이다.
이렇듯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단호하고, 아들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서 그 아들을 건들면 절대로 안 될 것처럼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며느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한없이 베풀었다.
대부분 시부모들이 아들 집에 가게 되면 한 없이 퍼주고만 싶은 부모들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뭔가 대접받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텐데 나물 좋아하는 며느리를 위해 온갖 나물을 손질하고, 데쳐서 봉지봉지 들고 왔다. 그래서 항상 우리 집에 올 때는 보따리가 너무 크고 며칠 전부터 준비했을 품목들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듯 퍼주고, 챙겨주고 며느리 우선으로 모든 일을 이끌어주던 시어머니다.
비록 몇 년 함께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그늘이 되어주고,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시어머니가 그립다.
특히나 첫 손녀였던 큰아이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1주일이 멀다 하고 비좁디 비좁은 아들 집으로 늘 바리바리 싸 들고 "할미 왔다" 하면서 아직 보지도 않은 손녀딸을 벌써 본 듯 환한 웃음으로 들어왔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워낙 목소리도 컸지만 아이가 자다가도 할머니의 소리에 "할미" 하면서 일어나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가곤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5살도 채 안 되었을 때까지만 할머니를 본 큰아이인데 여전히 할머니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아마도 큰아이도 비록 어렸지만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다 보니 그 사랑을 몸으로, 마음으로, 머리로 모두 기억하는 것 같다.
남편
남편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말이 내게는 아마도 '남의 편'이라는 말일 것이다.
나 역시도 연애시절 더 헤어지기 싫고, 늘 함께 하고 싶어서 결혼을 하였지만 신혼여행을 하고 돌아온 후부터 헤어져 살았고, 그 후 분가해서는 시동생들과의 동거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닌 합숙 같은 분위기에 밥과 세탁 등 집안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 전부였던 것 같은 시간을 10년 넘게 보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움, 애정 등의 말은 사치였고, 비좁은 집에 시동생들과의 동거로 함께 앉는 시간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는 연극 같은 신혼생활, 그리고 시동생들의 결혼으로 인한 출가가 이어지고 덩그러니 둘만 남았을 때는 이미 지나간 신혼 대신 서로 힘들고 찌들었던 삶에서 오는 거리감과 무력감, 그리고 무의미한 삶이라는 생각으로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아마도 지금 다시 그렇게 살라고 한다면 아마도 100% 이혼을 했을 것 같다.
왜 그리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누구를 위한 삶이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매일매일의 일상을 보내는 데에 의미가 더 컸었던 때다.
그래서 사실 내 아이들에게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나 역시도 어렸고, 철없던 막내로서 응석받이였기에 달라진 환경에서 조금은 더 사랑과 보살핌이 더 필요했지만 장손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조금은 반대했던 결혼이었기에 자존심으로 친정에 하소연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런 내게 남편은 그저 시부모 편, 시동생 편이었고, 심지어 친구의 말에 아내인 나를 같이 흉까지 보는 친구 편이기까지 했다.
다들 신앙이 좋았던 남편과 결혼하는 것을 부러워했다.
나도 그런 모습을 보고 결혼을 했기에 그 부분만은 책을 잡고 싶지 않다. 그러나 신앙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모습은 늘 나를 힘들게 했다.
아이가 어린데도 교회 봉사를 요구했고,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에도 자신이 정한 원칙을 따라야 했고, 뭔가 스스로 정해 놓은 원칙에서 어긋나면 강압적인 것은 아니나 어떻게든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에 의견을 내었다가도 늘 중간에 포기하고, 덮어버렸다. 그 말에 수긍이 되기보다 어찌 결과가 나올 것을 알기에 부딪히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수 십 년을 살다가 한 번은 도저히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두 손을 든 적이 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이렇게 살지 않아도 이것보다는 덜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혼 후 수없이 많은 노트에 탄식을 적었던 기억이 있다.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를 못 해 몇 번이고 책장을 뒤졌지만 몇 년 전까지도 있었던 것들이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했는데 사실 찾아도 다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다. 수 없이 잠 못 이루던 많은 밤을 혼자 눈물을 흘리며 마치 엄마에게, 친구에게 하소연하듯 백지 노트에 써 내려갔던 아픔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게 친구도 없었다.
친구를 만날 시간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고, 그저 시부모, 시동생들을 챙기며 집안일을 하기에도 하루가 모자란 시간이었기에 친구를 만난 적도, 심지어 여전히 젊은 20대였는데도 나를 들여다보며 가꿀 시간도 없었다.
매일 머리는 하나로 질끈 동여매고, 편하디 편한 것으로 원피스 하나 달랑 걸치고 그 흔한 립스틱 한 번을 제대로 발라보지 못해 사실 화장품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일요일이 되어 교회에 가는 날이면 사실 그게 더 힘들었던 것은 남편은 봉사를 한다고 일찌감치 혼자 나가고, 혼자서 아이 둘을 챙겨 버스를 타고 1시간 가까이 가던 교회는 정말 가기 싫었는데 그렇게 교회에 도착을 해도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으로 더 힘들고 지쳐서 돌아오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사실 그 시절엔 교회가 정말 싫었다. 아마도 그때가 내게는 영적으로 가장 타락했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마다 남편은 늘 내 옆에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고부터였을까 남편은 나보다 아이들을 더 의식하는 듯하다.
말은 늘 나를 챙기듯 아이들에게 엄마가 우선이라고 하지만 누구하고 든지 부딪히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보기보다 허술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나에 비해 아이들은 아빠의 행동에 대해 따지기도 하고, 큰아이는 심지어 혼나면서도 이제는 내 울타리가 되어 어느 정도의 조정을 하기 시작하면서 눈치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아내들이 간혹 '아이들이 크면 보자'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편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남들보다 조금 일찍 부모를 잃었을 뿐인데 늘 누군가를 대신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부모의 자리, 형의 자리에 있어야 했기에 아마도 나만을 위한 남편의 자리까지는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결정에 누군가가 반대를 하여 부딪히게 되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일단 정해진 대로 해야만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늘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정해 놓고, 그럴 거라고 단정하는 남편에게 나 역시도 '남편은 늘 이럴 것이다'라고 단정하는 일들이 많다.
30여 년 동안 보아온 모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늘 아내인 내가 아닌 상대방이나 자신을 먼저 생각했던 남편의 모습이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나로서는 그렇게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빈 말이라도 편을 들어주거나 해야 하는데 심지어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사람이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닐 거야"라고 상대방을 변호하는 대답을 하거나 아니면 불편한 것은 아예 못 들은 척 딴청을 한다. 그 흔한 빈 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다.
이제는 그러려니 포기도 하고 별로 기대도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끔 불쑥불쑥 화가 나면 이제는 참지 않게 된다. 사실 이혼까지 생각했었기에 더 이상은 뒤로 물러서서 고스란히 당하거나 혼자서 책임지고 싶지만은 않아 가끔은 엉뚱한 고집을 부리기도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여전히 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다.
약간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이고, 무관심하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취미나 관심 가는 부분에는 열심히지만 집안일이나 그 외의 것들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고, 무언가 새로 도전할 생각은 더더욱 없는 듯하다.
그래서 나 역시 함께하고픈 일이 별로 없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것에 만족하며 대신에 서로 참견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무조건 편을 들어주고, 대신 화를 내주고, 최선을 다해 응원해 주는 아이들과는 달리 우리 부부는 여전히 서로에 대해 남의 편이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존중하고, 적당히 무관심하게, 그리고 적당히 서로 이해해 주는 척하며 대신에 이제는 더 이상 부딪히지 않으려 나름 노력하며 사는 것 같다.
큰 시동생
나에게는 시동생이 둘이 있다.
우리하고는 겨우 2살, 4살의 나이 터울이 있지만 시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가 부모가 되는 터울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던 사이라 사실 결혼 후에도 그리 어려운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시부모 없이 시동생들과 지낼 때도 그리 어렵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각자의 성향이 있고, 또 둘째, 막내라는 자리에서도 어느 정도의 기질이 생기는 것 같다는 걸 3남매였던 우리 친가에서도 그리고 시가의 3형제에게서도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설명을 하면 큰 시동생은 성격이 급하고, 예민한 편이다.
그리고 둘째들의 기질이라고 해야 하나 늘 형에 치이다 보니 권위의식도 좀 있는 듯하다. 막내 시동생이 정작 큰형인 남편은 어려워하지 않는데 늘 어른처럼 말하는 큰 시동생을 대하는 작은 시동생의 말투에서 어려워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큰 시동생이 운전할 때는 말도 걸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예민해서 그런지 위도 약하고, 신경 쓰이는 부분도 많아서인지 눈도 자주 터져 충혈된 눈을 자주 보게 된다.
큰 시동생은 시부모가 돌아가시고 결혼을 하기 전까지 직장생활을 서울에서 했기에 몇 년을 함께 살았다. 우리가 결혼을 할 때는 군인이었고, 군인이었을 때 시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제대 후 직장을 서울에 잡으면서 지방에서 올라와 우리와 함께 살았다.
큰 시동생이 결혼할 당시는 시어머니는 있었지만 지방이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18평의 복도식 아파트에 작은 방이 두 개였는데 그중 하나를 큰 시동생이 쓰고, 나머지 방 하나에 남편과 나, 그리고 큰 애가 아장아장 걸을 때이니 4 식구가 지내기엔 정말 비좁았다. 더구나 1주일이 멀다 하고 시어머니가 와서 있었기에 비좁은 집은 더 비좁을 수밖에 없어 집안의 모든 가구는 홀로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이 가구 위에 가구를 포개 놓아서 텔레비전이라도 보려면 두 개의 문갑 위에 올려있는 텔레비전은 드러누워야만 볼 수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서로 잘 몰랐다면 정말 불편했을 텐데 그나마 결혼 전부터 '누나'라고 부르며 알던 처지라 좁은 것을 빼고는 관계적인 면에서 지내는 데는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러나 큰 시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갈등이 아닌 나 혼자만의 서운함이 폭발했다.
사실 큰 시동생이 다니던 회사는 유별난 회사였다. 이른 새벽부터 출근을 시키고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는 것은 물론 경비와 회사 청소까지도 회사 직원들이 다 감당하고 사무실은 모두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자금부에 있다 보니 서류와 영수증 등으로 선풍기도 틀 수가 없는데 그런 곳에 에어컨 조차 설치를 안 해 주어서 하루만 입고 들어와도 러닝셔츠가 흰색에서 누런 베이지색으로 변해 오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매일 삶아야만 했고, 새벽 출근으로 새벽밥을 하고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아서 도시락을 싸야 하는 등의 일이 정말 많았다. 그렇다고 그 회사가 작은 회사도 아닌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회사인데 그렇게 직원들을 혹사시키며 급성장한 회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여러 곳에 땅을 사고, 빌딩을 지으면 그것은 임대로 돌리고 정작 회사 직원들은 지하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를 하는 상황이라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많이 된 회사인데 나중에 퇴사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된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어쨌든 그렇게 2살밖에 차이도 없는 큰 시동생을 뒷바라지했는데 결혼날짜가 잡히고 앞으로 동서와 살 게 될 집을 얻게 되자 어느 날 퇴근 후 가방을 정리해 나오더니 새로 얻은 집을 청소하고 정리도 할 겸 미리 옮기려고 한다면서 집을 나갔다.
잠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몇 년을 형 집에서 살았는데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자신의 일만 우리한테 통보하듯 전달하고는 집을 나간 것이다.
그 일이 기도 막히고 얼마나 서운하던지 잘했던 못했던 수년을 뒷바라지하며 함께 지냈는데 같이 앉아 밥이라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나누며 마무리를 해야지 퇴근해 들어와서는 여관방에서 가방을 챙겨 나가듯 나가며 현관에서 자신의 일정만 전달하고 나가는 시동생을 보면서 무한 배신감이 들었다.
설사 내가 구박을 하며 데리고 있어도 빈 말이라도 고맙다, 수고했다는 등의 인사치레 정도는 하는 것이 도리 이건만 이건 뭐 하룻밤 묵은 하숙집에서도 그렇게는 못할 정도의 대접을 받고 나니 서러움이 폭발해 저녁을 먹으면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자 '뭘 몰라서 그렇다'며 한 마디를 하고는 묵묵히 밥만 먹는다. 자기 동생이니 듣기 싫겠지만 그럼 나는 뭔가 싶어 저녁을 먹고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쨌든 우리 집에서 나간 것이니 그 일도 알려야 하고 사실 서운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여태껏 듣지 못했던 욕들을 엄청나게 하며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 워메 얼마나 속상했노. 그게 고마움도 모르고 미안타." 하며 정말 미안해하는 모습에 도리어 죄송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느 정도 위로가 되어 며칠 혼자 끌 탕을 하다가 서운한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시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큰 시동생이 결혼할 동서랑 함께 화분 하나를 사 들고 찾아와서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였는데 이미 서운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사그라들고, 그 마음도 전달이 잘 되었음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그때의 그 일이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둘째들은 욕심이 많다고 한다.
아마도 위로, 아래로 치이기 때문이지 싶은데 어렸을 때인데도 큰 시동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시어머니랑 마늘을 까면서 아들들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면서 아이들이 무얼 보고 자라는지가 무섭다고 하였다.
남편이 8살이었으니 둘째가 6살이고 막내 시동생이 4살일 때라고 한다.
이불의 호청을 꿰매는데 아들들이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장난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엄마는 누구랑 살꼬?"라는 말에 큰아들인 남편과 막내 시동생은
"나랑, 나랑" 하면서 손을 번쩍번쩍 드는데 둘째 시동생은
"엄마는 할머니 되니까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쌀 줘야지. 그래야 우리가 밥을 먹지."라고 했단다.
그 당시 시골에 살던 시할아버지가 매년 농사를 지어 쌀을 보내와 10 가마니나 되는 쌀을 옮기고 정리하는 일이 매년 가을의 큰 일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리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인데 그 말을 듣던 시어머니는 순간 놀랐다고 하였다.
어린아이 입에서 그리 말하니 당신이 어른을 잘 모시는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갑자기 큰 시동생이 내게 물었다.
"형수랑 나랑 누가 더 높아요?" 무슨 말인지 몰라서
"가족끼리 높긴 누가 더 높으냐"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 말이 두고두고 기억에 있다.
엄밀히 따지면 형의 부인인 내가 더 높은 거 아닌가 싶은데 시동생은 자기가 시가의 사람이니 시동생이어도 자신이 더 높으니 잘해라 하는 식의 뉘앙스였는데 그때는 그 뉘앙스를 몰라서 뭔 말이지 싶어 얼떨결에 그리 대답을 하였다. 그만큼 대접받고 싶고, 약간의 권위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내가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시 작은아버지의 생일에 방문하면서 '그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장조카 며느리를 보니 이런 기쁨도 있다'며 좋아했던 시 작은어머니의 말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면서 함께 시어머니도 올라오고, 직장에 다니던 큰 시동생도 퇴근 후에 오라고 하였는데 퇴근하면서 큰 시동생이 검은 봉지 하나만 달랑 들고 들어오자 시어머니가 급히 큰 시동생을 주방으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 들어가니 검은 봉지를 들여다보고 소리 죽인 목소리에 시어머니의 화가 느껴졌다. 큰 시동생이 돈이 없었다며 들고 온 것이 작은 딸기 팩 하나였기 때문이다.
'작은아버지의 생일에 오면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겨우 이걸 하나 들고 왔냐고 이걸 누구 코에 붙이냐'고 시어머니는 망신스럽다며 화가 났고, 큰 시동생은 마침 돈이 없었다고 하는데 나 역시 이해가 안 되었다. 케이크라도 하나 들고 오던가 과일을 사려면 박스로 들고 와야지 3,000원짜리 딸기 팩 하나를 어찌 사 들고 왔는지 싶었다.
이렇게 큰 시동생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인색한 건지, 아님 어찌해야 되는지 몰랐던 건지 이상하게 그런 모습이 많았다.
옷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같이 살 때도 형한테 남방 하나를 사주지 않았고, 아이들 브랜드가 나오는 회사인데도 그 흔한 티셔츠 하나를 조카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 물론 다 사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할 만한 일인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그러나 남편 말대로 뭘 잘 몰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큰 시동생이 결혼을 하고 처갓 집에 가면서 트렁크 가득 모든 브랜드의 옷들을 담은 여러 개의 쇼핑백을 발견하고 나서는 사실 정이 뚝 떨어졌다.
처가에 잘하는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줬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뭘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이 없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큰 시동생은 인색함이란 단어로 더 많이 자리매김 해 버린 듯하다.
결혼을 한 후에도 동서가 들어왔음에도 두 부부의 모습은 자신들만을 아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대로 각인되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던 늘 큰형이 하는 것으로 알고, 특히나 명절에 시골에라도 가는 길이면 늘 밥값은 우리가 내는 것이 당연한 듯하고, 매년 부모님의 추모예배도 늘 우리 집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준비하고 감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동생들의 모습으로 서운함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인색해진 모습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된다.
어쩌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 부득이하게 큰 시동생 집에서 모임을 하게 되면 난 어김없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봉투를 전하는데 그런 일도 늘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동생이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스스로 받는다. 잘못된 생각인 것을 알면서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윗사람이니 잘해야지 하다가도 작은 행동 하나에 또 마음 문이 닫히게 되고, 이
제는 털어야 하는데 그러려니 털려는 마음에 비해 거리감이 더 늘어나는 것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사람들은 늘 말한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생긴다'라고.
어쩌면 한쪽으로 치우친 나만의 잘못된 기억일 텐데 왜 그리 기억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기억을 하게 되고, 늘 손해보고, 억울한 것만 기억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어 스스로 탓도 해 보는데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어쩌면 큰 시동생이 나를 통해 받은 상처나 서운함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 십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내 기억엔 큰 시동생은 아쉽게도 이런 모습으로 남아있어 내 스스로 자꾸 편협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는 나도 어렸을 때라 누구에게든 기대고, 보상받고 싶은 마음들이 많았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아마도 사소한 그런 것들이 상처가 되었나 보다.
작은 시동생
작은 시동생은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늘 안타까움이 먼저 앞선다.
부모가 없을 때 결혼을 하고 이런저런 도움이나 챙김이 필요할 때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 것들을 내가 다 채워주지 못해 마음 한 곳이 늘 미안하고 안쓰럽다.
작은 시동생은 막내라 그런지 막내 특유의 기질이 있다. 나도 막내여서 그런 성향이 있는데 욕심은 있으나 헛 똑똑이고, 무엇인가를 해도 크게 부담이 없다. 그리고 늘 챙김을 받아서 욕심은 내지만 자기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기에 또 베풀기도 잘하게 되는 것 같다.
작은 시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바람에 대학생 시절부터 함께 살았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군대를 가고, 다시 취직을 하여 결혼을 할 때까지 함께 살았으니 비록 나이는 4살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아들을 키우는 것 같은 마음으로 함께 산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무안할 정도로 작은 시동생에게는 늘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있다.
우리는 시부모가 모두 있을 때 결혼을 하였고, 큰 시동생은 시아버지는 없었지만 시어머니가 있었고, 작은 시동생은 아무도 없을 때여서 정말 부모의 마음으로 함께 살고, 결혼을 시켰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애틋함이 있고, 또 막내동서도 성품이 착해서 사실 한쪽으로 치우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듯하여 시부모들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하나가 아닌 둘이 되다 보니 은연중에 비교를 하게 되고 서로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알게 되고 그런 가운데 한쪽으로 당연히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는 듯하다.
작은 시동생의 대학생 시절은 정말 살얼음판을 겪는 것 같은 시기였다.
매일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은 어느 대학의 학생들이 어쨌다니, 누가 잡혀갔다느니 하는 소식들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하루는 작은 시동생이 학교에 간다고 아침에 나갔는데 저녁에 들어오지 않아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늦은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수많은 염려와 걱정들이 물밀 듯 생겨나고 무서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우리는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집안의 창고 문도 열어보고, 알고 있던 작은 시동생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밤새 뜬 눈으로 남편과 전화통만을 바라보았는데 새벽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시동생을 보고는 울음이 터졌었다.
우선은 안전한 것에 대한 기쁨과 무사한 것에 대한 긴장이 풀어지면서 나온 눈물이었고 이어 이성을 갖게 된 남편이
"왜 연락을 안 하냐? 밤새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알아, 너 뭐 하고 다니는 거야?"라는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더니 철썩 소리와 함께 시동생의 얼굴로 손이 날아갔다. 뭐라 말릴 새도 없었고, 무슨 일인가 싶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본 적이 없는데 손찌검까지 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해 본 일이 아니어서 나는 물론 때리는 남편도, 맞는 시동생도 서로 놀라 잠시 정지된 상태였는데
"조카가 자는데 전화를 하면 깨서 밤새 형수가 애를 달래느라 고생을 할 것 같은데 연락할 시간을 놓쳐서 못했어. 미안해 형" 하는데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작은 시동생은 무심한 척하면서도 아이로 인해 잠을 설치고 덩치가 큰 조카를 안고 힘들어하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가 울던 말던 잠을 잤는데 작은 시동생은 물 먹으러 나오는 것처럼 거실로 나와
"아직도 안 자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었는데 자신을 걱정할 거란 생각보다 조카로 인해 밤새 고생할 형수가 먼저 생각나서 그런 이유들로 연락을 못했던 것이다.
그 말에 남편도 미안했는지
"그래도 앞으로는 연락을 해. 밥 안 먹었지? 밥 먹자" 하는 말에 작은 시동생도 자리에 앉아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가지고 둘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실 '이 사람들 미친놈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조금 전까지 뺨을 때리고, 눈물을 쏟고, 엉뚱한 동생의 말에 감동을 받고 그랬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사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난 웃음이 났는데 남편은 동생들과 늘 이렇게 화를 하루 이상은커녕 그 순간으로 풀고 바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늘 지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런 모습을 보고
"둘이 코미디 하냐"라고 물으면서도 정말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아침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학생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던 용돈인데도 가끔씩 집에 오면서 우유를 하나씩 사 들고 왔다.
갑자기 우유는 왜 샀냐고 하면 그냥 먹으려고 샀다고 하는데 우유가 떨어져 허둥대던 날 봤던 것 같다. 그래서 아침에 우유가 얼마나 있는지 냉장고 문을 열어 확인했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슈퍼에서 하나씩 사 들고 온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게 자상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쑥스러운지 늘 표현을 하지 않아 잘 모를 수 있는 모습을 많이 갖고 있다.
부지런하기도 하고, 뭔가 늘 꼼지락거려서 유별나게 시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형제들이 놀리기도 한다.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일을 만들어낸다고 일하기 싫은 형들은 구박을 하고, 시어른들은 또 그런 작은 시동생을 좋아했다.
늘 지병이 있던 부모로 인해 조심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시절부터는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친정아버지는 그런 작은 시동생을 자주 불러 밥을 먹이고, 명절이면 늘 같이 데리고 오라고 하여 용돈을 주고 하였다.
그래서 더욱 결혼 후 처가의 부모로부터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했는데 그것조차 여의롭지 않아 중간에 동서랑 힘든 시간도 겪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동서를 위해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여전히 성실하게 잘 산다.
자주 볼 수 없고,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남편은 1년에 한 번은 꼭 미국 시동생이 사는 곳엘 간다.
물론 출장을 빌어 가지만 미국이라는 곳이 우리나라처럼 좁은 곳도 아니어서 작은 시동생이 있는 곳까지는 또 수많은 시간을 들이고, 국내선으로 몇 번을 갈아타기도 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들려서 직접 얼굴을 보고, 함께 예배도 드리고, 비싸다면 비싼 한식을 사주고, 필요한 가구나 아이들 용돈도 주면서 형으로서 50이 넘은 동생의 부모 역할을 끝까지 잘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이런 시가에서 시아버지의 지병으로 대학을 졸업도 하기 전부터 결혼 이야기가 있었기에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을 서둘렀고, 남편은 군대를 면제받은 데다가 학교도 남들보다 1년 일찍 입학하는 관계로 보통의 남자들보다 사회생활이 몇 년은 훨씬 빨랐다.
그럼에도 먼저 결혼한 친구들도 있어서 신부인 내 입장에서는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늦은 것도 아닌 어쩜 적당한 때에 결혼하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장손 맏며느리라는 이름 앞에 모두 한 마음으로 걱정들을 해 댔다.
'감당할 수 있겠냐, 겁도 없다, 장남인 줄 몰랐냐'는 등 자기들 나름대로의 상상을 줄줄이 읊어대느라 축하를 하러 왔는지, 시비를 걸러 왔는지 도대체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시가식구와의 관계에는 모두가 민감하여서 맏며느리 자리는 어쨌든 피하려는 분위기였는데 꼼꼼한 듯하나 늘 허술하니 구멍이 많고 몸도 약하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 장손 맏며느리가 된다니 나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걱정을 하는 것이 도리어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맏며느리 자리를 꿈꾸게 된 동기가 우습다면 우습지만 나름 스스로 깊이가 있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 두 올케가 집안의 어떤 행사나 큰 일을 하고 나면 늘 '수고했다, 큰 일 했구나' 하면서 칭찬과 격려를 받는 것을 보고 자랐다.
처음에는 올케가 한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둘이 되면서 으레 큰 올케에게 모두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보기 좋았는지 모르겠다.
워낙 성품이 온유한 큰 올케이기도 하지만 시부모와 함께 살다 보니 이런저런 소소한 것까지 다 준비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히 들어야 할 칭찬인데 그 모든 수고는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일을 주도하며 진행해 나가는 멋진 리더십과 맏며느리라는 타이틀만이 제법 그럴듯해 보인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이왕 하는 수고인데 나도 막내에서 대장 며느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대학시절부터 결혼을 한다면 맏며느리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고, 일하는 모습이나 성향에 따라 다를 텐데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칭찬받는 모습만으로 욕심을 낸 것이다. 그리곤 늘 말했던 것처럼 맏며느리보다 더 높다면 높고,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장손 맏며느리가 되었지만 다른 둘째, 셋째 며느리와는 그 역할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결혼하던 그 당시는 몰랐다.
그저 첫 며느리를 맞이하는 시부모의 분주하고, 정신없음이 느껴지고, 벌써부터 큰아들 내외를 챙기는 사랑이 부담스러우리만큼 무겁게 느껴졌을 뿐이다.
결혼식 날도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먹었을 테니 신혼여행 가기 전에 밥을 먹여야 한다며 피로연을 하던 식당의 한쪽 방 안에 우리 부부를 들여놓고, 간섭받지 못하게 하느라 신발까지 방 안으로 들여놓는 시어머니를 보고 '뭘 저렇게까지......' 하는 마음만 들었다.
그렇게 챙겨주는 것이 고맙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친정에서도 막내딸로 늘 챙김을 받았었기에 그렇게 챙김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뭘 저렇게까지 유별날까 하는 무덤덤한 마음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이 사람, 저 사람이 새 신랑과 새 신부를 찾자 밥을 먹을 시간이 없다며 궁색하게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사실 아침부터 긴장해서인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또 왜 그리도 떨리던지 결혼식이 끝났을 때에는 거의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미리 예약되어 있던 미용사가 갑자기 아파서 못 나왔다며 다른 사람이 머리를 이렇게 올렸다, 저렇게 넘겼다 하면서 시간만 끌고 결국은 엉성한 머리와 처음부터 이야기되었던 스타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시간에 쫓겨 머리를 커버하기 위해 실제로는 예약에 없었던 모자까지 동원해야 하는 우스운 모양이 되었지만 시간 때문에 다시 만질 수가 없어 울먹거리며 결혼식장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도 그렇지만 친정식구 모두의 마음도 상해 있었다.
또 찾는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던지 사실 시어머니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멍하니 이리저리 치이다 겨우 끌려가다시피 신혼여행도 갔을 것이다. 지금처럼 드레스에서 한복이나 파티복으로 갈아입고 피로연 자리에 와서 인사하던 그런 모습은 전혀 없었기에 결혼식을 마치고나면 빠듯한 일정으로 신혼여행길에 오르기도 바빴다.
어쨌든 시어머니의 단속 덕분에 편안하게 밥도 먹고, 잠시 쉴 수도 있었지만 대신에 친정부모나 오빠들과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식사는 제대로 했는지, 친척들 중에서는 누가 왔는지, 결혼식 내내 침울해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엄마보다 더 머리에 자꾸 떠올랐다. 딸이 하나라서 그런지 엄마보다 아버지와 더 가까이 지내고 사이가 좋았는데 자꾸 아버지의 슬픈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물론 시가랑 가까워서 앞으로도 자주는 보겠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라고 제대로 한 번 불러보지도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미용실에서 잘못한 머리 때문에 툴툴거리며 식장엘 와서 울먹거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걱정도 되고,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이 밥은 먹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물어도 보고 다독거리기라도 했어야 안심을 했을 텐데 결혼식을 마치는 순간 갑자기 시가식구들과 사라져 버린 딸자식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하는 생각이 제주도를 향해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도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딸자식을 보내는 입장이라서 그런지 나중에 알았지만 식당 밖에서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식사도 못하고 계속 서서 기웃거리다 그냥 돌아갔다는 말을 뒤늦게 들었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니 또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며칠을 혼자 속앓이를 하였다.
그것이 종갓집 맏며느리로서의 첫 입문이었다.
결혼식의 화려함도, 교회에서 결혼예식을 드렸는데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축가는 누가 무슨 곡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결혼식 날부터 딸자식을 만나는 것조차도 눈치를 봐야 하는 친정부모와 내 자식은 내가 챙긴다며 직접 진두지휘 하여 만날 사람과 만나지 못할 사람을 구분했던 시부모 사이에서 철없는 딸은 친정부모의 깊은 서러움도 모르고 종갓집 맏며느리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런 것은 꼭 맏며느리가 아니어도 딸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가 어느 시대에 있었던 일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그렇게 그런 시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냈다.
그래서였는지 아래 동서가 들어올 때는 그 아쉬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 자신이 먼저 챙겨서 친정부모를 찾아뵙도록 했다. 그리고 멀거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볼 때는 마치 나 자신이 신부가 되어 만나듯이 그리 반갑고 흐뭇할 수가 없었다. 어디 먼 데라도 갔다 와 오랜만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듯이 말이다.
4일만 지나면 다시 돌아와 찾아 뵐 건데 그 4일이라는 숫자 앞에 무너졌을 친정부모의 마음과 철 없이 자신의 불편함만 투덜거리던 25살의 딸은 가깝고도 먼 시가로의 첫출발을 그렇게 내디뎠다.